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행운은 만렙이다-103화 (103/200)

< 무대는 완성되었다. >

한성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격으로도 보호할 수 없는 에프엘의 화염이 한성의 살가죽부터 뼈에 장기까지 순식간에 기화(氣化)시켜버렸기 때문이다.

한성의 육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잠시 이곳에 붙어 있다.

[한 번의 온전한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 데크라에게 얻은 선물. 아깝긴 했다. 하지만 원래 이것보다 빨리 쓸 줄 알았으니, 아쉬움은 없었다.

‘조금만 더 있을까?’

한성은 ‘영혼’ 상태였다.

거의 완전한 죽음이었으니 에프엘, 갈라윈, 이아인도 한성의 영혼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시스템의 일부였으니 신격이라도 감지할 수 없는 거다.

지금 한성은 [선택의 시간] 속에 있는 거다.

‘이것 또한 기회.’

“으아아아아!”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하얀이네.’

한성의 죽음을 보고 분노하여 달려든 것이다.

한성은 짧은 순간 계산을 마쳤다. 과연 하얀이가 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에프엘은 용혈이었기에 하얀이를 좋게 볼 수 있다.

갈라윈도 일단은 한성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한성이 죽을 때 말리지 않은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얀이를 건들지 않겠지.

문제는 이아인.

한성에게는 호감을 보였지만, 자신을 공격한다면 절대로 봐주지 않는 게 빙조의 여왕이다.

“아빠아아아!”

하얀이가 폭주했다.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지는 거대한 마력의 폭풍은 위에 세 족장이 신격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듯이 몰아쳤다.

콰과과과!

용혈. 그것도 순수한 드래곤과 드래고니안의 혼혈은 달랐다. 하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신화’를 시작했으며 한성과 함께하면서 여러 업적을 획득했다.

지금도 [전설]에 닿는 격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신격 셋.

당연히 상대가 안 된다.

그들 중 이아인이 손을 휘젓자 하얀이의 마력을 흩어졌다. 하얀이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게이트 오브 바빌론]이라는 것을 열어 수천 개의 무기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그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아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다시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하얀 막이 생성되며 하얀이의 마력 무기는 모조리 한 줌의 마력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격의 차이였다.

“귀찮게 하는군.”

“저 아이는 죽이지 마라.”

이아인의 ‘살기’에 에프엘이 입을 열었다.

갈라윈도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는 살려주게.”

“······참, 지배종들의 왕이라는 것들이······.”

이아인은 귀찮다는 듯 뒤로 돌았다.

하지만 하얀이는 계속 달려들었으며, 다른 인간들도 하나씩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얀이라는 용혈보다 격이 훨씬 낮은 녀석들이다.

아무리 이 전장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지배종들의 왕이었으며 ‘신격’에서도 상위에 오른 이들이다.

상대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들은 이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격이 해체되어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격차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반짝거리고 단단한 눈을 한 인간, 차갑게 굳어 찢어진 눈을 한 인간. 남자, 여자, 마법사, 기사 등등 많은 인간이 이 하나의 인간의 죽음에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한다.

갈라윈은 ‘정말 그 인간의 말이 맞았던 걸까?’라고 생각했고 이아인은 ‘이놈들을 죽일까?’라고 생각했으며 에프엘은 ‘흐음, 귀찮은데?’라고 생각했다.

모두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 셋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존재만으로 저들과의 경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인간 한 명이 격의 경계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그곳에서 마법으로 보이는 폭발이 동시 다발적으로 생겨났으며 그로 인해 벌어진 경계의 틈으로 네 개의 손이 삐져나왔다.

이아인은 그 모습에 몸을 다시 돌렸다.

신기했다.

인간은 간혹 기적 같은 모습을 보이곤 한다. 특히,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아니면 스스로 죽음의 위기에 몰렸을 때.

방금 이곳에 있던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단 말인가?

틈을 잡고 있던 네 개의 손은 두 남자였는데, 육체 능력에 관한 재능은 갈라윈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아무리 재능이 높다고 해도 이곳에 들어올 순 없었다.

하지만 그때, 용혈의 용언 마법이 터지며 격의 경계를 잔뜩 벌려 버렸다. 그러면서 인간들이 그 틈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오호, 대단한데?”

그것은 에프엘의 말이었다.

이아인은 그런데도 귀찮다는 듯 거대한 얼음의 창을 만들었다. 그녀의 특성인 [절대 온도]가 담긴 창이었다. 그 어떤 물질이든 얼리는 것은 물론이고 ‘마력’이나 ‘격’까지 얼려버리는 무시무시한 공격.

