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략이란 이런 것이다. >
28번 구역은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면적만 해도 31번 구역의 세 배가 넘으며, 밀집도나 관련 시설은 마치 ‘서울’과 어느 지방의 ‘면’을 보는 듯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중앙엔 왕성이라는 게 있다.
이곳의 왕은 ‘한구본’.
하지만 한구본은 이 검은 땅에 가끔 들릴 뿐이다. 지금은 비어버린 자리였고, 첫째인 ‘한 태’가 그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서 양산박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한성은 하얀이와 왕성으로 들어섰다.
사방엔 풍부한 마력을 발산하는 [정제된 최상급 마력석]이 걸려 있었고 드높은 천장엔 마치 ‘뇌’의 시냅스를 보는 듯한 회로 신경망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도시 전체를 하나로 연결해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돈이 썩어 나는군.”
“돈이 썩어?”
“그 정도로 많다는 뜻이지.”
“아하, 돈이 많으면 썩기도 하는구나.”
둘의 대화에 한성을 호위하는 이들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이 복도에만 해도 100여 명이 넘는 정연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잘 단련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정연]의 특징이다.
마법이 주가 되면서 육체도 극한까지 단련한다.
[육체 강화 회로]를 새겨 넣고 각종 [버프]를 쏟아 넣을 수 있는, 말 그대로 마법과 육체의 극한에 다다른 사람들인 거다.
“역시 정연 답네.”
둘이 어디론가 도착했을 때는, 한성이 예상한 사람이 둘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연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집사 ‘안현태’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모자람 없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답니다.”
꿈틀.
안현태의 관자놀이가 살짝 움직였다.
살짝 당황했다는 뜻이다.
그는 이상한 취미가 있다. 한구본에게 애정을 받는 손님이 정연에 올 때 과한 친절을 베풀어 겸손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구본에게 받는 친분과 애정에 대한 질투이기도 했으며 정연의 힘을 알고 ‘한구본님’의 위대함을 알라는 경고의 표시이기도 했다.
대부분 이런 환대를 받으면 정연이 가진 힘에 압도되어 위축되고 만다. 하지만 한성이 누구인가. 이 정도는 실실 웃으며 감사히 받을 사람이다.
“기분이 좋으셨다니, 저야말로 다행이군요. 저희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마법의 역사에 획을 그으신 가주님께서······.”
“죄송하지만,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
“구본이 형님을 만나면, 잘 대접받았다고 할 테니 하실 말씀 있으면 간결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빠직.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났다.
한성은 속으로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사람이겠지만, 지금의 한성에게는 쉬운 사람이다. 이 사람의 모든 행동은 ‘한구본’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오니까.
“······말은 조금 조심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은 정연의 ‘성(城)’입니다.”
“아차차. 그렇군요. 저랑은 너무 친해서.”
놀리는 건 이쯤에서 마쳐야 할 것 같았다.
슬슬 호감도 수치가 내려가려고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한구본 가주님께서 제가 구역주가 되면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한구본님의 아량은 역시 하해(河海)와 같으십니다.”
한성의 말이었다.
필요하다면 이 정도 아부쯤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아하하. 역시 그렇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저에게 [비상 지원 요청권]도 주셨으니까요. 아, 제가 이 요청권을 쓰려면 한구본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안현태님에게 연락드리면 될까요?”
“아하하하하하. 가주님께서 절 총애하시는 것은 맞지만, 그 요청권은 가주님께 직접 연락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하하하.”
그의 기분은 완전히 풀렸다. 아니, 풀리다 못해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호감도는 말도 못 하게 쭉쭉 올랐다.
옆에서 하얀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 이상해······.”
“괜찮아. 나쁜 아저씨는 아니니까.”
한성은 슬슬 용건을 꺼냈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드한’씨를 영입하기 위해서입니다.”
드한은 영국인으로 [정연]의 가문에 소속되진 않았지만, ‘계약’ 관계에 있는 [대가]다. 그렇기에 한성이 홀로 쏙 빼 나갈 순 없는 법.
먼저 드한을 영입하고 한구본과 거래해서 빼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안현태를 작업하면 더 쉬울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안현태 집사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여쭤보고 싶네요.”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는 우리 정연과 계약 관계이기에······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도 정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런 거군요. 그럼 안현태 집사님께서는 도와주기 힘드시다······는 거군요.”
한성은 살살 건드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자리를 마련하는 것뿐입니다. 설득하시는 건 직접 하셔야 할 겁니다.”
좋다.
원하는 말이 나왔다.
애초부터 직접 나서서 도움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런다고 움직일 사람이 아니니까. 한성은 정연의 ‘허락’이 필요한 거였다.
“그 말은, 제가 직접 설득한다면 드한씨가 저희 구역과 계약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 건가요?”
“······일단은 가주님의 인가가 필요합니다.”
