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관종. >
한성이 지금까지 [계약]을 하지 않은 건 온전히 스스로 신격에 오르기 위해서다. 계약이라는 건 격이 있다고 무조건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시간에 특정 행동으로 신격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그 신격의 눈에 들어야 하며 싹수가 보여야 한다.
말 그대로 재능이 있어야 신격도 믿고 계약하자고 손을 뻗는다는 것이다.
한성이 그것을 몰라서 계약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스가르드의 주신이라는 오딘과 계약할 수 있고 중국의 제천대성인 손오공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것뿐인가 대천사, 대악마, 크툴루 신화의 올드 원까지 계약을 맺을 방법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한성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단순히 ‘계약’이라는 것 자체로 등급 하나. 격 하나를 올릴 수 있게 되는 거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상격. 그 이상의 강력한 신격과 계약하면 한성도 그것에 비례해 강해질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한성이 스스로 온전한 [전설]에 닿았을 때는 그 계약으로써 얻는 힘이 더욱 커질 거다.
‘지금 당장 계약하더라도, 저 앞의 릴리스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
당장 진훈과 친구들이 상격의 신격과 ‘계약’을 했다는 것만으로 대부분 S등급 이상으로 올랐다는 게 그 증거다. 업적과 능력치가 부족하지만, 신격의 힘은 그 격차를 메워준다.
문제는 말 그대로 [계약]이라는 거다.
그들은 계약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다른 인간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뿐이다.
이후, 진영 간의 전쟁이 시작되면.
선과 계약한 인간은 악과 계약한 인간을 적대할 수밖에 없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된다. 그것은 ‘신격’의 강제가 아닌 ‘진영’ 간의 어쩔 수 없는 섭리이다.
한성은 그게 싫었다.
한성만이 아니다.
이곳의 수많은 은거 기인이 계약하지 않고 스스로 전설을 쓰고 신화를 걷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남에게 받는 힘이 찝찝하고.
계약이라는 강제력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스스로 신화의 태동을 이루려는 이들은 안다. 선과 악이라는 진영이 있고 그 진영 간의 전쟁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그래서 한성은 스스로 신화를 쓰길 바랐다.
친구들이 계약하는 것?
그건 상관없다.
그게 악의 신격만 아니면 된다. 그리고 한성은 그들의 성향을 잘 알기에 악의 신격 자체가 그들에게 손을 뻗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단 한 명.
예외가 있다.
‘진훈······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성도 아직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하긴, 둘 중 하나일 텐데 그 어떤 것이든 바뀌는 건 없다. 어떤 선택을 했든 아스모데우스에서 ‘악’을 떼어 내 다시 ‘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은 바뀌지 않으니까.
한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앞에서 친구들이 마계족을 막아서고 있을 때, 이야기를 마쳐야 한다.
한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 * *
[정연]에서는 마법사의 신격을 주로 선택한다. 멀린, 간달프, 마나난 막 리르, 드래곤, 요정왕 등등. 마법에 정통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별은 다르다.
마법도 곧잘 하는 편이지만, 그가 지닌 [왕명]은 이능 중에서도 특별하다.
그 증거로 그에게 다가온 마법 관련 신격은 거의 없었다. 이능관련. 그것도 염력 관련된 신격들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한별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명이 하나 있었다.
[무언(無言)의 왕]
한별의 [왕명]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힘의 방향을 바꾼다든가 힘의 성질을 변형해 되돌린다든가. 일정 구역 안에서 아주 강력한 강제력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왕명은 [무언의 왕]이라는 신격을 바라고 있었다.
한별은 그 신격과 계약했고, 그게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이 검은 땅에서 깨달았다.
키잉.
한별의 손이 향하면.
그곳의 ‘중력’이 수천 배로 증가하며 마계족의 몸을 묶는다. 한별에게 날아오는 마법과 이능의 방향을 바꿔 묶여 발버둥 치는 마계족에게 날려버린다.
아주 간단한 응용이었다.
한별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 [왕명]이라는 것에 [무언의 왕]이 보태준 ‘격’이 포함되면서 ‘한정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대폭 상승했다. 그리고 그 힘은.
파사사삭.
눈에 보이는 모든 마계족의 목을 단번에 날려버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별은 전진했다.
푸확.
