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친 존재감.(5권 완) >
안혜림은 몸속에 깃든 갤러해드의 힘에 정신이 몽롱했다. 이 전장에서 시작된 신화 [원탁의 기사]로부터 받은 힘도 터무니없이 강했다.
그런데 갤러해드라니.
최고의 기사, 완벽한 기사, 열세 번째 기사 등등. 모든 최고의 수식어를 지녔으며 성배를 찾은 자이기도 했다. 그는 원탁의 기사 전원과 싸워 이긴 전력이 있다고도 한다.
턱.
안혜림은 과도한 격이 몸에 깃들면서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강력한 격의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다 고요하게 퍼져 하나의 호수를 만들고.
더욱 넓어져 바다와 같이 변한다.
원래의 격이 [역사]에 겨우 닿아 있었다면 지금만큼은 [전설] 이상. 아니, [신화]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녀 곁으로 모여든 이안, 드몽, 이필모. 그리고 원탁의 기사로 선택되어 격이 한층 성장한 모든 이들도 느끼고 있었다.
번쩍.
안혜림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와 머리칼 색도 변해 있었다. 갤러해드는 여자로 보일 정도로 굉장한 미소년이었다고 한다. 안혜림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이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져 있었다.
원래 매력 수치가 32였는데, 지금은 60을 웃돌 정도.
매력이라는 것은 외면의 아름다움과 주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일정 수치 이상을 넘어간다면 ‘매력’은 하나의 ‘카리스마’와 ‘위엄’ 따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쾅.
안혜림은 손에 든 검을 바닥에 꽂았다.
마력을 퍼뜨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 갤러해드의 후예.”
안혜림의 목소리인 듯 아닌 듯. 남성의 음성이 섞여 있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알 수 있었다. 그 음성은 안혜림에게 깃든 갤러해드의 목소리라는 것을.
두두두두두.
저 멀리서 이곳을 향하는 괴수들이 보인다.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 그중에는 ‘천사’나 ‘악마’로 보이는 신격 또한 보였으며 갖가지 신화에서 등장한 요괴 같은 것들도 섞여 있었다.
“이곳에 모인 원탁의 기사들이여.”
그녀의 말에서 묵직한 기세가 뿜어진다. 그 기세는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으며 잔잔하게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칼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쿵.
다시 한 번 바닥이 울린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괴수들이 달려드는 쪽으로. 죽음의 땅, 아마존의 전장으로.
“우리를 노리는 적을 멸(滅)할 것이며.”
그녀의 뒷모습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전신 갑주를 입고, 흰색에 십자가가 그려진 방패를 든 기사.
그 그림자가 [이상한 띠의 검]을 쥐고.
안혜림은 본인의 검을 들어 올린다.
어느새 그림자와 안혜림의 모습이 겹쳐진다.
“성배를 손에 넣을 것이다.”
- 신화 [원탁의 기사]가 전장에 재현됩니다.
- 무대가 완성되었습니다.
- 원탁의 기사가 지닌 신화의 힘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저벅. 저벅.
안혜림이 기사들을 헤치고 그들 앞에 섰다.
괴수를 앞에 두고, 기사들을 뒤에 뒀다.
그리곤 검을 내려그었다.
후웅.
옅게 바람이 일었으며.
그 옅은 바람은 길게 뻗어 나갔다.
작은 물결인 줄만 알았던 그 파동은 점점 커졌다.
파도가 되었고, 해일이 되었다.
콰과과과과!
수천의 괴수가 쓸려나갔으며.
수백의 신격이 튕겨 나갔다.
와아아아아!
그게 시작이었다.
안혜림의 뒤에 도열해 있었던 원탁의 기사가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안, 드몽, 이필모 등 신의 좌에 앉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안혜림을 따랐다.
- 와, 이게 신화의 재현이구나.
- 내가 살면서 이런 대규모 신화의 재현을 보게 될 줄 몰랐음.
- 진짜 부럽다. 저 전장에만 있어도 신화 등급의 업적을 받을 수 있는 건데.
- 미쳤네ㄷㄷ 완전 영화잖아.
- 야! 이한성이 사라졌는데 그런 말들이 나오냐!
- 이이이잉ㅠㅠ 내 이한성.
- 어디갔어. 진짜 죽은 거 아니지?
댓글의 반은 아직도 한성을 찾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웅장한 광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두 진영이 부딪쳤다.
인간의 신화 등급의 업적이 보조하고 있었지만, 적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툭 하면 발에 치이는 게 [신화]에 닿은 신격이다.
안혜림을 중심으로 이안, 드몽, 이필모가 버텼고. 그것을 또 중심으로 150인. 아니, 아서 왕을 제외한 149명의 원탁의 기사가 방어진을 형성했다.
그들은 방진을 형성했고.
기사 하나하나의 검이 연결되어 거대한 결계를 형성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영웅 혹은 용병이 한 명씩 죽어 나간다.
적도 죽고 아군도 죽는.
전쟁은 이렇다.
그리고 당당한 등장과는 다르게, 인간은 밀리고 있었다. 아무리 신화의 업적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진짜 신격이 모인 적을 쉽게 이겨 낼 순 없다.
