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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운은 만렙이다-97화 (97/200)

< 두억시니. >

나디아는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하늘에서 등장한 신격의 기세.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다 아버지에게 밤부를 받아 하늘로 올라간 한성의 모습까지.

분명 친구. 아니, 같은 후보생이었다.

지금도 후보생이고.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말했다.

‘이미 신화의 태동을 시작했군.’

17살이라는 걸 아는 아버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업적을 세울 수 있었을까.

게다가 밤부 하나로 해룡이라는 신격을 진정시켰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단순히 해룡을 진정시킨 것이 아니라는 거다. 검은 땅에서 강림한 해룡은 한성의 곁에 있었고 그와 같이 싸웠다.

그리고 그는 대악마의 신격을 베었다.

나디아는 그 모습을 영상을 통해 아버지와 함께 봤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리고 땀에 축축하게 젖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는 이미 영웅이 되었고 자신은 한없이 아래에 있는데.

나디아를 창을 휘둘렀다.

훙.

작은 바람 소리와 함께 푸른 마력이 휘날린다. 수십 갈래의 마력은 한 결의 바람처럼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유려하게 적을 휘감았다.

투두두둑.

싸움에 미친 ‘전투 도깨비’들이 토막 나 사라졌다.

이놈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어느덧 그녀의 창술은 경지에 이르렀다. 마력이 스며들어 강기를 뽑아내고 신체의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수준.

[신창합일(身槍合一)]

이번에 찾아온 [시련]이라는 것 덕분에 죽을 뻔했지만, 한 단계 성장하며 특성 [마력 지체]와 창술의 합일이 이루어졌다.

마력지체라는 것은 단순히 마력을 쉽게 사용한다는 게 아니다. 마계의 투신인 발록처럼 육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물리적인 힘으로는 그녀를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도깨비는 영혼 자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괴이기도 하다.

나디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룡이 등장했던 서울의 하늘.

지금은 도깨비라는 신격의 기세가 한반도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격에게서 파생된 분신 도깨비들이 깽판을 치고 있다.

“세르게이. 뒤 좀 맡아줘.”

“알았어.”

세르게이도 무사히 [시련]을 끝낼 수 있었다.

그는 검을 곧게 들었다.

그의 특성과 이능은 온전히 ‘검’에 집중되어 있다.

[검의 눈], [검성의 재능], [검의 축복], [마력 조종] 등이다. 그렇기에 그의 검술 성장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빨랐고 순수한 검술로는 한성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정면으로 술법 도깨비라는 ‘도술’을 사용하는 도깨비들이 뛰어나왔다. 하얀색의 피부를 지닌 도깨비는 갖가지 술법을 사용한다.

공간을 뛰어넘고, 환상을 보여주고, 강한 물리력을 선사한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내려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그은 검은 세상을 반으로 가르듯, 허공에 가느다란 실선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하나의 실선인 줄 알았던 그것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도깨비 목을 떨어뜨렸다.

툭 투두두둑.

펑.

모든 도깨비는 작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조금은 본체에 상처를 입혔을까.”

세르게이가 시련에서 마주한 것은 또 다른 ‘세르게이’였다. 그와 검으로 싸우고 또 싸웠다.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자신과 끊임없이 검을 맞댔다.

서로의 목을 수십 번이나 떨어뜨렸다.

그런데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때 들리지 않던 [검제(劍帝)]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승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 멍청한 놈, 보는데 속이 터질 뻔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영혼을 베라니, 제가 도깨비도 아니고.”

- 그래서 못 했어? 금방 해 놓고 떠올리지 못한 게 멍청한 거지!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보통은 떠올리는 게 더 힘든 거 아닙니까?”

- 에라, 검성의 재능? 검의 축복? 다 가져다 버려! 그런 재능이 아깝다.

“그거 패드립인 거 아십니까? 다 유전입니다.”

- 아니, 미친놈이? 스승을 패드리퍼로 만들어?

“팩트지 않습니까 팩트.”

- 에라, 말을 말지. 빨리 저거나 잡아. 도깨비를 잡는 것만큼 좋은 훈련은 없으니까. 신격에 직접 타격이 가능할 때까지 베고 베는 거야.

세르게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검은 계속 움직였다.

한반도에 도깨비들이 나타나 분탕질 친다. 다들 ‘도깨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안다. 이것은 도깨비 신격의 분신이라는 것들.

중국에서 손오공의 머리털 분신들이 난리 치는 것과 같다.

아니, 그곳은 계약자의 힘인 것이 다르긴 하다.

“······?”

세르게이는 문득 휘두르던 검을 멈췄다.

