< 한성의 과거(3) >
한성은 눈을 떴다.
[과거의 잔상]이 끊겼다.
아쉬웠지만,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위험을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다.
“쿨럭.”
한성이 앉아 있던 강의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듯했다. 그래서 한성이 깬 거겠지, [과거의 잔상]을 진행하고 있을 때는 주변 캐릭터가 한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행히 다친 곳은 별로 없다. 다리 한쪽이 부러지고 어깨가 빠진 정도? 무방비 상태에서 건물에 깔렸는데 이 정도면······ 아니, 턱도 안 움직이네.
한성은 마법을 사용했다.
주변의 잔해를 치우고 포션을 꺼내 먹었다.
“아우, 이제 살겠네.”
한성은 그제야 밖에서 쏟아지는 찌릿한 살기를 느꼈다. 이 모든 살기와 기세는 모두 한성에게 향해 있었다.
우우웅.
한성은 검을 쥐곤 강하게 점프했다. 무너진 건물을 순식간에 뚫고 넓게 갈라진 하늘이 보였다.
후욱.
순간, 시간이 느려졌다.
[과거의 잔상]에서 본 장면은 희미하고 빠른 기억에 불과했다.
하지만 검을 쥐었을 때, 예전의 기억이 또렷이 변했다.
원래 이 세계관에서 [무공]이라는 건 쓸 수 없다. 아니, 있긴 하다. 하나의 ‘특성’ 혹은 ‘특수 능력’으로 들어가는 것들이라 한성이 흉내 낼 수 없던 것뿐.
- [중단된 과거의 잔상]이 떠오릅니다.
- 당신의 육체에 과거의 잔상이 스며듭니다.
- [천마에 도달했던 자에 대한 예우]
- [천마]의 일부 능력을 꺼내옵니다.
- [파천신화공]······ 12% 획득 완료.
- [호신 강기], [검강], [귀진진영보], [천마군림보]······ 획득 완료.
한성이 예전 [천마]라는 게임을 했을 때 얻었던 스킬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른다.
하긴, 이 세상에 떨어진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생각나는 건 있다.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었지만, 이곳에서 사용하는 검술과 각종 무공에 관련된 설정은 예전 무협 가상현실 게임이었던 [천마]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쩌면 어딘가 연결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다.
한성에겐 [과거의 잔상]이라는 또 하나의 상태창이 생겼다.
이것은 특성도 이능도 아니다.
‘과거에 한성이 얻은 능력’이다. 원래부터 있었지만, 터무니없이 오래된 과거의 능력이기에 그 위력이 한참 축소되어 나타날 거다.
키잉.
전신에 호신강기를 씌우고 검에서 검강을 뽑아냈다.
위력이 아무리 떨어졌다고 해도 설정상 ‘천마’가 사용했던 기술. 당연히 다른 검사들이 보기에 압도적인 위력을 뽐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성은 [신격]을 갖췄으니까.
앞에서 달려오는 성시연이 보였다.
그 뒤의 ‘제약의 괴수’까지.
한성은 허공을 밟고 쏜살같이 날아가 괴수의 등에 검을 꽂아 넣었다. 원래는 죽지 않아야 할, 괴수. 오히려 닿은 한성이 사라졌어야 할 상황.
하지만 사라진 것은 그 괴수였다.
한성이 아주 잘 아는 ‘제약’ 중 하나다.
누군가 시스템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얻는다던가, 퀘스트의 강제력, 시스템의 허점을 꿰뚫거나 이 세계를 유지하는 밸런스를 과도하게 벗어날 때 생기는 ‘강제성’.
그게 일정 위험 수치를 벗어나게 되면 나타나는 ‘제약’이다.
한성이 도달한 괴상한 [과거의 잔상]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한성도 이렇게까지 강력한 ‘제약’이 나타난 것은 처음 보았다.
“이한성!”
성시연이 한성에게 달려왔다.
눈은 팅팅 부어 있었고 코끝이 벌게져 있었다.
“왜. 뭔 일이야. 누구한테 맞았냐?”
“에라이, 개새끼야!”
“봐 줘. 구해줬잖아. 그리고 일단 물러나 있어.”
한성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괴물이다.
하지만 한성의 눈엔 그것들이 다르게 보였다.
기억의 파편들. 단어와 문장. 어떤 것은 화면의 조각.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려는 듯 아가리를 포악하게 쳐 벌렸다.
“다들 물러나.”
한성은 ‘격’을 실어 말했다.
그 격은 주변을 휩쓸고 저 ‘제약’의 반경 안에 들어온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키이잉.
심연 중앙에서 눈동자 하나가 생겨났다.
털썩.
끄으으윽.
하늘에서 쏟아진 거대한 격의 향연은 한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몇몇은 정신을 잃고 피를 토했으며, 몇몇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렸다.
그나마 버티는 사람은 한도석 정도에 불과했다.
