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재앙(災殃) >
헤일렌은 한성의 신호를 받자마자 기다렸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한성은 돈이 많다. 그 계좌는 헤일렌이 모조리 관리하고 있었고 검은 땅에 있는 동안에도 한성이 집어준 목록을 유심히 보며 제테크를 진행 중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도박이라고 해야 할 거다.
그만큼 리스크를 관리하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투자했으니까. 하지만 이 계획은 지금까지의 투자는 애들 장난처럼 보이게 하는 ‘투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헤일렌은 고민하지 않았다.
한성이 말해준 모든 일은 80% 이상 들어 맞았으니까. 20%는 틀려 많은 손해를 안겼지만, 나머지 80%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세계 전쟁에 투자하라고?”
계획서의 초입이었다.
세계 전쟁, 세계 몬스터 웨이브, 한국과 미국의 강세, 일본과 중국의 약세, 유럽의 해체 등등. 수많은 격변(激變)이 계획서에 있었다.
헤일렌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이 정도 세계의 변화라면 이런 재테크 투자와 같은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검은 땅이 뒤집히고 아마존의 지저 세계가 올라오며 세계 전쟁이 촉발된다니.
이런 재앙 속에서······ 한성은 한국만큼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현 그룹은 승승장구하고 마계의 탑에 도전하려고 했던 몇몇 기업은 사라지고.
한성은 오래전부터 지금을 준비한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계획서가 나올 수 없으니까.
헤일렌은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이러한 일일수록 빠르고 명확하게 끝내야 한다.
* * *
한성은 해룡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 없이. 오히려 당당하고 깨끗하다는 표정으로.
발밑에 마력을 정교하게 분사하며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심이 멀어지고 한성은 구름에 다다랐을 때, 해룡의 입이 슬쩍 움직였다.
무언가 말하려는 행동.
하지만 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밤부를 가져왔습니다.”
[ 특이한 인간이군. ]
웅후한 음성이 한성의 귓가에 울렸다.
쿨럭.
한성은 신격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혔다. [전설]에 오른 격이라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신격을 마주하는 것 정도가 전부.
지금 한성은 해룡과 대화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었다.
[비이상적인 격을 지니고 있어.]
해룡은 재미있다는 듯 한성을 관찰했다.
그러면서도 속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에 놀라워했으며, 한성의 재능과 업적의 흔적을 살피며 더욱 놀라워했다.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한성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번개가 내려치며 한성의 속은 한 번 더 뒤집혔다.
[너에겐 거래를 요청할 자격이 없다.]
해룡의 흔들림 없이 청명한 시선이 한성에게 고정되어 있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한성이 탐나는 거다.
해룡의 목적은 한반도를 지키는 것.
그러다 언젠가 모든 힘을 다하고 소멸하는 것.
“그럼 해룡, 당신이 저에게 거래를 요청하는 것은 어떨까요.”
한성의 말에 해룡은 미동도 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는 이 한반도를. 더 나아가 인류를 지키고 싶습니다.”
해룡은 여전히 말이 없다.
한성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어떤 신격과도 ‘단일 계약’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뜻이 맞는다면,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의 ‘다중 계약’ 정도는······.”
[이놈!]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외침이 한반도를 넘어서 주변국까지 퍼졌다. 그것으로 대기는 일순 차갑게 변했으며 공간과 시간은 뒤틀렸다.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한성과 해룡의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군.]
해룡의 심안으로도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음. 거기에 시간과 공간에 지배력을 가졌으며 마력에 관한 재능은 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겨우 저 나이로 이런 격이라니.
해룡의 눈에선 아주 오랫동안 한 번도 떠오르지 않은 ‘욕심’이라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해도······ 다중 계약을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그런 것 따위는 할 수 없다.]
‘계약’이라는 것은 신격이 인간에게 제안하고, 인간이 받아들인다면 성립되는 거다. 인간은 그 계약으로 신격의 힘을 빌려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계약이라는 것이 양쪽에 이득이 되어야 하는 것.