드한의 영향력은 게임 시작 초기인 지금도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시를 재설계한 본인이기도 하며, 이 도시의 신경망 전체의 메인 건축을 맡은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한 인재라는 것.
정연이 그런 그를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결국, 도와주는 것도 안 되고, 허락도 안 된다는 말이군요. 안현태 집사님의 권한이 겨우 이 정도뿐인 줄은 몰랐습니다.”
“······만약 드한님을 완전하게 설득한다면 계약을 ‘공유’하는 것에선 제 권한으로 충분할 겁니다.”
“아하, 그런 방법이! 역시 안현태 집사님은 한구본 가주님께서 총애하시는 인재답군요. 그 유능한 인재를 ‘빌려줄’ 권한까지 가지고 계시다니!”
“아하하하. 이 정도는 별것 아닙니다.”
참 단순한 사람이다. 물론, 한성이 한구본과 친분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왔다면 어림도 없었을 거다.
이래서 인맥이 좋다.
수조 짜리 비약을 몇 개나 넘겨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건 거의 거저다.
이제 드한을 설득하러 갈 시간이다.
한성은 안현태에게 간이 계약서를 받았다. 만약 드한이 허락한다면 [31번 구역이 안정화 될 때]까지 [원하는 곳에서] 일 할 수 있다는 계약서.
이 문구를 넣기 위해 또 30분은 실랑이. 아니, 아부했다. 다루기 쉬워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 * *
검은 땅의 동쪽엔 [용혈]의 땅이 있다. 산맥을 기준으로 [블랙 바실리스크]와 [드래고니안]이 서식하며 그들은 마계족조차 건들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강함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며, 마계족도 접근하지 못하는데 인간이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드, 드래고니안이요!?”
영국인 드한은 유창한 한국어로 되물었다.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검은 땅에 있는 사람 대부분도 드래고니안의 힘을 잘 모른다.
블랙 바실리스크와는 다르게 강한 힘을 가지고도 산맥에서 조용히 서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의 시간]이 되어 마수와 마족이 그들의 서식지를 건드릴 때가 있다. 그럴 땐 드래고니안들이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다.
그 장면을 목격한 몇몇.
그게 상위 포식자의 [피어] 때문인지, 직접 본 광경에서 온 두려움인지는 모른다. 하얀이의 정체를 알고 쓰러진 아르헨이 그러했으며 몇몇 영웅들이 그러했다.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드한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컸다.
드래고니안은 그 자체로 두려운 존재이지만, 아주 간혹 나오는 그들의 비늘, 발톱, 이빨 등은 아주 희귀한 재료에 속한다.
그들은 현세에 존재하는 그 어떤 [용혈]보다 ‘순수한 드래곤’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인간보다 비상한 지능과 ‘아룡’들 보다 월등한 드래곤의 신체까지 보유했으니까.
“으악. 이상한 아저씨야!”
드한이 다가가자 하얀이가 한성 뒤로 숨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마력으로 밀어버렸겠지만, 한성이 앞에 있기에 숨기만 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드한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가끔 드래고니안을 길들였다는 소식이 들려오긴 했지만, 그게 사실인 줄은 몰랐습니다. 출처가 튜브라길래······ 관종의 어그로인 줄만 알았죠!”
“뉴스도 안 보나요?”
“그런 거 볼 시간이 어딨습니까. 이 땅에서.”
“하긴.”
“그것보다, 한 번 보여줄 수 없겠습니까?”
“아직 직접 보는 건 안 됩니다.”
한성은 그러면서 품에서 하얀이가 1개월 차에 벗겨졌던 비늘 한 조각을 꺼냈다. 어렸을 때는 몇 개월, 몇 년 간격으로 비늘, 발톱, 이빨 등을 갈곤 한다.
한성은 그것을 다 모아뒀다.
탈피 때 벗겨지는 비늘은 아주 얇아 투명할 정도다.
“우오오오! 비늘. 그것도 아주 어린 드래고니안의 신선한 비늘이군요!”
드한은 간혹 이렇게 과할 때가 있다.
“······이상한 아저씨야!”
“미안하다. 하얀아. 이런 사람 앞에 데려와서.”
“아니야······ 이곳엔 이상한 사람들이 많네.”
둘이 대화를 하는 사이, 앞에서 드한이 비늘을 이리저리 만지고 냄새 맡고 망치로 두드려보기도 했다.
“대단해요.”
“이런 거 만져 본 적 없죠?”
“······예전에 마기에 젖은 드래곤 비늘은 만져 본 적 있습니다. 거의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지만요.”
“그럼 그것도 모르겠네요.”
“무엇을요?”
“용혈의 비늘은 마기에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네? 그게 무슨······.”
“죽은 드래곤의 비늘은 오염되죠. 하지만 살아있는 드래곤의 비늘은 절대로 오염되지 않습니다.”
