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의 과거(1) >
오랜만에 아카데미에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사실 며칠 되지 않았다.
아마존으로 수업을 갔다가 일이 생기고 그 날에 모두 해결해 버렸으니까. 아마존에서 뒷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하루 쉬었다고 해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거다.
그래도 새로웠다.
한성은 이제 아카데미를 굳이 다니지 않아도 된다.
정말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아직 친해지지 못한 인재를 찾아 영입하는 것. 또는 친해지는 것.
하지만 다른 곳에 가도 영입할 인재는 많다.
한성은 그저······ 이곳이 좋았다.
현실에서는. 아니, 원래 살던 세상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뭐가 현실이고 뭐가 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삶이 꿈같다.
하여튼.
한성은 현실에서는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외로움이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고 그를 응원해주는 팬도 많았다. 게다가 죽을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사방이 재앙이고 미친 놈들 뿐이지만, 이곳이 좋았다. 아카데미? 항상 테러에 시달리고 메인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최적의 장소다.
아마 이 평화도 오래가지 못하겠지.
그래도 좋았다.
한성을 믿고 따라와 주는 친구들. 정말 아끼는 이하얀부터 진훈, 한별, 세르게이, 나디아, 안혜림, 얜 샤를 등등. 그리고······.
“······근데 네가 왜 이 옆에 앉아 있냐.”
“내가 뭘.”
한성의 옆에는 성시연이 앉아 있었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70이 넘어가는 매력을 보유하게 될 캐릭터였는데, 릴리스의 화신체이자 마왕의 육체를 지니게 되면서 그녀의 매력은 대폭 상승했다.
[나는 관종이다]로 매력이 한껏 상승한 한성도 성시연의 옆에 있으면 꿇릴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 생겼을까.
게다가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한성을 향해 호감을 내비치는 건 더 신기했다.
뭐, 굳이 그거 때문에 이곳이 좋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여기 50위 권 안쪽 상위 후보생만 들어올 수 있는 거 아니냐?”
“맞지.”
“넌?”
“나야 원래 순위도 있었고······ 한도석 강사님이 내 무력을 잘 아니까.”
이런 게 특혜라는 것인가.
한성은 피식 웃었다.
뭐, 이러면 어떻게 저러면 어떨까.
이렇게 모여서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밥을 먹고······ 위기가 오면 같이 등을 맞대고 싸우면서 서로에게 기대는 게 너무 좋았다.
홀로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는 극한의 외로움.
친했던 캐릭터가 한성을 잊었다는 공허함.
그 모든 걸 이곳에서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선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할까.’
한성은 그런 생각을 하다 한도석을 바라봤다.
한도석은 지금 이 반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 중이었다. 아마존에 데려간 이들 중에서 이 반에 있는 후보생 중 절반이 [원탁의 기사] 타이틀을 얻었으며 [초월 신화]의 지분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 이곳에 모인 모두가 S등급 영웅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최근 A등급에서 S등급으로 너무 많이 오르기도 했으며 SS등급과 SSS등급이었던 이들이 한 단계 상승해 [신격]을 얻은 이들도 꽤 생겼다.
세계 영웅 협회에서 ‘등급’의 체계를 수정한다고 공표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 후보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 나도 한 단계 상승했다는 거지.’
그나마 다행이다.
조금만 덜 활약했으면 후보생들에게 따라잡힐 뻔했다. 물론, 신격을 얻게 된 ‘이한성’ 후보생과 비교하면······.
“강사님!”
누군가 한도석을 불렀다.
이하얀이었다. 한성의 딸이자 드래고니안인 후보생.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이 아카데미의 이 반의 무력은 일반적인 상식의 수준을 넘어선 것 같았다.
“오늘 수업은 어떤 걸 하나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의자에 붙인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손을 번쩍번쩍 든다.
“······나도 모르겠다.”
진심이었다.
이곳에 모인 놈들을 데리고 어떤 수업을 한단 말인가. 사실 가르칠 것도 없었다. 기초적인 지식과 이론들. 실전에 필요한 노하우 같은 것은 다른 강사가 잘 가르칠 거다.
한도석은 그런 걸 가르치려고 이곳에 남은 게 아니다.
“오늘은 ‘격’이라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죠.”
한도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한 번쯤은 반드시 해야 할 말이다. 하지만 그걸 후보생에게 할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신격’을 이룬 사람은 이한성. 뭐, 다들 아시겠죠.”
“관종······ 푸훕.”
“크, 크흠. 그것도 신격이긴 하죠.”