진훈은 피를 토했다.
강한 격의 격돌이었으니, 아직 완전한 격이 없는 진훈이 버틸 수 없는 종류의 전장이었다. 그나마 원탁의 기사로 임명되었기에 한 사람 몫은 해내고 있었다.
옆으론 한별과 세르게이가 있다.
이들 모두 기사로 임명받았다.
무엇이 기준인지는 모르겠다. 전장에 빨리 뛰어들어서? 아니다. 그런 사람은 이곳에 150인 말고도 많았다. 아니면, 계약한 신격과 무언가 있나?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받은 힘이다.
이곳을 지키고 저 전쟁을 종결하란다.
그래서 이 신화가 끝을 맺는다고.
진훈은 싸웠다.
옆에 선 친구를 지키고, 전쟁을 종결시키며,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그래서 웃음이 씩 나왔다. 이런 격렬한 전장은 쉽게 찾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옆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한별이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에선 화룡족이, 왼쪽에선 엘프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웃고 있던 진훈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저게 전장에 합류하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 * *
한성은 무언가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 뱀룡족이 지저세계를 뛰쳐나왔던 것은 신격의 전격적인 등장으로 지저세계가 혼란한 틈을 타 요르문간드의 주술사 중 하나가 뱀룡족 여왕의 알을 훔쳤기 때문이다.
설정상, 뱀룡족은 그 알을 추적할 수 있고 요르문간드의 주술사는 그것을 차단할 수 있는 생명체 중 하나인 [킹 베어]의 주머니에 그것을 숨겨 놓는다.
“나중엔 다른 곳으로 옮기고 옮겨가지만······.”
이 시기에는 킹 베어에게 있을 거다······ 라고 생각했다.
“왜 쟤들이 여기 있냐.”
한성의 스캔에 잡힌 건 성시연과 세르비체였다. 킹 베어가 뭐가 그리 좋은 지 다섯 마리째 잡아 뒀는데, DNA 샘플을 채취하고 ‘아공간 주머니’를 분리해 모아두고 있었다.
“······뱀룡족 여왕의 알도 가지고 있네.”
수고를 덜었다.
이 영혼 상태로 킹 베어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했는데, 성시연이 이렇게 먼저 움직여 주다니. 문제는 어떻게 말을 거느냐.
한성은 [마력 지배]의 특성을 살려 마력을 움직여 보았다.
“끄응.”
전혀 반응이 없다.
하긴, 이 정도로 반응이 있을 정도였으면 세 왕이 한성을 못 찾았을 리가 없겠지.
이번엔 공간 관련 이능.
역시, 이것도 반응은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고······.
“약력?”
이거는 가능성이 있다. 이론일 뿐이지만, 초끈 이론이라는 게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4대 힘인 약력, 강력, 중력, 전자기력. 그리고 이 세계관에서는 5대째인 마력까지 모든 힘이 진동하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
“무슨 인터스텔라 찍는 것도 아니고.”
그 있지 않은가, 양자 영역으로 넘어가 과거의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거의 그 급이다.
마음 같아선 여기서 부활하고 싶다.
그러면 이후의 일은 쉬우니까.
하지만 [부활]은 [구원]과 함께 할 때. 그리고 수억의 시청자가 극적인 연출에 감동할 때 완벽한 효과를 발휘한다. 아마 잘만 하면 [신화]에서는 상위에 드는 엄청난 업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여튼.
한성은 인지도 포인트를 확인했다.
- 인지도 포인트 : 35,000
전에 10만 정도를 한 번에 썼더니, 아직 모인 게 부족하다. 그렇다면 강력, 중력, 전자기력은 포기해야 한다. 이 중에 하나라도 더 얻는다면 그 ‘끈’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마력 지배도 5대 힘의 최상위 힘 중 하나.”
그리고 [약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시간과 공간으로 [중력]을 흉내 낼 수 있다.
거기에 역행 마법이라면?
“하······ 한 번 해보자.”
한성은 그 상태에서 한 시간, 두 시간을 집중했다. 시간과 공간으로 중력을 자극했으며 그 중력에 약력을 더하고 마력을 더하려 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힘들은 하나의 ‘진동하는 끈’일 뿐이다.
결국 그 최소 단위라는 끈.
‘그래, 뭔가 만져지는 것 같아.’
간질간질. 반응이 없던 허공에 무언가 움직인다.
중력? 약력? 마력?
그 셋 전부 아니다.
그보다 깊은 무언가.
“아!”
잠깐.
시스템 카메라.
“······될까.”
쓴 지 오래됐다.
현실의 튜브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업로드를 안 했다. 촬영도 거의 안 썼고 말이다.
한성은 시스템 카메라를 꺼내 얼굴을 촬영했다.
그러자 반투명한 모습의 한성이 그곳에 있었다.
“얼마 만에 찍는 영상 편지냐.”
한성은 괜히 인터스텔라만 찍었다. 괜히 무슨 짓이었는지, 시간만 버렸다.
한성은 시스템 카메라로 영상을 찍어 본인의 스마트 워치로 보내 헤일렌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 영상에 메시지를 담아 성시연을 통한다.