그게 용혈을 지닌 [블랙 바실리스크]와 [드래고니안]이 검은 땅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이유이자, 모든 생물체가 용혈을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또.”
“꿀꺽.”
“······아니, ‘꿀꺽’을 말로 하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크흠.”
“하여튼, 블랙 키리윰엔 숨겨진 기능이 있습니다. 그게 권능을 지닌 존재의 부산물. 그 중에 용혈의 비늘과 만나면 효과는 어마어마하게 증폭되고요.”
“네?”
당연히 알지 못할 거다.
아직 제대로 된 비늘조차 구할 수 없는 게 지금 시점이니까. 블랙 키리윰도 마족을 통해 간접적으로 구하는 게 아닌 이상 보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니까.
한성은 비늘을 하나 작업대에 올려두고, 품에서 블랙 키리윰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이번 습격 때 마족을 죽이고 얻은 물건이었다.
“잘 보세요.”
이럴 땐 말로 하는 설명보단 보여주는 게 최고다.
블랙 키리윰을 녹여 제대로 된 회로를 구성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당장 일회성 효과를 위해선 옆으로 붙여 놓기만 해도 된다.
한성이 마법진을 구성했다.
주변으로 수십 개의 작은 마법진이 올라왔다 사라졌다. 서로 맞물리기도 하며 하나의 시스템을 이뤘다. 고난이도의 마법진이었지만, 이미 한성에겐 수백 번도 더 했던 습관과도 같은 작업.
“완성했네요.”
- 블랙 키리윰의 숨겨진 기능을 세계 최초로 찾았습니다!
- [블랙 키리윰 활용의 선구자]
- 블랙 키리윰은 매개체로 연결된 특정 재료에 잠재된 권능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 업적을 이뤘습니다.
- [역사] 등급 업적입니다.
-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단한 발견입니다!
[권능의 전달자(준보물)]
설명 : 순수한 드래고니안의 비늘이 중심이 된 ‘권능의 전달자’이다. 용혈의 권능인 [가드니스의 권능]이 담겨 있다. 블랙 키리윰의 구성이 완전하지 못하여 내구가 상당히 약하고 권능의 완전하게 뽑아낼 수 없다.
* 가드니스의 권능 출력 : 34%
* 가드니스의 권능 사용 : 3/3
* 재충전 시간 : 24:00:00
“여기 한 번 살펴보세요.”
사실 한성도 놀랐다.
아무리 하얀이의 비늘을 사용했다고 해도 [준보물]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정말 아주 소량의 정성도 들이지 않고 대충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
드한은 넋을 잃었다.
설명을 또 읽고 또 읽었다.
한성은 최면을 걸듯이 조용히 말했다.
“이런 거 만들어 보고 싶어요?”
“······네.”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그래, 이거다.
“블랙 키리윰, 드래고니안의 비늘. 원 없이 쓰고 싶죠?”
“······네.”
“당신은 바보죠?”
“······네.”
“그럼 저랑 계약하시죠. 지장을 막 찍고 싶죠?”
“······네.”
한성은 미리 작성해 온 계약서를 쓰윽 내밀었다. 드한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아니, 의식이 없는 걸까? 하여튼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자, 이제 게임은 끝났다.
* * *
양산박(梁山泊)
호걸들이 모이는 곳이라 하며 스스로 완연한 격에 오르며 [전설] 등급의 격을 지니고 [신화의 태동]을 시작한 자들. 그들의 목적은 [신화]의 업적이며 이 검은 땅에 자리 잡은 마계족을 멸(滅)하는 것이다.
그들은 검은 땅 가장 깊은 곳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가끔 외곽 도시에 나오기도 한다.
그들도 인간이다. 먹을 것을 구하거나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가끔 술을 먹으며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
새로운 양산박의 식구를 찾아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흐으음.”
높은 하늘. 그 위에서 두 명이 남녀가 31번 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그냥.”
“왜 쓸만한 사람 있어? 그쪽엔 칼뿐이 없을 텐데.”
“칼은 너무 늙었지. 성장의 여지도 없고.”
“그러니까. 왜?”
“······시험을 한 번 해볼까 해서.”
“······그러니까 누굴!”
“넌 요즘 튜브도 안 보냐.”
“그런 거 볼 시간이 어디 있냐. 게다가 스마트 워치는 허구한 날 마기에 삭아서 돈 아까워 죽겠는데.”
“그런 것 좀 봐라. 저기 새로운 구역주가 릴리스의 신격을 흡수했단다.”
“잉? 전설에 든 격이라도 되나. 그래도 꽤 오래 고생할 텐데.”
“후보생이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한 번 시험해보자고.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만약 그가 찍었던 영상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면. 영상 조작의 이능이나 천하의 사기꾼이 아니라면, 양산박이 원하는 인재일 것이다.
< 공략이란 이런 것이다.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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