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행운은 만렙이다-98화 (98/200)

< 요괴왕. >

쿨럭.

세르게이의 입에선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씹히는 게 있는 것으로 봐선 내장이 심각하게 상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렇게 가슴이 뚫렸는데 바로 죽지 않은 게 어디인가.

“이 새끼가아아!”

나디아가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퍼억.

그녀의 창이 두억시니의 허리를 두드렸지만, 두억시니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휘적 저을 뿐이었다. 그것에 마력의 폭풍이 생겨났고, 나디아는 그대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세르게이는 죽지 않았다.

두억시니는 그런 세르게이를 완전히 끝내려는 모양인지 손을 뽑아 다시 들었다. 그곳엔 마력이 급속히 빨려들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웅.

두억시니의 몸에서 짙은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검고 붉은 미증유의 기운은 대지를 떨게 했다. 바닥에서 흙먼지가 피어나고 대기는 요동친다.

한 번에 끝낼 의향인지 두억시니는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힘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그 기세만으로 나디아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 건가.’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눈으로 좇지 못할 두억시니의 아지랑이가 핀 손이 한없이 느리게 움직였다. 세르게이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인 것 같은데 아직 허공이었다.

‘이게 회광반조(回光返照)인가?’

진즉에 이런 현상을 겪었다면 이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였다.

“뭐해, 안 일어서고.”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르게이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가 앞의 두억시니를 다시 봤다. 뒤엔 예상했던 한성이 맞다. 그런데 이제 다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두억시니는 그대로 느리게 움직인다.

“이, 이게.”

“일단 일리로 와.”

한성은 엘릭서 하나를 던져줬다.

인지도 포인트를 소모하면서 받은 최상급 엘릭서다. 소비가 컸지만, 세르게이의 상태를 보니 엘릭서 하나를 이미 사용한 후였기에 이 정도가 아니면 살아날 수가 없다.

“시간 감옥이라는 거다.”

한성의 공간 조종과 시간 관여로 만들어낸 시공의 왜곡. 두억시니는 그 속에 갇혀 한없이 느린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보통은 움직이는 모습이 전혀 없어야 하는데, 어찌나 빠르면 천천히라도 움직이고 있다.

이 정도면 수천 배 뻥튀기된 중력 안에서도 멀쩡할 듯했다.

한성은 ‘밤부’를 꺼냈다.

도깨비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중립.

그렇다면 성검보다는 ‘설화’의 힘이 담긴 [밤부]가 훨씬 효과적이다.

지이이잉.

한성은 광선검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검으로는 처음이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키이잉.

공간을 가르는 소리.

이거면 시간 감옥에 갇힌 상태로 두 동강 낼 수 있을 거다. 한성은 밤부를 그대로 휘둘러 두억시니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단번에 갈랐다.

댓글을 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반갈죽.’

반으로 갈라져 죽다.

꼭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이게 반갈죽이다, 이 자식아.”

원래는 이렇게 갈라져도 죽지 않았어야 할 도깨비의 일종인 두억시니였지만, 밤부 자체가 지닌 힘과 시공을 자르는 광선검 때문인지 작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괜찮아?”

한성은 뒤에 주저앉아 회복 중인 세르게이와 멀리서 엉망이 된 상태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나디아에게 물었다.

그리고 둘은 어처구니없게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성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이다. 어떻게 보면 날씨가 정말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성은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안다.

“왜 그래?”

세르게이가 묻는다. 최상급 엘릭서는 역시 효과가 좋다. 뚫렸던 가슴은 이미 다 아문 상태였다. 한성은 그 모습을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구름이 한 점도 없지?”

“응, 날씨 좋네.”

“너무 인위적으로 없지 않아?”

“······뭔가 징그러울 정도이긴 한데.”

“나디아, 세르게이. 내 뒤로 물러나.”

한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파지지직.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현세에 도래해서는 안 될 신격이 이곳에 강림하려면 격을 소모해야 한다.

이 소리는 격이 타오르는 소리였다.

한성의 앞에 나타난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도깨비였다.

본래 설화(屑話)에 의하면 도깨비는 낮에 생활할 수 없으며, 누군가를 괴롭히고 장난치기 위해 인간 앞에 설 수 있다. 아무리 격이 높은 신격이라도 기본적인 정체성에 제약을 받는다.

해룡이 한반도를 위해서라면 격의 소모 없이 등장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네가 나의 아이를 죽인 인간이구나. ]

한성은 밤부를 꺼내 들고 광선검을 뽑아냈다. 동시에 생방송을 켰고 격을 끌어 올렸다.

“난 이럴 때마다 참 궁금해.”

순식간에 시청자는 수백만을 돌파했고 한성의 격은 온전한 전설에 닿았다. 신화 속에 잠들었던 밤부의 힘이 한성을 보조했고 대기를 가르며 존재하는 광선검이 키잉 울었다.

“왜 지들이 먼저 죽이려고 했던 건 기억 못 하는 거지?”

악역은 항상 그렇다.

자기들이 먼저 와서 분탕질 치고.

정당방위로 쳐 죽이면.