검제의 가르침으로 그의 실력은 불과 며칠 만에 훌쩍 성장했다. 그래서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존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훅.

세르게이는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무언가 급격히 거리를 좁혔다.

정면의 대기가 폭발하듯 응축되었다가 터진다.

팡.

근처에 있던 나디아가 순간적으로 창을 던져 그것을 저지하려 했지만, 마력이 가득 담긴 그녀의 창은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처럼 힘없이 튕겼다.

세르게이는 숨을 참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검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러고도 저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것은 검은 피부에 붉은 뿔을 지닌 거대 도깨비였다.

두억시니.

전투 도깨비들 사이에서도 ‘반신’에 이르렀다는 격 높은 도깨비였다. 그것은 무엇에 그리 분노한 것인지 두 눈에 불을 붙이곤 세르게이의 심장에 손을 뻗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두억시니의 손톱은 세르게이의 검을 그대로 갈라 가슴에 닿았다.

콰아아앙!

순간적으로 세르게이가 지닌 모든 마력을 가슴에 집중했고 뚫려야 했던 가슴은 포탄에 맞은 것처럼 거대한 폭발과 함께 뒤로 튕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세르게이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전신의 뼈는 모두 부러졌고 근육은 찢어졌으며 내부는 진탕되었다.

전투 불가의 상태.

“도대체······.”

- 두억시니다.

검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거겠지.

- 저놈이 왜······?

검제의 물음은 끝마쳐지지 않았다.

두억시니가 다시 한 번 달려들었고 나디아가 막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창은 힘없이 부러져 버렸다. 두억시니는 쉼 없이 나디아를 몰아쳤고 그녀의 가슴은 몇 번이나 뚫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마력지체.

아무리 두억시니라도 쉽게 손상을 줄 수 없다.

- 그녀도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다.

“젠장할.”

도깨비는 영혼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는 존재이며 두억시니는 그런 도깨비의 상위호환 격의 존재였으니까.

세르게이는 비상 도움 요청 버튼을 눌렀다.

하필 이곳에서 저런 존재가 등장하다니, 아니, 오히려 슬슬 신격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다.

세르게이는 품에서 하급 엘릭서 하나를 꺼냈다.

조금만 시간을 벌면 된다.

조금만.

*  *  *

이한성은 친구들이 한 명씩 깨어날 때 옆을 지켰다. 무사히 깨어나면 자신도 무사함을 알렸고 친구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세르게이와 나디아가 가장 먼저 깨어나 서울로 향했으며 안혜림, 얜 샤를, 진훈 등이 차례로 깨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별.

“너무 늦는데.”

시련을 정상적으로 극복해냈다면 벌써 일어났어야 한다. 다른 친구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한별의 안색은 창백해질 뿐, 깨어나지 못했다.

한성은 검은 땅에서 꽤 많은 일을 했다.

블랙 바실리스크의 무정란에 발록의 ‘백’을 넣어 수정시키며 구울화를 준비했고 해룡에게 반쯤 협박하여 순수한 용혈을 구하기도 했다.

성검과 해룡을 동시에 쓰겠다며 쌍검술을 연습했지만, 아무래도 배운 적도 없고 마땅히 효과적인 것도 아니라서 그냥 하나만 사용하기로 했다.

물론, 생각보다 ‘멋’이 안 난다고 포기한 건 아니다. 진짜로.

삐빅.

- 한성님, 비상 요청입니다. 서울 잠실, 세르게이님과 나디아님입니다. 영상으로 확인했을 때 적은 두억시니로 파악됩니다.

한성은 헤일렌의 보고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력을 넓게 퍼뜨려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을 더듬었고, 빠르게 그곳으로 공간을 접어 이동했다.

팟.

그 자리에서 한성은 사라졌다.

*  *  *

한별은 아직 [시련] 속에 있었다.

원하는 만남은 끝났다. 그가 어렸을 때 말을 건 존재라는 것을 파악한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한별은 시련을 끝내지 않았다.

지금까지 직접 죽인 사람들.

그들이 자신을 머리끝까지 씹어 먹고 다시 씹어 먹을 때까지 가만히 당하고 있었다. 그저 죄책감을 벗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인가. ]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어둑시니의 말이 들렸다. 간혹 이렇게 대화한다. 한별이 묻고 어둑시니가 대답하고. 혹은 어둑시니가 묻고 한별이 대답하고.

“······혹시 남자가 아니라 여자?”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 ······. ]

대답이 없다.

그 말은 여성체라는 거겠지.

뭐,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그럴 줄 알았어.”

