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의 선택. >
- [몽마(夢魔)의 마녀(魔女)]이자 [대악마의 아내 릴리스]를 살해하였습니다.
- [대악마] 등급의 [중격] 신격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해하였습니다.
두 개의 이명을 지녔으며 [마왕]과 버금가는 [대악마] 등급의 신격이었으며 하격을 넘어 상격에 다다른 중격의 신격이었다.
전 회차에서도 이 정도 신격을 잡은 건 10년 정도를 플레이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냥을 넘어서 신격을 흡수하기까지 한다.
- 신격을 삼켰습니다.
- [신격을 먹는 자]가 발동합니다!
- 과도한 ‘격’입니다.
- 육체 및 영혼이 과부하 됩니다.
홀로 릴리스의 모든 신격을 삼키지 못한다. 어차피 흩어져 버릴 거 해룡과 성시연에게 나눠줬다.
릴리스가 얍삽하게도. 아니, 이 정도까지 자존심을 버려가며 기억 이전을 시도할 줄 몰랐기에 다급하게 계산해 나눈 거지만, 비율은 적절했다.
오히려 릴리스가 틈을 벌려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업적을 이뤘습니다!
- [신격에 대항한 자(역사)]
- [세상의 이목 속에서 신격을 살해한 자.(전설)]
- [대악마를 벤 루시엘의 성검.(전설)]
- [인간의 몸으로 신격을 살해한 자.(신화)]
역시, 퀘스트는 난이도에 비례해 보상도 상승한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급상승했다며 [운]이 불행인지 행운인지 헷갈렸었는데,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행운으로 다가왔다.
- [신화의 태동]이 갱신되었습니다.
- [신화의 태동]
-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거대한 신화의 태동이 시작됩니다! 그 중심에는 플레이어 ‘이한성’이 존재하며 앞으로 모든 행보에 [신화]가 깃들 것입니다.
- 업적 :
* 역사 등급 : 11/20
* 전설 등급 : 10/7
* 신화 등급 : 4.5/5
신화의 태동이 눈앞이었다. 반쪽짜리는 [준신화]였다. 앞으로 [준신화] 하나를 채우고 역사 등급 업적만 채운다면 온전한 ‘신격’에 닿을 수 있을 거다.
문제는 한성의 업적이 과도하게 선(善)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다음 신격 사냥은 장고(長考)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네 번째 시나리오 : 첫 번째 재앙]을 완벽하게 클리어하였습니다!
- [신화의 태동]에 알맞은 난이도였습니다.
- 클리어 등급에 맞는 보상을 선정합니다!
- 압도적인 [운]이 발동됩니다!
- 보상으로 [히든 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 [메인 캐릭터의 시련]이 발동됩니다.
- 당신 주변에 있는 메인 캐릭터는 지금부터 ‘시련’을 겪습니다. 그것을 이겨 낸다면 한층 강해질 것이고, 실패한다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런 미친 시스템.’
이 게임이 원래 그렇다. 보상이랍시고, 성장의 기회랍시고 죽음으로 몰아넣기를 좋아한다. 재앙과 시련 따위는 성장의 발판이라는 거다.
‘하······.’
행운인지 악운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한성은 그대로 정신이 꺼졌다.
육체와 영혼 모두가 과부하 되었기 때문이다.
* * *
진훈은 하늘을 올려다본 하늘은 장엄하다 못해 경이로웠다. 하늘의 절반을 차지하는 해룡과 나머지 절반을 붉은 마기로 채우고 있는 릴리스라는 악마.
그것은 말 그대로 하늘을 갈랐고 대지를 요동시켰으며 대기를 태워버렸다. 마기와 기세 등으로 하늘을 이등분한 광경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마계족과 아군 또한 그들 아래서 쉽게 버틸 수가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마주한 것만으로 전쟁은 멈춰졌다.
파괴적인 기세의 충돌.
그 강함은 눈부시다 못해 아름다웠다.
하지만 진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범접할 수 없는 ‘신격’ 사이에 당당하게 선. 아니, 그런 거대한 힘에 검을 겨누고 있는 한성과 성시연이었다.
멋있다.
그리고 자랑스러웠다.
분명 같은 나이의 친구다.
처음 봤을 때, 한성이나 성시연 모두 지지는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겨우 반년이 지난 지금. 저들은 신격에 맞설 정도로 성장했다.
화악.
광열(光熱)이 하늘을 뒤덮었다. 한성의 기세는 해룡과 릴리스 사이를 파고들었고 성시연의 검은 적의 붉은 마기를 갈랐다.