신격은 계약한 인간에게 ‘힘’을 주고 자신의 ‘진영’으로 넣는다. 그리고 계약한 인간이 활약하면서 쌓이는 유명세에 ‘인지도’를 얻는다.
인간이 인지도를 얻고 불가능한 ‘업적’을 얻으면서 강해지는 것처럼 신격도 다를 바 없다. 직접 활동하지 못하고 계약을 통해 인지도를 쌓아야 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신격에도 급이 있다.
하(下), 중(中), 상(上)의 격(隔)을 붙인다.
해룡은 하격(下隔)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그 이상의 힘을 가지기엔 업적이 부족했지만, 한반도를 지키겠다는 강한 신념 하나로 한반도에 묶인다는 ‘제한’과 동시에 중격(中隔)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된 거다.
“제가 당신의 격을 감당하겠습니다.”
[고작 너 따위가?]
“아직은 약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제가 그럴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자신감이 과하군.]
“제 계약은 단순합니다. 제가 격을 감당할 수 있을 때만,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럼 제가 당신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
“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그 격을 감당할 만한 재능이 있는지, 그리고 과연 제 존재가 얼마나 당신을 널리 알릴 수 있을지.”
그 정도까지 말하자 해룡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하나같이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말들. 과연 이 어린 인간이 자신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오만이 아닌 자신감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원하는 것일까.
해룡은 한 번쯤은 어린 인간의 손에 놀아나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의 계약. 앞으로 이어질지, 이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계약을 맺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해룡은 한성에게 밤부를 받고 돌아갔다.
서울은 그 날, 전 세계에서 최초로 신격을 직접 목격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곧 전 세계 곳곳에서 신격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날을 [대격변의 날]이라 불렀다.
* * *
진훈과 친구들은 사방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떠 있던 해룡은 사라졌기에 압박감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강렬한 존재감.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총 열 개가 넘어가는 시선이었다.
“계약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이곳의 모두 ‘격’을 제대로 얻지 못했기에 계약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던 후보생들이었다. 하지만 몇몇은 벌써 계약을 완성한 것인지 환한 빛에 휩싸였다.
그들의 손목엔 성흔(聖痕)이 새겨졌다.
그러한 후보생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진훈은 고민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격들의 이명이 그에겐 보였다. 하지만 누구를 골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 한성이 보고 싶다.
항상 옳은 선택을 하고 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한성.
하지만 언제까지나 한성에게 의지할 순 없었다.
진훈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한별이 웃으며 성흔이 새겨지는 게 보였고 멀리 한도석은 두 번째 성흔이 새겨지는 게 보였다. 부족했던 ‘격’을 그와 계약한 [하늘을 부수는 악동]인 ‘천마’가 채워주며 천마의 힘을 더욱 실어주는 것.
두 번째 계약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상위 50위의 후보생이 모여 있는 곳. 몇몇을 빼고는 다수의 신격에게 선택을 받았다.
진훈은 허공에 떠 있는 이명들을 바라봤다.
[산을 뒤집은 두 머리 오우거]
[열두 과업의 영웅]
[요툰하임의 악동]
[여의와 화안금정의 주인]
.
.
.
본래 이명이라는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건 두 번째 계약에 보이는 이명이다. 그 말은 진훈에게는 첫 번째 계약을 건너뛰고 두 번째 계약을 하자는 뜻.
그만큼 진훈이 탐난다는 것이다.
계약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진훈의 이능이 진화하고 계약한 신의 힘을 빌려올 수 있다는 것. 언젠가 그들 아래, 그들을 위해 싸워야겠지만 100% 강제는 아니게 된다.
이건 ‘종속’과는 다르니까.
진훈은 그 정도까지만 알고 있었다. 아직 ‘계약’이라는 게 등장하고 신격이 누군가를 강제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100% 확실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성이라면 알까?’
진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진훈의 눈에 두 개의 이명이 보였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
10개가 넘어가는 신격 중에서 단 하나인 악(惡)의 신격.
진훈은 눈동자가 떨렸다.
그 이명이 누구를 뜻하는지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 하나 더.
[금안(金眼)의 외팔 무투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신격의 이름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정도로 인지도도 없으며 첫 번째 계약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진훈은 이게 누군지 안다.