그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데굴.
누군가를 찾는 듯, 눈동자가 돌아가더니 한성에게 멈춰졌다. 동시에 압도적인 ‘격’이 한성을 뒤덮었다.
“크윽.”
강하다.
아주 강하다.
아무리 ‘제약’이라고 해도 이 정도라고?
본래 ‘제약’이라는 것은 플레이어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플레이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강해야 해결하지.
이건 너무하지 않았는가.
도망갈 수는 있다.
어차피 지금 한성의 힘으로 저것을 온전히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성이 조금이라도 밀린다면 저 ‘제약’은 서울을 통째로 삼켜 버릴 거다.
메인 캐릭터 넷에서 다섯.
메인 지역인 서울.
그 정도는 먹어야 한성을 포기하고 돌아가겠지.
그런 식으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저 ‘제약’이라는 것이다.
한성은 결정을 해야 했다.
이곳을 벗어날 것인가.
이곳의 모든 이들을 지킬 것인가.
“시간을 벌어줄 순 있습니다.”
한도석이 한성에게 말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한성의 속을 아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는 분명히 아는 느낌이었다.
“크윽, 나도 조금은······ 도움이 될 거야.”
바닥에 쓰러져 겨우 버티고 있던 한별이었다. 뒤로 성시연, 진훈, 세르게이, 최이명 등이 한 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계약한 신격의 힘을 있는 대로 받았는지 사방으로 ‘격’이 줄줄이 새고 있었다.
부담될 거다.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격’을 소모해야 하니까.
키이잉.
제약의 동공이 커지며 이쪽을 주시했다.
더욱 커다란 격의 향연이 몰아닥친다.
“시간을 벌어줄 수 있겠습니까?”
한성이 물었다.
당장 한성에겐 힘이 없다.
“그 정돈 어렵지 않죠······.”
한도석이 뒷말을 삼켰다.
누구도 죽지 않을 순 없을 거다. 지금도 수많은 시민이 죽어가고 있었고 서울의 기반이 무너져간다. 반대쪽에서는 영웅들이 죽어간다.
이곳을 지키는.
아니, 한성을 지키는 사람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게 될 거다.
“그럼 부탁합니다. 10분. 아니, 5분 만이라도.”
한성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가장 생존율이 높은 건 서울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성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이 상태로? 불가능하다.
저것은 ‘천외천’에 존재하는 온전한 신격과 대등한 힘을 지녔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거스른 과거를 완전히 기억하고 체득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아직 [세상의 끝]을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이 [천마]의 힘을 끌어온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5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루에 몇 시간. 차근차근 하나씩 밟아가야 한다. 최소 세 달 이상을 말이다. 보통 17년이라는 [과거의 잔상]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만드는데 그 정도가 걸리니까.
‘할 수 있다.’
한성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 할 수 있을까?
한성은 약력, 전자기력을 움직일 수 있고 시간과 공간으로 중력을 건들 수 있다. 그거면 한성의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중력의 압력을 버틸 수 있을까?
‘해 본다.’
약력과 전자기력을 사용하면 한성을 ‘중력’의 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으아아아!”
정면에 달려나가는 한도석이 보인다.
그가 다시 한 번 하늘을 가르며 이 일대로 몰려드는 ‘격’을 가른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이 몸을 제대로 일으켜 주변으로 달려드는 괴수를 상대하기 시작한다.
닿으면 소멸한다.
직접 닿지 않고 마력과 격을 끊임없이 소모해가며 버텨야 한다. 말은 쉽지만, 까딱 잘못하면 순식간에 죽음이다. 게다가 5분 내내 격을 쏟아낸다?
당연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한성은 눈을 감았다.
이젠 정말 친구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화악.
한성의 주변으로 공간이 극단적으로 왜곡되며 시간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중력의 압박이 시작되었지만, 약력과 전자기력으로 최소 단위의 힘에 접근했다.
버틴다.
어떻게든 버틴다.
수천, 수만 배의 시간의 격차와 그에 비례하는 강한 중력을.
* * *
한도석은 이를 악물었다.
한성이 보여준 ‘호신강기’와 ‘검강’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스승이자 계약한 신격인 [천마]의 무공, [파천신화공]에 의해 생성된 내공으로 만들어진 기술이었다.
당연히 놀라 수밖에 없었다.
그 기술은 천마가 아닌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테니까.
한도석도 그걸 익히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였는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뒤이어 들려온 ‘천마’의 목소리였다.
[ 저 아이를 지켜야 한다. ]
“그게 무슨······.”
정말 오랜만에 들려온 신격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다짜고짜 한성을 지키라니.
그 와중에 한성은 천마 특유의 검붉은 호신강기를 생성하며 격에 대항했다. [신격]에 오른 한성도 저 시선에 격이 짓눌리고 있었다.
한도석은 지금 서 있기도 힘들었다.