한순간, 한성의 존재감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커졌다. 하늘 위의 하늘처럼 보였던 해룡과 릴리스에 맞먹을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그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고 그가 목숨을 바쳐 이룩해온 기적은 ‘신화’가 되었다. 그것들이 한성의 힘을 쌓아 올리고 있다.
지금 당당하게 대악마의 신격에 검을 겨누고 있는 한성.
그것은 ‘신화’ 그 자체였다.
이곳에 모인 모두는 신화의 완성을 목도(目睹)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저렇게 강해지면.’
진훈은 어렸을 때의 기억이 되짚었다.
그리고 ‘신격의 좌’에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뻗은 손길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무투 하나만으로 신격에 올랐고 어머니는 천사였다가 악마가 되면서 신격에 올랐다.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다.
아버지의 힘을 잇고.
아버지가 세운 업적을 되짚어가며.
아버지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악(惡)에서 구하기 위해선 이 끈을 놓아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언젠가 진훈에게 힘이 있을 때, 어머니 곁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계약했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
그와 동시에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신격의 힘에 취할 것만 같았다. 머리가 핑 돌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강력한 마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진훈은 그 마기를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꾹 참고 버틴다.
계약은 했지만, 그 힘을 쓰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진다. 아버지에게 받은 이 금(金)의 마력으로 언젠가 어머니의 악(惡)을 정화할 수 있을 때까지 죽지 않고 강해질 것이다.
저 위에 한성처럼.
한성보다 더 강해져서 앞으로는 자신이 한성을 지켜줄 것이다.
파삭.
진훈은 신격의 충돌로 생긴 거대한 폭풍에 휘말려 이곳까지 떠밀려온 마수 하나를 터뜨렸다. 신의 힘을 빌리지 않은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전쟁은 끝났다.
릴리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쓰러지는 한성을 성시연이 받았다. 그리고 해룡은 언제 있었냐는 듯 하늘 위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진훈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 사용자 ‘진훈’, 당신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 과거의 잊힌 기억을 재생합니다.
- 악(惡)과 선(善)의 경계선에 선 당신은 언젠가 선택해야 합니다. 당신이 추구할 정의(正義)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진영에 서야 올바르게 이뤄질 수 있는지.
그것은 진훈만 겪는 게 아니었다.
멀리 있던 다른 친구들, 모두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중에 한별은.
- 사용자 ‘한별’, 당신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 과거 당신의 손으로 죽였던 이들의 원혼(冤魂)이 당신에게 손을 뻗칩니다.
- 사람을 죽인다는 것. 살기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한 사람의 삶을 끝내버린 당신은 과연 선(善)에 설 자격이 있을까요. 그 자격을 증명하고 선(善)의 진영을 유지하십시오.
모두에게 다른 방식으로 시련이 다가왔다. 누군가는 과거로부터, 누군가는 현재로부터, 누군가는 미래로부터. 스스로 반드시 이겨 내야만 하는 시련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한별이 겪는 시련은, 특별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별은 그렇게 느꼈다.
끄아아악!
끼이이아야악!
죽어! 죽어!
네가 날 죽였어! 네가 날!
수백, 어쩌면 수천 명에 이르는 썩어버린 시체들이 한별에게 달려든다. 그의 팔을 물어뜯고 발의 뼈를 씹으며 자신의 삶을 비춘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가족이 있었고 그 가족이 느끼는 슬픔. 원망. 좌절. 죽을 때 느꼈던 고통, 괴로움, 두려움. 모든 걸 한별에게 전했다.
한별은 수백 번, 수천 번 죽어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여기 있으니 당신을 볼 수 있군요.”
한별은 아그작 씹히는 자신의 팔다리를 무시하곤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까짓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무언(無言)의 왕(王)]
한별의 [왕명]과 완벽하게 같은 힘을 지닌 신격이었으며 [왕명]을 진짜 왕명으로 만들어 준 신격. 어둡고 어두운 저 무저갱에서 붉은 눈만 번뜩이는 신격.
모든 도깨비의 왕이며, 두억시니의 형제. 그리고 ‘천사’와 ‘악마’에 대적할 수 있는 ‘선(善)’에 선 ‘중립(中立)’. 어둠 속에 깊이 잠든 요괴왕 어둑시니.
그게 바로 한별과 계약한 신격이었다.
“왜 저에게 오셨습니까.”
한별의 얼굴은 하얗게 바랬다. 수없이 많은 고통이 사지를 갉아먹으며 올라오고 있었기에, 더없이 뜨거운 분노가 심장을 파먹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어차피 용서받을 생각은 없었다.
처음 누군가를 죽일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 시켰으니까 죽였고 훈련과 고문을 피하기 위해 죽였다.