‘아버지.’
진훈은 ‘계약’을 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 두 이명이라면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특히, ‘그것’을 위해서라면······.
진훈은 하나를 골랐다.
* * *
세계는 격동(激動)을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 한성은 검은 땅으로 향했다. 해룡의 첫 번째 시험을 최대한 빠르게 완수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마지막 남은 [신화]를 완성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네 번째 시나리오. 아니, 여섯 번째 시나리오까지 열린 지금. 한성이 가진 힘은 애매하다. 누구에게 쉽게 질 리는 없지만, 안전하다고 확신할 순 없다.
특히, 기존의 강자들이 이번 신격 개방으로 얻을 힘을 생각한다면 결코 안심할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의 몸으로 ‘신격’에 도달하여 신화를 완성한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선(善) 진영은 물론 악(惡)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다.
‘아군도 강해지지만, 적도 강해진다.’
다행인 것은 최대의 적인 ‘신격’과의 격차가 좁혀지는 게 빠르다는 것 정도일까.
그리고 지금 가장 급한 일이 두 가지 있다.
성시연을 잡아먹으려는 [릴리스]의 신격과 진훈을 악(惡)으로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아스모데우스]를 잡는 거다.
한성은 드넓은 검은 땅을 바라봤다.
31번 구역은 많이 변했다. 안전하고 풍요롭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검은 땅의 대도시가 되었다. 그곳에서 걷히는 한성의 세금도 상당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검은 땅에 혼돈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저 멀리, 악의 신격이 고개를 쳐들고 지금껏 잠잠했던 마계족을 자극했다. 몇몇 귀족 마족은 악의 신격과 두 번째 계약을 맺어 강해졌으며 몇몇 악의 신격은 이 틈에 인간의 땅을 노린다.
그리고 그중, 릴리스는 이곳으로 향할 거다.
지금까지 잃은 ‘격’을 얻기 위해서. 한성에게 복수하고 성시연이라는 완벽한 ‘화신체’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도 화신체를 이용해 격의 일부만 내려오는 게 아닌, 현신(現身)이나 강림(降臨)할 수도 있다. 해룡 덕분에 [대격변]이 시작되었고 잠시지만 ‘화신체’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이 땅에 내려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
스스로의 ‘격’을 소모하는 위험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잃었던 ‘격’을 얻는다면 그 정도 리스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릴리스는 반드시 올 거다.
그리고 또 하나.
거대한 마계족 군단. 항상 이 땅을 노렸던 인근 마계족은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 거다.
두두두두두.
멀리 진동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서 울리는 진동.
곧이어 그것보다 더 멀리, 뿌연 먼지가 솟아오른다.
수만, 수십만의 마계족이다.
그리고 그 위에 곧 터질 듯 미쳐버린 신격 하나가 보였다.
‘시작이군.’
이게 [대격변]이라는 이번 시나리오의 [첫 번째 재앙(災殃)]이다.
“전군.”
한성의 음성은 잔잔했지만, 모두의 귀에 명확하게 꽂혔다.
급하게 준비한 전쟁이다.
하지만 진훈과 한별을 비롯한 친구들. 블랙 오크의 안톤과 그의 대원들. 정연, 흑연, 언더월드에 소속된 이들까지 이곳에 도우러 왔다.
당연히 비상 전력 요청권을 쓰지 않았다.
이 위기는 단순히 31번 구역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 적에 맞서 싸운다. 』
동시에 아군 진영에서 대단위 마법과 이능이 펼치는 공격이 적에게 뻗어 나갔다. 가히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들의 전쟁을 보는 듯했다.
한성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이곳에서 한성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곳은 한반도가 아니고 검은 땅이다. 하지만 외세(外勢)의 침략을 막기 위해 처절하게 싸운다는 것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해룡(海龍)이 활약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게 무슨 궤변이냐고?
역사는 기록되고.
기록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성은 [역행 마법]으로 세계의 규칙을 내릴 수 있다.
『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 왕이 있었다. 』
한성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첫 번째 재앙(災殃)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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