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행운은 만렙이다-63화 (63/200)

< 지금 필요한 것은.(4권 시작) >

한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31번 구역 전체를 훑어보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한성은 검은 땅에 온 적이 없었으니 31번 구역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처참할 정도로 다른 도시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었다.

집들은 그저 상처 난 콘크리트로 대충 지은 것들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31번 구역은 마수와 마족들의 습격이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정말 난감하네.”

31번 구역은 모든 게 구역주의 소유이다. 집, 땅, 건물, 발전시설, 수도시설까지 말이다. 몇몇 상위 격을 지닌 이들만 자신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한성과 일행이 지낼 구역주의 시설.

3층짜리 노출 콘크리트에 지하로 1층. 주변으로 널찍한 공터가 존재한다. 몇 번 무너졌던 것인지 공터엔 훈련장이 지어졌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후.”

이 정도면 한성이 마법으로 건들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아무리 영웅과 용병들이 많아도 시설이 이따위면 있는 힘도 없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앞으로 이곳은 검은 땅에 퍼져나갈 정복자의 수도가 될 곳이 아닌가.

한성 없이 이곳이 홀로 설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건 두 가지 요소다.

첫 번째, 블랙 키리윰.

일단 ‘둥지’를 제거해 마기를 몰아내며 산맥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최진현과 인부들이 그곳에서 광산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이것으로 방벽의 뼈대를 만들고 도시의 신경망을 만들 거다.

두 번째, 건축술의 대가.

세상엔 수많은 이능이 존재하고, 이종칠처럼 구울 제작, 이강철처럼 대장장이. 또한, 건축에 치중된 이능과 재능을 지닌 사람이 있다.

블랙 키리윰은 아무나 다룰 수 없다. 장인, 명인, 대가 등의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중요한 건 시간 배분이다.

다음 피의 시간이 오기 전, 다음 습격이 일어나기 전에 준비를 마쳐야 한다. 그리고 피의 시간이 끝나면 바로 공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한성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2일에 불과했다.

*  *  *

“······생각보다 재미있는 구역주군요.”

한성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피자를 집어 한입 크게 물며 대답했다.

“솔직히 그 진한 마기만 아니면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이지 않습니까?”

“모두가 합심한다면야.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이번에 블랙 오크 단원 두 명을 거의 보내버렸으니 그쪽에서도 협력하지는 않을 것 같군요.”

“괜찮을 겁니다. 블랙 오크 용병단장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으니까요.”

“누군지 압니까?”

한성은 대답 없이 웃어 보였다.

피자 가게 주인장이자 31번 구역 치안대장인 칼. 칼은 한성에게 생맥주 한 잔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이건 서비스. 결투 깔끔하게 해 줬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결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가게 벽이나 보호해주는 것이다. 결계 안쪽의 테이블, 의자 등의 기물은 완전히 부서졌어야 맞다는 거다.

“이거 참 맛있네요.”

한국에서 먹던. 그러니까 며칠 전 흑연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던 피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맛도 좋지만, 이 검은 땅의 냄새와 함께라는 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성은 서리가 낀 생맥주 잔을 들어 벌컥 들이마셨다.

그때, 옆에 누가 앉으며 외쳤다.

“칼! 여기 생맥 한 잔.”

“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오랜만입니다. 블랙 오크 용병단장 안톤.”

“뭐야, 그 어색한 이름 언급은.”

“옆에 소개할 겸.”

둘은 친했다. 한성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저는 새로운 31번 소유주인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수다. 어린 양반이 벌써 격을 얻었어?”

“그렇게 됐네요.”

“나참. 내가 살다살다 신격을 잡아먹는 인간은 또 처음 보네.”

키는 2m가 넘어갔고 1리터 맥주잔이 작아 보일 정도로 덩치가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지만 실상은 50이 넘은 나이였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뭐, 일단 우리 단원들이 실수한 건 사과하겠네.”

“그럼 마다하지 않고.”

“크하하하. 시원하니 마음에 들어.”

한성은 칼을 보며 웃어 보였다.

일단 분위기는 좋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하지만 둥지를 파괴하기 위한 협력은 또 다른 일이다.

한성은 피자 한 조각을 마저 삼키며 천천히 계획을 설명했다.

“저는 가장 가까운 둥지를 제거할 겁니다.”

[블랙 오크]라는 용병단은 검은 땅에서 아주 유명했다.

가장 많은 수의 격을 지닌 용병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벨리스에 종속된 용병 중에 90%는 이 용병단에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

그 수가 무려 1천에 달한다.

이유는 많다.

악신 중에선 가장 악(惡)에서 멀다는 것. 오벨리스는 ‘전투’만이 유일한 욕망이고 그렇기에 종속에 휘둘리는 일도 별로 없다.

또한, 악의 신격에 종속되면 보통 [계약]으로 얻는 힘에 비해 1.5배는 강해질 수 있으며 마기에 ‘적응력’ 또한 생긴다.

오벨리스는 다른 악의 신격보다 ‘적응력’ 상승 폭이 컸고 육체 관련된 이능이 크게 강화된다.

물론, 적응력이 생긴다고 침식이 없는 건 아니다. 악의 신격에 종속되었어도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맥에서 활동할 여력은 충분하다.

“그래서, 지금 알리스의 둥지를 털겠다는 말이군. 허허. 이거 자만인 건지 자신감인 건지.”

알리스라는 귀족급 마족.

귀족급 마족 주제에 [전설]에 이르는 격을 지닌 강한 마족이다. 신격에 이르진 못했지만, 이곳에서도 칼이나 겨우 감당할 수 있는 격의 수준이다.