성시연과 세르게이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워낙 공개적으로 [관종의 신]이라고 말한 덕분에 한성은 꽤 많은 인지도 포인트는 물론 ‘업적’까지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이제는 인지도 포인트가 크게 중요하진 않다.
원래 인지도 포인트는 이 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 ‘인지도’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시스템에 불과했으니까.
한성 정도의 경지가 되면 직접 느낄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한성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한성이 지닌 힘의 질과 양. 성향이 달라진다. 특히 [관종의 신]인 한성은 더욱 그랬다.
“그것에 가까워진 후보생도 몇 명 있죠.”
대표적으로 이하얀, 성시연. 둘이 있었고 진훈과 한별. 최이명 정도가 꽤 높은 격에 올랐다. 나머지도 일정 격은 대부분 얻은 상태다.
정말 전 세계 어딜 봐도 압도적인 전력이라 볼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아카데미에도 밸런스 조정이라며 시스템이 ‘시련’과 ‘기연’ 등을 나눠주겠지만 말이다.
“아, 그 전에 세계 후보생 경연대회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후보생이 참가하겠지만, 이 반에서 특히 많은 후보생이 참여해야겠죠?”
[세계 후보생 경연대회]
전 세계 후보생들이 모여 순위를 결정하는 경연이다. 그 경연에서 후보생들이 얻은 순위로 아카데미의 순위가 결정된다.
그 경연 대회에서 항상 상위권에 들었기에 [한국 영웅 아카데미]가 세계에서 꼽히는 아카데미가 된 것이고 말이다.
“거기서 입상하고 높은 순위를 얻는다면······.”
한도석은 간단하게 상금과 상품 등을 소개했다.
상상 이상으로 큰 규모의 상금과 상품에 후보생들이 놀랐다. 하지만 한성의 관심은 오로지 그 경연 대회에 모일 시선이었다.
‘지구에서는 안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축제지.’
그거면 충분하다.
거기에 눈에 띄어야 한다.
1등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한성이 잠시 경연 대회에서 생각하고 있을 때, 한도석이 다시 ‘격’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처음엔 희귀, 역사, 전설의 격을 설명했고 ‘신화’로 넘어왔다. 후보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또렷하게 뜨고 집중해 들었다.
신기할 거다.
이곳의 모든 후보생이 아마존의 [성배 전쟁]을 겪었으니 더 할 거다.
“보통 인간이 신격을 얻으면······ ‘비천한 격’이라 부릅니다. 아무리 신격이라고 같은 신격이 아닌 거죠.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이었으며 영웅이었고 전설이었으니까.”
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한성이 신격을 얻었다고 해도 ‘하격’에 불과했으며 한도석이 말한 ‘비천한 신격’일 뿐이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신격을 얻은 영웅이, 다른 신격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현계’이기 때문이죠.”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추후에 그들의 세계인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천외천]이 지상에 겹쳐지기 시작한다. 이 게임에서 그것은 종장(終章)이라 표현한다.
“저도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그저 고고한 ‘신격’의 경지에 오른 제 스승님이 알려준 것일 뿐이니까요.”
그 종장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한성만이 알고 있다.
한도석이 아는 것은 그저 ‘천외천’이라 불리는 신격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 세계에서 제대로 된 힘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한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잊고 있었다.
아주 빠르게 ‘신격’을 얻었다고 오만했다.
한성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과거의 잔상.”
한성의 중얼거림.
동시에 허공에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 사라진 당신의 과거를 새로이 구축하시겠습니까?
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바로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 잊힌 과거가 존재합니다.
- 당신의 과거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이건 한성도 처음 보는 것이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전 회차.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빠졌던 이 게임. 한성이 플레이했던 과거들. 이곳에는 없어야 하지만, 릴리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던 그 과거.
한성은 끄덕였다.
- 당신의 과거 속으로 진입합니다.
푹.
한성의 의식이 꺼졌다.
* * *
이종칠은 앞에 세워진 11개의 원통을 바라봤다.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재료와 기술로 만들어진 구울이다.
이한성이 원했던 전력.
그게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최고의 재료를 사용했다고 해도,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해도 완벽한 구울은 없다. 모든 건조가 끝나고 잠재력을 확인해야 안다.
[드래곤 슬레이어]
기본적으로 월드 리그에 진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울이다. 유사시에 한성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인 전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게 가능할까.
구울로.
검은 땅에서 구울이 활동하는 것은 ‘마기’에 침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검은 땅에서 ‘마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스럽게 구울의 활용도는 줄어들었다.