왜 그렇게 부들부들 대는 건지.

도깨비의 왕은 방망이를 휘둘렀다. 밤부에 맞먹는 신화를 지닌 [전설] 등급의 무기였다. 그것은 한성의 격을 밀어내며 다가왔다.

그 한 번의 휘두름으로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일대의 대기가 밀려 타오르며 건물이 무너지고 하늘이 검게 물든다. 깊은 아지랑이를 뿜어대며 한성에게 다가온 방망이.

한성은 밤부를 쥐어 그 방망이에 댔다.

그저 경로를 막은 것뿐이었다.

캉. 콰과과과과!

그 충돌의 여파로 주변은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건물, 자동차, 아스팔트. 그저 드넓은 흙바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파지지직.

도깨비의 신격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 위세는 대단하여 일말의 약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깨비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도술도 쓰지 않았으며 영력이라는 것도 쓰지 않았다.

그저 방망이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 한성을 공격할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한성은 그 방망이를 막으며 말했다.

콰아아아아! 콰광!

“아직 신격이 아니라고 해도.”

[신격]에도 ‘격’이 있다. 하격, 중격, 상격. 그것을 위인, 왕, 영웅, 전설, 신화 등등 또 많은 분류로 나누기도 한다. 뭐, 그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다.

출신이나 세운 업적들로 분류되는 것들이니까.

도깨비의 신격은 [하격]

그것도 [요괴]라는 반쯤은 몬스터인 것들이다.

신격이라고 다들 무식하게 강한 건 아니라는 거다.

“겨우 요괴 따위가?”

한성은 검을 크게 휘둘렀다.

도깨비가 방망이로 일격을 막으며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한성은 튕겨 나가는 도깨비를 따라잡아 다시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방망이를 다시 들어 막는다.

“요괴라면.”

콰아앙! 콰과과과!

도깨비는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부쉈다. 수백 미터는 날아갔지만, 그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팟.

한성은 공간 조종을 사용해 도깨비의 뒤로 이동했다.

“요괴왕 정도는 돼야지.”

콰아앙!

이번엔 야구를 하듯 검 옆면으로 뒤통수를 때렸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한다.

콰과과과과!

한성은 그 자리에 섰다.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

“내가 직접 죽이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이 업적을 얻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며, 한성은 얻어야 할 신화에 다다른 업적은 이게 아니다. 괜히 잘못 얻었다가 이상한 진영에 설 수도 있으니까.

한성은 저만치에 쓰러진 도깨비를 바라봤다.

그때, 하늘에 생기는 검고 투명한 기운이 공간을 찢었다.

“왔군.”

때마침 도착했다.

요괴왕 어둑시니와 계약한 한별이.

이 업적은 한별의 것이다.

*  *  *

- 이야, 연출 미쳤다ㄷㄷ

- 이거 뭔 일이냐. 키자마자 한성 대사 실화냐.

- 크으, 사이다. 악역들 억지부리는 거 보면 억장 터졌음.

- ㅋㅋㅋㅋㅋㅋㅋ악역이래, 진짜 이 정도면 설정 아니냐?

- 저거 요즘 계속 나오는 도깨비 원조 신격임?

- 뭐임, 신격이라는 게 왜 이렇게 약해 보이지?

- 한성이 개 쎈거임ㅋㅋㅋㅋㅋ 미쳐버렸다.

이후, 한별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구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았다.

멀리서 지켜보는 한성의 뒷모습. 그리고 하늘을 찢고 등장하는 한별. 밑에서 쓰러져 있던 도깨비가 뒷걸음질 치는 모습까지.

한성은 마치 설정처럼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 뭐야, 이 구도. 진짜 설정 같은데?

- 개간지다ㄷㄷ

- 한별 뭐냐. 검은 아지랑이에 저거 왕관처럼 생겼는데?

- 머리에 뿔 아니냐? 근데 왕관 닮긴 했다.

- 거기에 투영된 그림자 뭐냐, 겁나 간지나게 생겼다.

한별의 모습은 특이했다.

검고 투명한 기운으로 그려진 하나의 ‘악마’와 같은 형상 중앙에 한별이 선 모습이었다. 마치, 신격이라는 것과 합체를 한 듯한 모양.

저것은 요괴왕 어둑시니의 힘이다.

신력(神力)이라고도 하는 신격의 힘을 인간의 육체로 불러와 사용하는 것이다. 보통 계약을 했다고 해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신격과의 동조율이 굉장히 높아야 하는 것은 첫 번째.

그 신력을 육체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격’의 허락이다.

“역시 한별, 요괴왕 어둑시니와의 궁합은 최고야.”

한성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카메라에 아주 잘 들리도록. 그리고 어색하지 않는 대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연기력 봐. 설정인 거 티나는데 자연스럽긴 하다.

- ㅋㅋㅋㅋㅋㅋ후, 진짜 다른 후보생들은 연기 못하는데, 한성은 잘하는 듯. 역시 타고난 관종.

- 어둑시니? 그게 뭐지?

- 요괴왕이래, 요괴에도 왕이 있나?