그게 전부였다.
죽는다는 게 이런 고통이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몰랐다며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겪었던 모든 고통을 원 없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오히려 이런 기회가 와서 좋았다.
그들이 진짜일 리 없고.
이런다 한들 그들이 살아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앞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라 결심할 것도 아니다.
이기적이지만, 이렇게라도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을 테니까.
[ 네가 나와 같기 때문이지. ]
조용하던 어둑시니가 입을 열었다.
한별은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오래전, 진훈과 함께 무너져가는 저택에 숨어 있을 때 들었던 목소리와 같았다. 요괴왕은 그때부터 한별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법의 모든 재능이 사라지고.
이능으로의 재능으로 변한 게.
그때부터였을 거다.
한별은 그 ‘시련’ 속에서 그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 * *
한성이 깨어난 곳은 31번 구역의 구역주 전용으로 지어진 상당히 사치스러운 건물이었다. 묻지는 않았지만, 길이현이 계획한 건물이었을 거다.
한성은 일어나자마자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대부분 정신을 잃은 상태로 한성처럼 병실에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아직 누군가 죽거나 불구가 되진 않았으니까.
“신격이 바로 앞이구나.”
고풍스러운 침대에 누워서 강제 요양 중이었다. 하얀이와 성시연은 물론이고 길이현까지 나서서 한성을 이곳에 감금하다시피 했다.
신격을 이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명’ 혹은 ‘수식언’이라고 한다.
한성은 선(善)에 너무 치우쳐 있다. 악(惡)을 상대할 때는 아주 좋은 상성이지만, 나중에 선(善)의 신격과 싸울 때는 이점이 전혀 없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
그래서 성시연을 완벽한 마왕으로 키우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래도 성시연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잠재력이 부족하니까.
한성이 ‘중립(中立)’이 되는 게 가장 좋다.
동해의 해룡 또한 중립에 가깝고 한별이 계약한 신격도 마찬가지다. 진훈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성향으로 선의 진영에서 중립에 설 거다.
그래야 종장에 다가갈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메인 캐릭터인 거니까.
한성도 그래야 한다.
마지막 신화 등급의 업적.
이게 가장 중요하다.
현재 한성이 지닌 키워드는 [악을 베는 검], [천사], [신격], [사냥꾼], [관종] 이 정도이지 않을까. 아마 관심이라든지 관종이라는 단어는 무조건 들어갈 거 같다.
“······가장 좋은 건······.”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쾅!
누군가 문을 강하게 열고 들어왔다.
“아빠!”
하얀이었다. 서울에 퍼진 도깨비를 잡는다고 정신없었는데, 이제야 급한 불은 끈 모양이다.
‘그 정도로 꺼질 건 아니지만.’
아마 그 도깨비들을 처리하려면 지금 정신을 잃고 시련을 겪고 있는 한별이 깨어나야 할 거다. 그러면 한국은 단숨에 정리되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한별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하겠지.
뭐, 그것도 한별의 선택이긴 하지만.
“우리 딸 왔구나!”
“아빠아앙!”
하얀이는 한성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하얀이의 뒤엔 카메라가 둥둥 떠 있었다.
“······생방 중이니?”
“네, 부녀(父女) 상봉 컨텐츠?”
“······나보다 더한······.”
한성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하얀이의 이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아빠, 아빠. 내가 서울에서 뭘 했냐며언~”
하얀이는 자기가 한 일들을 하나씩 열거했다. 전투 도깨비 분신이 나왔는데, 용병 수십 명이 붙잡고 있었던 것을 한 번에 제압했으며 그 영상 조회수가 1억을 돌파했다는 것.
또, [게이트 오브 바빌론]이라는 것을 실전에서 써 봤는데, 효과가 어마어마했으며 미국과 한국 정부에서 연락이 왔다고.
별의별 이야기를 재잘댔다.
힐링이라는 건 별거 없다. 소중한 사람과 이런 소소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최고다.
‘하얀이도 슬슬 격의 완성을 진행해야 하는데.’
용혈은 태어나면서부터가 신화 업적의 시작이다. 성장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행동 하나하나가, 존재 자체가 신화이기에 일정 나이를 먹으면 [신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걸 기다리기는 힘들다.
한성과 메인 캐릭터의 각성이 빨라진 만큼, 하얀이도 그만큼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하얀이를 전투에 써먹고 싶은 마음보다도 스스로 살아남을 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부터 업적 관리를 해야지 이상한 ‘이명’을 얻지 않으니까. 괜히 이상한 걸 얻었다가 고약한 약점을 얻을 수 있었다.
< 진영의 선택.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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