반대쪽, 진훈의 주먹에서 거인의 주먹이 투영되었다. 그의 주먹이 도달하는 공간은 그대로 터져 나갔으며 뒤로 수백 개체의 마계족이 똑같이 스러졌다.
아직 신격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계약으로 ‘격’을 얻고 능력치가 대폭 상승되었으며 이능 따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계약한 신격 고유의 힘은 내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과과광!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어 번개를 쏟아냈다.
‘오딘’과 계약한 얜 샤를은 번개를 창으로 만들어 저 멀리 신벌(神罰)을 내렸다. 일대는 밝은 빛으로 물들었고 마계족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콰과광! 쑤욱. 쾅!
세르게이와 나디아가 보인다.
검과 창.
단순히 근접 무기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하나의 ‘전략 병기’가 되어 수백 개체의 마계족을 단번에 베고 폭발시킨다.
세르게이는 [검제(劍帝)]라는 이명을 지닌 신격과 계약을 맺었는데, 아마 이때부터 세르게이가 검에 눈을 뜨고 눈부신 성장을 하기 시작했을 거다.
다른 신격과는 다르게 힘만 주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세르게이에게 가르침을 내려주게 된다.
다들 자신과 맞는 신격과 계약했다. 전 회차와 별다를 거 없는 선택이었고 모두 스스로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게 될 것이다.
콰아아아! 콰아앙!
멀리서 고위급의 마법과 강력한 이능이 날아온다. 마계족의 진영이었으며 마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31번 구역 방벽에 부딪혔다.
공을 들여 만든 방벽이다.
31번 구역을 하나로 잇는 마력 신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블랙 키리윰을 사용해 강도와 마력 전도율을 대폭 강화했다. 그뿐이 아니다.
한성이 직접 간간이 들려 마법을 새겨 넣었으며, 정연의 마법사를 고용해 영혼까지 갈아 넣었다.
마계족이 뿌린 공격은 방벽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악의 신격이 머리를 쳐들었고.
마계족 또한 상상 이상으로 강해졌다.
첫 번째 재앙(災殃)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때, 이곳에 모인 모두는 느꼈다. 하늘에서 드리우는 거대한 존재감. 한반도에 등장했던 그 왕의 격이 검은 땅에 강림(降臨)했다는 것을.
* * *
『 당신이 지켜야 할 곳은 이곳입니다. 』
한성의 이야기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해룡(海龍)이라는 것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에 속해 있는 몇 안 되는 신격이며 그의 사명은 외세의 침략에서 후손을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한성은 길게 푼 이야기를 끝냈다.
왜곡(歪曲)이었으며 궤변(詭辯)이었지만, 한성의 이야기는 해룡을 옭아매는 제약에 적합한 개연성을 부여했다.
쿠우우웅.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번개가 내려쳤으며 땅을 울리는 거대한 존재력이 하늘을 가른다. 그곳에서 삐져나오는 기다란 수염과 거대한 송곳니. 그리고 여의주까지.
해룡이 검은 땅에 소환되었다.
[ 결국, 소환했군. ]
해룡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왕]의 격을 지니고 죽었지만, [신화]에는 도달할 수 없는 부족한 격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한반도에 영원히 얽매여 ‘수호한다’라는 단순한 명제에만 반응하게 하면서 [신화]에 들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 제약을 이렇게 풀어내다니.
[ 좋아, 계약하지. ]
“해룡님.”
한성은 해룡의 말에 웃으며 질문했다.
“혹시, 밤부 좀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아무래도 적이 너무 강력하기도 하고. 해룡님께서 가지고 계셔도 별로 쓸 곳이 없으니까요. 아아, 그리고 해룡님을 소환하면서 ‘격’의 소모가 꽤 커서. 그걸로라도 격의 부담을 줄여야······.”
한성의 말에 해룡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원래 이 만파식적의 대나무는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 그 제약은 이곳에 소환되면서 범위가 넓어졌기에 사라진 셈이나 다름없다.
[······그 정도야.]
한성은 씨익 웃었다.
해룡은 달라졌다. 한반도에만 묶여 있던 몸에서, 한정적이지만 ‘자유’를 찾았으니 여유라는 게 생긴 거다.
한성은 ‘용혈’이라는 것을 요청하려다 말았다.
언제나 ‘적당히’라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저 앞에 릴리스와 싸우다 보면 피 한 방울 정도는 흘리지 않을까?