[ 내 힘을 빌려주겠다. ]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은 처음이다.
천외천에 존재하기에 이곳으로 의사를 전달하기 힘들다고 했었다. 간혹 한도석이 아주 위험할 때나,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만 의지를 전달했었다.
“안 그래도 도우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성이 한 일을 한도석이 모를까.
한도석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한도석이 반드시 해야 했던 일을 대신 해 준 게 한성이다.
한도석은 [파천신화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래 봤자, 6성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걸로 하늘 정도는 가를 수 있다.
저 위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심연의 눈동자를 굴리는 저것에게.
털썩.
한성이 주저앉았다.
무엇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성이 무언가 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있다.
키잉.
한도석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뒤로 진훈과 한별. 그의 친구들이 따라붙었다.
참 새삼스러웠다.
겨우 후보생에 불과한 17살 소년, 소녀들. 그들이 인류를 지키는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한성 같은 원래 말도 안 되는 놈 옆에 있으니 몰랐다.
전 세계에서 이 나이에 이렇게 싸우는 이들이 있을까.
다른 이들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위험 속으로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뛰어든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겠지.
게다가 요즘 애들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벌써 ‘신격’에 손을 뻗은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푸확.
하늘에서 이곳으로 촉수를 뻗었다.
그것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괴수들이 쏟아진다.
저게 도대체 뭘까.
[ 경계다. ]
“무슨······?”
한도석의 귓가에 들려오는 천마의 목소리.
오늘만큼 이렇게 많은 말을 한 적은 정말 없었다.
앞에서 쏟아지는 괴수를 향해 후보생들이 달려든다.
진훈이 황금빛 마력을 뿜으며 괴수를 뒤로 밀쳐낸다. 그 웅장한 황금빛 마력은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지만, 진훈은 그것을 또 다시 만들어낸다.
다른 이들도 다를 게 없었다.
한별은 요괴왕의 힘을, 성시연은 마기를, 이하얀은 드래곤의 용언을. 그 어떤 힘을 싣고 공격을 해도 뚫리지 않고 소멸시켜 버린다.
한도석은 검을 들어 올렸다.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 ‘경계’를 무너뜨려라. ]
천마의 목소리는 한도석에게 힘을 줬다.
발끝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강대한 [신격]의 힘이 한도석의 검에 실렸다.
쿠웅.
그것은 다시 한 번 하늘을 갈랐다.
* * *
한성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최대한 빠르게 과거를 복기한다.
과도하게 집중된 중력에 한성의 몸은 무너져 갈 거다. 그래, 최소 단위의 힘으로 육체를 보호하고 있지만, 5분 정도야 어떻게든 버티겠지.
하지만 친구들은 아니다.
한성이 1초 늦을 때마다 누군가 죽을 확률이 대폭 상승한다.
최대한 빠르게.
한성의 시선 앞에 거대한 화면이 생성되었다.
그 그림은 한성에게 쏟아져 그를 감싸 안았다.
한성은 눈을 떴다.
주변의 수많은 기억이 허공에 떠 있다.
이제 이것 중에 한성이 지닌 과거의 일부를 구성해야 한다. 그게 현실에서 일명 ‘찐따’였으며 ‘히키코모리’였던 예전의 한성일 수도 있고 [천마]를 랭커로 플레이하던 한성일 수도 있다.
[세상의 끝]을 플레이하던 한성은 아직 볼 수 없다.
아직 그 과거는 진입하지 못했으니까.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됐으니까.
이 [과거의 잔상]은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 혹시 검은 땅이나 아마존과 같은 대규모 신격 전쟁이 발발하면 그 자리에서 [과거의 잔상]을 마쳐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제약’이 등장하겠지.
어쩌면 그게 더 큰 비밀병기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것.
한성의 본질을 잊지 않는 거다.
“튜브를 시작하며”
그것으로 ‘현실’이 한성을 기억한다.
“1세대는 거르고 2세대 [천마]를 완전하게 복기한다.”
[천마]라는 게임은 가상현실 게임으로 ‘무협’을 일으키고 정립했던 최초의 완성된 게임이었다. 한도석과 계약한 [천마]도 그곳에서 따왔다.
‘둘은 분명히 연관이 있다.’
한도석이 갑자기 꺼낸 말.
그리고 그의 표정이 확신을 줬다.
이곳에서 [천마]는 굉장히 강하다. 나중에 천외천을 정벌할 때 엄청난 힘이 된다.
“그리고 다른 게임들.”
모든 게임을 하나로 엮는다.
그것은 스토리가 된다.
한성의 과거를 완성하는 이야기.
한성은 차근차근 쌓아 올렸다. 지금까지 한성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 삶이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한성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세상의 끝] 속에서 한성의 과거.
그래, 정했다.
[플레이한 게임의 능력을 현실로 가져올 수 있는 능력자]
그게 한성의 과거였다.
< 한성의 과거(3)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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