“그래도 필생의 역작이잖아.”
머리를 질끈 묶고 피곤이 덕지덕지 뭍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예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한예슬이 이종칠 옆으로 다가왔다.
이종칠은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이미 둘은 연인이었다.
“퉤! 아 냄새!”
“아까 양치했거든!”
“아침에 한 거잖아. 미친. 이건 분명 믹스 커피 먹고 담배까지 핀 냄새야. 아가리 똥내!”
“······나 스토킹하냐?”
“내가 하루이틀 맡냐? 미친 새끼.”
“아니, 남편 될 사람한테 말이 그게 뭐냐.”
“네, 다음 똥내.”
“이년이?”
둘은 연인이 되기 전부터 싸웠지만, 연인이 되고 나서는 더 했다. 게다가 이제 애까지 생겨서 결혼하기로 했는데, 그 이후로는 거의 원수 지간이다.
“하여튼 다 완성됐으니까, 한성님한테 연락한다.”
“그러시던지.”
한예슬은 이종칠을 째려보고는 스마트 워치로 연락을 보냈다.
“잘 만들긴 했어.”
모두 인간형이다. 작은 소년, 거대한 덩치, 평범한 남성. 겉모습은 평범하다. 하지만 이들이 리그에 데뷔할 때 불러올 파란(波瀾)을 생각하면 벌써 심장이 뛰었다.
* * *
길이현은 운이 좋았다. A등급 영웅에 불과했지만, 아마존 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작은 ‘격’을 얻었으니까. 사실 그것은 길이현에게 큰 변화를 주진 못했다.
그저 덜 자고 덜 먹고 덜 쉬어도 일할 수 있는 체력이 생겼다는 것뿐.
그녀는 방금 [드래곤 슬레이어]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다음 달에 있는 지역 리그에서 우승하고 연말에 있는 전국 리그에서 상위권에 들면······ 내년엔 월드 리그에 나갈 수 있겠네.”
아직 잠재력을 키우지 못해서 월드 리그로 보내준다고 해도 제 힘을 낼 수 없다. 하지만 지역 리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우승할 수 있을 거다.
재료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검은 땅의 마수, 바실리스크, 해룡의 혈액, 아마존의 지배종과 신격의 파편 등등. 정말 말이 안 될 정도의 재료가 들어갔으며 이종칠이라는 구울 제작 특성을 지닌 천재가 만들었다.
“스폰으로 제현 PMC 붙이고······ ‘관종의 신’도 붙이라고?”
이럴 때 보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그 덕분에 제현 PMC가 제현 그룹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자기 사람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 모든 게 한성을 든든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잘생겨지기도 했고.”
사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성이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잘 알기에 성형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게다가 성형을 받는다고 나올 얼굴이 아니다. 게다가 그의 몸을 보라, 어떻게 몸까지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가.
영웅이라면 그 정도 몸을 갖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 단련되었다는 것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언제 남자를 보면서 넋을 잃었던 적이 있는가.
“크흠.”
길이현은 한성의 얼굴을 상상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괜히 주변에 누가 있는 건 아닌지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 문득 표정이 굳었다.
요즘 제현 그룹 회장이자 길이현의 오빠인 제현 가문의 장남 ‘길장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밑에서 길이현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니, 커지는 건 알고 있었겠지.
규모로 보면 PMC가 제현 그룹의 절반까지 갔지만,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지배 지분은 길장현이 확실하게 틀어쥐고 있었으니 위기감은 없었을 거다.
‘언젠간 들킬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빠를 줄이야.’
길장현이 그룹 내의 힘으로 길이현을 몰아내는 거야 괜찮다. 그룹도 지키고 길이현은 이곳에서 버틸 저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길장현은 외부의 힘을 잔뜩 끌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 중엔 마틴사와 우전 그룹이 있었고 미국의 ‘아인’이라는 유명한 그룹도 있었다. 특히, 아인은 보유 영웅도 많은 PMC를 지니고 있고 구울 월드 리그 우승 후보팀도 보유 중이었다.
그때였다.
길이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한쪽 면이 통째로 유리로 되어 있기에 쉽게 보았다.
하늘이 쩌억 갈라지며 무언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찐득함을 넘어 극도로 불쾌하고 찝찝한 감각이 길이현의 전신을 쓰다듬는 듯했다.
‘더러워.’
많은 공부를 하며 보고 들은 게 많은 길이현도 저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무지막지하게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아카데미 위라는 것이다.
길이현은 바로 연락을 취했다.
< 한성의 과거(1)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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