한성은 예의와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 죄송하지만, 창 말로 검의 형태로 될까요?”
[······넌 도대체 뭐지?]
해룡은 갈수록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본인을 제외하고는 이미 하늘에 있는 김유신 정도만 아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이 뻔뻔함은 무엇인가.
도저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헤헤,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한 번 밀어주는 거, 제대로 해 봐라. 대신.]
“넵!”
[내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건 잊지 말거라. 아무리 제약을 왜곡했다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격의 소모가 가속화되어······.]
“그럼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성은 그렇게 말하며 드론 카메라를 분출했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드론 카메라가 보인다. 지금까지는 3개 정도로 촬영했지만, 지금부터는 12개의 영상을 동시에 송출하여 ‘헤일렌’을 통해 실시간 화면 분활 편집 정도만 해서 보내기로 했다.
자, 이제 한 번 그 유명세로 격을 이룬 ‘신격’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관종’의 힘을 보여줄 때다.
한성은 몸을 비스듬히 세워 중지를 미간에 얹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나는 관종이다.”
새로 만든 생방송 인사였으며.
SSS등급 이능인 [나는 관종이다]를 발동하는 명령어이기도 했다.
[······또라이네 이거.]
해룡이 한숨을 내 쉬며 조용히 읊조렸다.
1,400년 정도를 이 땅에 숨죽이며 살았지만, 이 정도의 관심병이 있는 종자는 처음 봤다. 이 선택이 잘한 것인지 후회가 되었다.
“500만의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아, 700만이군요. 벌써 1,000만 돌파 감사합니다. 여기가 어디냐구요? 검은 땅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느끼신 [대격변]으로 인해······.”
해룡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성이 해룡에게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자, 여기는 우리 1400년이나 우리 한반도를 지키시던 동해의 해룡! 신라의 문무왕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류를 지키기 위해 검은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러자 채팅창이 폭발했다.
-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상상을 초월하는 또라이.
- 이번 서울 상공에 나타난 신격 아님?
- ㅋㅋㅋㅋㅋㅋ와, 한성 이거 신개념 또라이인데?
- 본격 신격 소개 방송.
- 이야, 한반도를 지키는 신격이 검은 땅에서 인류를 위해 싸우는 거, 주모! 쎠따 내려!
- 국뽕 쩌는데. 대한민국 만세!
- 와, 우리나라 신격은 뭐하냐. 우리 중국은 손오공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냐.
- 미쳤다. 신격이 어떻게 강림했지? 그런 게 가능하기나 했나?
- 이거 사기 아님? 말이 안 되잖아.
- 근데 지금 난리도 아님. 세계 곳곳에 신격이 등장했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쳤다. 순식간에 시청자 5,000만 돌파.
[······이런 미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아니, 신격을 카메라로 담을 수나 있는 것인가. 보통 사람은 신격의 존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죽는 게 보통이다.
요즘 기술이라는 게 대단하긴 한 것 같았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시선에 ‘업적’이라는 게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1,400년 전에는 사선을 수십 번 넘기며 구르고 굴러도 작은 것 하나 제대로 생기지 않았던 업적이 말이다.
- [현세에 강림한 문무왕(역사)]
- [한반도를 지키는 동해의 해룡의 역사(역사)]
- [세계로 진출한 한국의 신화(전설)]
- [세계인이 알아보는 신라의 왕(전설)]
- [한반도의 수호신은 월드 클래스(전설)]
- [인류를 위해 악마와 맞서는 한반도의 왕(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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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시선이 당신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한성은 스마트 워치로 넓게 펼친 채팅장을 해룡에게 보여줬다.
“요즘은 예전같지 않습니다. 이 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보죠. 방금 1억 명이 돌파했습니다.”
관심의 힘이라는 것은 한성처럼 관련 이능이 있어야만 발동되는 게 아니다. 높은 격을 지닌 신격일수록 사람들의 인지도. 즉, 관심에 예민하다.
한성은 저 멀리 다가오는 마계족과 릴리스의 신격을 카메라로 담았다.
“한반도의 수호신이여. 인류를 위해 싸워주시겠습니까?”
거부할 수 없는 판을 깔아줬다.
이게 바로 관심의 힘이다.
< 진정한 관종.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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