한별은 문득 예전 생각이 나 웃었다.

[ 무엇이 그리 웃기는 것인가. ]

“그 저택에서.”

진훈과 처음 만났을 때.

진훈이 한별을 구했고 그의 어머니가 악마가 되어 날뛰었을 때, 진훈은 그 순간 이전의 기억을 잃고 한별을 지키는 것에만 신경 썼다.

원래 그런 친구였다.

이윽고 진훈이 잠들었다. 악마가 사라지고 5시간이나 지났을 때였다. 정신적 충격과 오랜 긴장이 풀리면서 쓰러지다시피 한 것이었다.

한별은 그때 진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왜 이놈은 남을 지키는 것인가.

악마의 공격으로 무너진 저택 아래 깔려있음에도, 이 진훈이라는 놈은 한별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본인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문득 가문에서 배운 마법이란 게, 이럴 때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죽이는데 특화된 그의 마법은 더욱.

게다가 사방이 악마의 현신에 의한 마기로 변했을 때는 더더욱.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 지키고 싶으냐. ]

“지키고 싶습니다.”

왜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살지도 않았지만,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 배워왔던 한별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쓰러진 이 친구를 살리고 싶었다.

한별은 어둠 속의 그에게 다시 말했다.

“이 친구를 살리고 싶습니다.”

[ 네게 힘을 주겠다. ]

한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몸속의 마력은 모조리 사라졌다. 그때부터 그의 마법적 재능은 사라졌고 이능이 자리 잡았다.

이후, 마력은 조금씩 끌어모을 수 있게 되었지만, 가문의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었다.

한별은 옛 생각을 묻었다.

그냥 웃겼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자신을 지켜봤다.

이 어둑시니라는 신격은.

거의 스토커 아닌가.

그냥 그래서 웃겼다.

[ 가 볼 때가 되었다. ]

어둑시니는 그렇게 말했다.

한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대로 슬슬 일어나려고 했다.

한별은 팔과 다리를 물어뜯는 원혼을 털어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이 정도면 조금은 한이 풀렸겠지.

“제가 지킬 사람이 좀 늘어났습니다.”

[ ······. ]

한별은 등을 돌렸다.

이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이곳을 나가기 전에 조용히 말했다.

“그때까지만 좀 부탁합니다.”

*  *  *

세르게이는 몸을 일으켜 나디아와 함께 싸웠다. 전신이 부서질 듯했지만, 버텨야 했다. 육체는 한계에 다다랐고 고통과 맞서는 정신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두억시니라는 존재는 그 정도로 강했다.

두억시니와 부딪칠 때면 마력이 빨려 들어간다. 대기의 마력도 아니고 상대의 마력을 흡수해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직 신격이 되지 못한 존재다. 한성은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신격’과 싸워 이기지 않았나!

세르게이와 나디아는 같은 생각을 했다.

질 수 없다.

아니, 최소한 무너지지는 않는다.

콰아아앙!

두억시니의 손톱을 세르게이와 나디아가 전력을 다해 막아냈다. 마력 무기를 만들어 막으면 부서지기에 또 부딪힐 때마다 생성해 내야 했다.

막고, 부서지고, 생성하고.

온몸의 마력은 고갈된 지 오래다. 꿈쩍도 하지 않으려는 대기의 마력을 바짝 끌어다 사용했다.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분명 아까 전부터 한계였는데!’

- 생각했던 지점이 한계가 아니었다는 거지.

검제가 한마디 했다.

-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 육체는 단단하며 정신은 더없이 깊지.

콰아아앙!

나디아가 저만치 날아갔고 세르게이의 몸은 앞으로 구겨졌다. 하지만 기어이 일어나 마력 무기를 다시 생성한다.

‘마력이 없다.’

하지만 마력 무기는 만들어진다.

- 마력은 그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게 네 옆이든 적의 몸속이든.

‘맞는 말인데.’

터무니없는 말이기도 하다. 마력 자체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적의 마력까지 손을 뻗칠 순 없다.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일까?

저 앞의 두억시니는 그게 가능하다.

지금 자신의 마력 무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다 흡수당했다고 생각했던 마력. 실은 세르게이도 흡수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세르게이의 손에서 4m가 넘어가는 거대한 마력 검이 뿜어졌다. 동시에 몸에 마력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방심하지 마!

세르게이는 한 단계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억시니를 앞에 두고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파삭.

두억시니의 손에 세르게이의 마력 검이 부서졌고 미처 반응하지 못한 세르게이의 가슴엔 두억시니의 손이 박혀 들었다.

< 두억시니.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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