사람들은 한성의 자연스러운 해설에 궁금증을 풀어냈고. 그 궁금증은 수백만의 사람 중 몇 사람이 알아도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 와, 지렸다. 한별 지금 요괴왕이랑 계약한거임?

- 단순한 계약 정도가 아님, 이 정도 동조율이면 최소 역사의 격에 오른 거임.

- 한성하고 비교는 안 되지만, 겁나 쩌네.

- 저거 도깨비 신격은 왜 이렇게 약한 것 같냐.

- 아까는 한성한테 털리더니, 이제는 한별한테 털리네.

- 한성은 넘사벽이고.

- 어둑시니는 두억시니와 같은 종이고 도깨비들의 왕임.

- 뭐, 신화는 많지만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봄.

역시 전문가들은 많았다.

한성이 주절주절 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알아간다. 이래야 영상이 더욱 현실감 넘치는 거다.

파삭.

한별에게 휘두른 도깨비의 방망이가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 도깨비는 신격이고 한별은 그저 약간의 격을 지닌 후보생이다.

한별의 곁엔 어둑시니가 있다.

모든 도깨비의 왕. 두억시니와의 형제. 그리고 모든 요괴의 왕까지. 원래부터 도깨비 신격은 어둑시니에게 도전할 수 없어야 정상이다.

그게 이미 완성된 이야기이며 지나간 역사니까.

하지만 한별이 격이 낮았기에 저항 정도는 했다.

당연하게도 그게 전부였다.

한별은 도깨비 신격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어둑시니의 힘을 사용한다면 도깨비의 신격은 그대로 소멸해 버릴 것이다.

감히 어둑시니에게 대항한 죄로 인해.

한성은 드디어 타이밍이 왔음을 알았다.

“잠깐.”

- ㄷㄷㄷ 뭐야, 겁나 쫄리네.

- 무슨 일이지? 한성 왜 그래. 빨리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러게, 저게 다시 다른 사람들 공격하면 어떻게 해?

- 아놔, 도망치기 전에 죽여야지!

- 도깨비가 그렇게 나쁜 신격인 건가?

- ㅋㅋㅋ근데 신격 신격 하면서 살려야 한다 죽여야 한다 말하는 거 겁나 웃기네ㅋㅋㅋㅋ

- 미친ㅋㅋㅋㅋㅋ여긴 현실성이 없음.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이냐.

한성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한별은 한성을 보며 갸웃했다.

“왜?”

“소멸시켜선 안 돼.”

“그러니까, 왜.”

한별의 눈은 차가웠다. 그는 이곳에 오자마자 세르게이와 나디아의 상태를 봤고, 그게 모두 이 신격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련]에서 깨자마자 헤일렌에게 진행 상황을 대충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것이고 말이다.

사실 이유는 없다.

죽여야 한별의 업적이 완성된다.

그런데 아직은 아니다.

한성이 입을 열었다.

“아직 시청자가 부족······. 크흠, 아니. 그게 아니라.”

시간을 끌어야 한다.

아직 죽이면 안 돼.

이제 막 시청자가 쑥쑥 올라가고 구독자가 생기고 있는데, 벌써 일을 끝내면 안 된다. 원래 이런 순간에 ‘1분 후에 공개됩니다.’ 같은 연출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너도 네 한계에 대해 알겠지. 아직 부족한 격. 그리고 강림할 수 없는 신격.”

“······?”

“네가 부려. 네가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신격을 뭐하러 죽여. 데리고 있으면 되잖아.”

일단 시간을 끌기 위해서 막말하긴 했는데, 나름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긴 하다. 어차피 한성에게도 상대가 안 되는 약한 신격이기에 위험도 그리 크지 않다.

음, 생각해보니 훨씬 좋은데?

도깨비 신격을 죽이는 것보다 거둬들이는 게 더욱 ‘중립’에 가까워지는 업적 형성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우리의 적은 아직 많아. 내부에도 외부에도.”

한성은 그렇게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원래 이런 반전 스토리가 더 잘 먹히는 법이다.

- 흐잉ㅜㅜ맞는 말이에요.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낫겠다!

- 안 돼. 그런 위험을 누가 감수해, 그러다 뒤통수 맞으면!

- 도망치거나 그러면 어떡하지? 우리 위험해 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 아까 한성님에게 개발리는 거 못 봤냐? 따까리 있으면 좋지 뭘.

- 한별한테도 상대가 안 되는데, 근데 신격 맞아? 왜 이렇게 약해?

- 살려도 별 쓸모없는 거 아니냐.

- ㅋㅋㅋㅋ개이득, 꼬봉 득템임.

- 야, 도깨비는 일본의 ‘오니’에게 상성적 우위임. 겁나 쓸모 많을 듯.

- 게다가 중국의 손오공 분신들 상대할 때도 저만한 게 없음. 그것들 마법도 안 통하는 것들인데, 도깨비 도술은 개 잘 통함.

찬성과 반대가 난무하고.

그 속에서 적절한 개연성이 있다면, 그 드라마는 ‘떡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 요괴왕. > 끝

ⓒ [동주]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