단순한 창 하나였지만, 하얀이는 물론 경계의 틈에 모인 모든 인간을 순식간에 말살할 정도의 위력을 지닌 공격이었다.

훙.

속도 또한 대단했다.

그들 중 반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

얼음의 창은 그대로 틈에 꽂혔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이아인이 예상한 것과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멸되었어야 했던 인간들은 멀쩡했고 이아인의 얼음의 창이 깨진 것이다.

“······뭐지?”

얼음 조각들이 허공에 흩날리며 무지개를 만들었다. 곧 그 파편들이 모두 떨어졌을 때, 이아인은 물론이고 에프엘과 갈라윈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 명의 작은 소녀.

분명 활을 들고 있었고 검으로 바뀐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지닌 능력치와 재능마저 무기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방패를 들고 있었다.

큼지막한 흰색 방패. 그곳엔 붉은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그 모습에 갈라윈이 중얼거렸다.

“성배의 구도자······.”

동시에 모두의 눈동자에 문구가 떠올랐다.

- 열세 번째 기사, [갤러해드의 후예]가 선택되었습니다.

- 원탁의 기사 중 가장 고결한 기사이자, 완벽한 기사. 성배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갤러해드의 후예가 등장했습니다.

- 신화 [원탁의 기사]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기’을 넘어 ‘승’으로 진행됩니다.

- 히든 에피소드 [갤러해드의 검]이 시작됩니다.

그 문구가 떠오른 직후였다.

붉고, 파랗고, 검었던 하늘이 밝게 빛났다. 하얀빛은 마치 태양의 강림을 보는 듯했다. 그 빛은 하나로 모여 전장 중앙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대한 빛기둥.

그 중앙에 수십 미터에 이르는 검이 바위에 꽂힌 채 생겨났다. 그 검엔 [오로지 최고의 기사만이 나를 가질 것이다.]라는 글귀와 [갤러해드]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히든 에피소드, [갤러해드의 검]이 시작됩니다.

- 지금부터 이 검을 뽑는 이에게 [갤러해드의 진정한 후례]라는 [전설] 등급 업적과 [성배의 구도자]라는 [준신화]급 업적이 주어집니다.

- 에피소드 성공 시,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지저세계를 중심으로 둔중한 진동이 아마존 전체에 울리기 시작했다. 지저세계의 모든 종족이 이 검을 얻기 위해 올라올 거다.

콰과과과과!

드높은 격을 지닌 존재들. 종족의 한계를 돌파해 지배종에 오른 개체들. 하나하나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던 존재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검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되다니······.”

갈라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갈라윈이 이한성이라는 인간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아마존 전체를 아우르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그 전쟁을 빠르게 끝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기회가 필요하다. 지상의 세 지배종의 왕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분명 거기까지가 그의 계획이었다.

갈라윈은 그의 눈에서 진실을 봤기에 그를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이 [성배 전쟁]을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배 전쟁은 더 큰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화룡족의 에프엘, 빙조의 여왕 이아인, 엘프족의 족장 갈라윈. 이 셋이 지저세계에 들어가지 않고 지상을 세 등분하여 균형을 맞춘 것은 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모든 전쟁은 지저세계 안에서만 벌어지도록.

지저세계에 진입하는 신격과 지배종은 ‘빛’을 찾는 것만이 최종 목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선 끊임없는 전쟁이 생겨나고, 지저세계는 죽음의 땅 그 자체다.

그 전쟁이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보라.

“성배 전쟁이 시작되었다.”

에프엘이 외쳤다. 화룡족에게 알리는 말이었고 화산의 모든 화룡족이 고개를 빼 들고 길게 울었다.

구오오오오.

그 모습에 갈라윈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분명 진실을 봤다. 그는 이 전쟁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내고 싶어 했다.

“······그 인간은 이렇게 될 걸 모르고 시작했을까?”

“진실의 눈을 너무 믿지 말라고 했잖아.”

갈라윈의 말에 이아인이 쏘아붙였다.

“인간의 무지와 욕심은 항상 재앙을 불러왔어. 그래서 우리가 이 지상을 지키기 시작한 게 아닌가.”

그게 맞았다.

아무리 진실인들, 무지에서 오는 진실은 더 큰 위험을 불러올 뿐이다.

구오오오오!

지저세계에서 무수한 존재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1층부터 8층의 신격들까지.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신격들까지.

갤러해드의 검을 뽑기 위해서.

그 검을 뽑아 ‘빛’이라는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서.