플레이어의 특권이다.
아니, 방송용 시스템을 위해 돈을 쓴 호구의 특권인가.
뭐, 그거나 그거나.
* * *
안혜림은 좌우로 이안, 드몽, 이필모가 전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로는 친구들. 그 밖으로 원탁의 기사들.
속에서 무언가 끓어 오른다.
강한 힘에 취해서?
아니다.
동료가 죽고 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원탁의 기사들이었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죽을 때마다 속이 끓어 오른다.
분노에 얼굴이 붉어지고.
슬픔에 눈물이 고인다.
어둠을 타고 안혜림을 덮치려던 암살 괴수를 막기 위해 원탁의 기사 한 명이 몸을 던졌다. 신격인 ‘악마’ 하나가 안혜림을 덮칠 때 이필모가 [천사의 동화]를 사용해 맞서다가 팔 하나를 잃었다.
이안과 드몽은 서로 등을 맞대고 수십 개체의 신격을 막아내고 있다. 그들에게 ‘찰나’의 여유를 주기 위해서 수십의 영웅이 죽어 나갔고 그들의 ‘중상’을 하나 막기 위해 수백의 용병이 죽어 나갔다.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 화룡족과 엘프까지 달려든다.
쿵.
안혜림은 갤러해드의 힘을 최고조로 동화시켰다.
그녀가 검으로 바닥을 때렸다. 그 파동은 전장으로 퍼졌고, 그들의 사기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우리는 ! 』
안혜림이 크게 외쳤다.
그것은 여자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신화를 이룩한. 최고의 기사였던 갤러해드의 음성이었고 그것은 전장을 한 번에 휘감았다.
『 아서 왕의 기사 ! 』
고고한 ‘격’의 향연.
사방으로 퍼져나간 그녀의 기세가 바닥에서부터 차오른다. 무릎, 허리, 가슴, 머리를 지나 하늘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 』
화악!
전장에 축복이 내린다.
“그리고.”
이안이 입을 열었고.
“죽지 않는다.”
드몽이 받았다.
“으아아아아!”
진훈이 폭주해 장대한 금빛 무리가 주변을 휩쓴다. 한별의 몸 위로 어둑시니의 형상이 덧씌워지고 얜 샤를에게 오딘이 깃든다.
세르게이의 검에서 20m가 넘어가는 검강이 솟아올랐고 나디아의 창에서 수백의 마력의 날이 쏟아진다. 최이명은 피에 흐르는 ‘악의 신격’의 힘이 끓어 오르고 이창석은 주변의 모든 마력을 절삭한다.
제임스 딘은 대단위 마법으로 하늘을 뒤덮고.
안혜림은 전장 전체를 베어낸다.
그런데.
화룡족과 엘프들은 인간을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진영에 서서 안혜림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원탁의 기사 위로 한 층의 방어선이 형성되었다.
그녀의 앞에 압도적인 신격 둘이 등장했다.
“고작 이런 17살 소녀에게 갤러해드가 깃들다니.”
검고 붉은 금속으로 세공된 듯한 몸을 지닌 화룡족의 로드인 에프엘.
“이미 일어난 전쟁, 끝을 보는 수밖에.”
붉은 귀 엘프의 족장인 갈라윈이었다.
그리고.
하늘 위로 수천 개의 얼음이 창이 한기를 뿌리며 적진으로 쏘아진다. 그것은 허공에 얼음의 꼬리를 남겠다. 절대 온도에서 오는 극한의 한기 때문이었다.
“이왕에 끝내는 거,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게 낫겠지.”
빙조의 여왕, 모든 빙조의 어머니.
이아인이 마지막으로 인간의 편에 섰다.
약세였던 인간의 진영은 순식간에 전력이 상승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시간을 끄는 게 고작일 거다. 지저세계의 지배종과 신격은 지상의 존재보다 훨씬 강하고 많으니까.
그때, 저 하늘 위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왜인지 모르겠다.
안혜림은 저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것은 주변에 모여 있던 에프엘, 갈라윈, 이아인, 이안, 드몽 등 모든 존재가 그랬다.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강제적인 힘이 있었다.
- 뭐야, 저거.
- 왜 카메라가 다 저기로만 향하지?
- 지금 전쟁 멈춘 거 실화?
- 저건 뭐길래 사람들이 저것만 쳐다봐?
- 관종의 신이라도 온 건가. 무슨 일이야?
마치 음소거를 누른 듯한 전장.
하늘에선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모두의 시선은 그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단순히 튀어서가 아니었다. 무언가 강제적으로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게 인간이든 신격이든 괴수든.
어떠한 권능이 가미된 듯했다.
그때, 카메라 한 대가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화면은 순식간에 변했고, 그곳에선 무언가 꿈틀거리며 무언가 생겨났다.
툭.
카메라가 멈추고 누군가의 얼굴이 비쳤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한성의 얼굴이었다.
“정점의 귀환.”
옆으로 서서 미간에 손을 얹었다가 살포시 카메라를 가리킨다. 거기에 윙크는 서비스.
미친 존재감의 귀환이었다.
< 미친 존재감.(5권 완)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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