“아마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존재가 죽어 나가겠지.”

이아인은 차갑게 말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제는 아마존 전체의 존속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 전쟁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의 종족이 보존될 수 있다.

*  *  *

한성은 죽은 상태. 선택의 시간 속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이아인의 공격이 친구들에게 떨어질 때는 [온전한 한 번의 기회]를 사용할 뻔했다.

때마침 안혜림이 갤러해드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모두 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 이거 뭐야.

- 한성 어떻게 된거임? 진짜 죽었어?

- 설마, 한성이 절대 죽을 사람이 아님.

- 어떻게든 살아날 듯.

처음 한성이 불타올랐을 때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마법을 써서 탈출했겠지. 공간 이동 이능 아니야? 연기일 거야. 설정일 거야 등등.

의심뿐이었다.

하지만 하얀이가 분노해 신격을 공격하고 뒤이어 친구들이 신격에게 향했을 때. 시청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강한 친구들이 약간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 버린 것이다. 용혈인 하얀이는 진심으로 울었고 모든 힘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그런데도 세 신격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 정도가 되자 한성이 진짜 죽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시청자의 채팅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존에서 [갤러해드의 검]이 발동되고 지저세계에서 수많은 괴수가 꾸역꾸역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설정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 이한성.

- 이한성.

- 이한성.

- 이한성.

댓글에서 한성을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고 대답 좀 해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이 방송에서 댓글을 읽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앙에 세워진 갤러해드의 검을 향해 수많은 괴수가 달려들었다. 누군가 호기롭게 손잡이를 쥐었다.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자가 손잡이를 쥐면 저주에 걸린다.

전신이 강철로 이루어진 [철인(鐵人)]은 반쪽이 검게 타 재로 사라졌고 남은 반쪽만 겨우 살아남아 튕겨 나갔다. 하체가 뱀인 [요르문간드]의 전사는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가 상체가 사라져 죽었으며 [거인족]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오로지 최고의 기사만이 나를 가질 것이다.]

검에 새겨진 문구는, 굳이 갤러해드의 후예가 아니라도 검을 쥘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수십, 수백 마리의 괴수가 죽을 때까지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괴수들은 끊임없이 달려든다.

그러면서 검을 중심으로 거대한 진형을 형성했다. 갤러해드의 힘을 이어받은 인간은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리곤 갤러해드의 후예로 지목당한 인간을 사로잡기 위해 공격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싸운다.

검을 중심으로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싸우고, 인간을 막으면서도 서로 싸우고, 갤러해드의 후예를 사로잡기 위해 싸운다.

그야말로 혼돈.

서로 죽이고 죽여 검의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아직 성배 전쟁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한성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종족이 강철의 도시라 부르는 곳을 중심으로 인간들이 방어선을 형성하고 진훈과 친구들은 안혜림을 보호한다.

신격에 오른 이안과 드몽. 그리고 이필모까지 안혜림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도시를 단단하게 방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전력은 아마존에서 가장 약하다.

변수는 화룡족, 붉은 귀 엘프, 빙조.

이 세 종족의 포지션이었다.

안혜림을 죽여 갤러해드의 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있고. 안혜림을 도와 검을 뽑게 해 이 전쟁을 지저세계로 끌고 가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안혜림을 데리고 적진 중앙에 들어가 검의 손잡이를 잡게 하는 건 세 종족이 힘을 합해도 힘들다.

‘한 번에 전세를 역전한다.’

지금 한성은 [원탁의 기사]라는 신화를 재현하는 도중이고 [갤러해드의 검]을 통해 [성배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원래 마지막 신화 업적은 ‘성향’에 신경 써야 하지만, 이 모든 신화가 끝날 때까지는 뭘 얻어도 크게 상관없다.

오히려, 이 신화가 끝나기 전까지 최다한 많은 업적을 쌓는다면 중격(中隔)은 힘들더라도 하격에서 상위에 안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냐고?

지금 당장 신화 등급 업적을 하나 받을 거니까.

콰과과과과!

괴수들이 몰려온다.

안혜림이 목표였다. 황소 떼 앞의 작은 오리들처럼 닿기만 하면 무너질 듯 연약해 보였다. 엘프들은 인간 진영에 섰고, 빙조는 방관했으며 화룡족은 뒤늦게 괴수들의 돌진을 막으려 움직였다.

자, 이제 무대는 완성되었다.

[부활]과 [구원]이라는 키워드를 지닌 신화 하나를 써 봅시다.

< 무대는 완성되었다.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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