게다가 둥지엔 수천의 마족, 그보다 더 많은 마수가 서식하고 있다.

한성이 아무리 신격을 잡아먹었다지만, 아주 일부의 격을 업적 상성으로 인해 겨우 성공한 것. 지금 한성이 S등급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알리스를 잡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원래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 업적이라는 게 생기는 거다.

“알리스는 제가 맡을 겁니다.”

“······자만이었군. 무식한 건지.”

안톤은 그렇게 고개를 돌렸다.

한성은 그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거군요.”

“뭐?”

“양산박. 그들을 만날까 두려운 거지 않습니까.”

“······네가 뭘 안다고······!”

한성은 아주 잘 안다.

안톤은 10년 전, 기르가고스의 둥지를 공략하다가 위험에 빠진 그를 구해줬던 게 바로 양산박의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종속된 이들을 혐오한다. 그때도 안톤과 그의 휘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둥지를 부수기 위해 움직였던 것뿐.

안톤은 그때 경험했던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리고 혐오가 가득 담긴 눈빛. 그것들로 인해 가슴 속 깊이 두려움이 자리 잡아 버렸으니까. 그때 이후로 산맥 혹은 둥지에 접근조차 하지 않은 게 그 증거다.

“알리스의 둥지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걸 줘야 할 때다.

“······?”

“10년 전, 그들이 버리고 갔던 세르비체. 그녀가 그곳에 잠들어 있을 겁니다.”

쾅!

안톤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한성의 멱살을 잡았다.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격이 방출되며 한성을 압박했다.

“그녀는 죽었습니다.”

“······너 뭐야.”

“하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뭐?”

“구할 수 있습니다.”

안톤은 눈빛이 흔들렸다. 그 거대한 몸집에 저토록 떨리는 눈동자라니, 한성의 멱살을 잡은 손의 힘이 서서히 풀렸다.

“알리스는 귀족급 마족이며 전설급의 격을 지닌 녀석입니다. 그녀는 마왕을 꿈꾸고 있었고 수많은 인간을 사로잡아 화신체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화신체.

성시연이 그렇게 변했고 돌아왔다.

안톤도 안다. 그 정도 정보를 모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세르비체. 안톤의 ‘딸’은 다르다.

“······그런 정보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 해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중요합니까?”

“······.”

“제가 안 경로가 확실하지 않다면, 안 갈 겁니까?”

가야 한다. 그게 거짓이든 진실이든. 함정이라고 해도 가야 한다. 안톤은 평생 그 죄책감을 가슴에 지닌 채 살아왔으니까.

“만약, 만약 그 정보가 사실이라고 해도. 구할 방법은 없어.”

화신체가 되고 격이 자리 잡게 되면, 알리스라는 그 마족의 정신이 화신체를 완전히 점령하면 구할 방법은 없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누가 와도 안 돼.”

한성은 그의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편하게 쉴 수 있게 육체를 없애주던지, 40%의 확률로 백치가 되고······ 살리더라도 일부 기억을 잃을 수 있는 치료를 강행하던지.”

잔인하다.

그가 가고 안 가고의 선택지는 없다. 그녀를 편하게 눈감게 하려면 어차피 가야 하니까. 그는 그녀를 화신체로 둘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한성은 안톤을 끌고 가야 했다.

“정말 가능한 거냐.”

“가능합니다.”

한성은 확신했다.

어렵다. 무지하게 어렵고 필요한 재료도 많다.

하지만 한성은 안톤을 안다.

“······알았다.”

“선택은······ 마지막 순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안 지는 묻지 않겠다.”

“······.”

“하지만 그녀가 그곳에 없으면, 너는 죽는다.”

“······.”

“그리고 내 딸은 내 손으로······ 재운다.”

“알겠습니다.”

10년 전 상처를 꺼내 칼로 짼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없다. 안쪽에서 생살을 파고들던 고름을 빼주기 위함이니까.

평생 안고 가야 했던 죄책감과 미련을 말이다.

한성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블랙 오크 용병단엔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주변 구역에 활동하는 100여명의 격을 지닌 용병을 모았고 안톤 스스로도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해피머니 용병단은 물론 성시연, 헤일렌까지 둥지 공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훈련과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주 [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움직일 계획이다.

한성은 하얀이만 데리고 움직였다.

제 28번 구역으로.

[피의 시간]까지는 하루가 남았고, 공략까지는 2일이 남은 거다.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한성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구본의 [정연]이 지배하는 구역이며, 한성의 31번 구역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28번 구역이다.

곳곳에 블랙 키리윰과 강철로 올려진 거대한 방벽이 보였다. 블랙 키리윰은 아주 희귀한 금속이기에 방어 마법진과 포탑 마법진을 잇는 신경망에만 소량으로 쓰였다.

“엄청나요!”

“그렇지?”

“우와, 대박이다. 어떻게 저런 신경망을 구성한 거죠? 마법진도 대단하네요. 저는 어림도 없고······ 아빠가 하면 한 달은 걸리는 거 아니에요?”

다른 이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한다. 세계 최상위에 있는 정연의 마법사 수백 명이 수년을 작업한 국가급 회로 신경망을 가지고 한 달이라니······.

하지만 하얀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뭐, 못할 건 없지.”

“우와, 역시 아빠에요!”

하얀이는 벽을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한성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다. 그 규모와 정교함. 그리고 이 회로 신경망 구성에 갈려 들어갔을 인력에 말이다.

‘영혼까지 갈렸겠지.’

요즘 기사에 마법사의 노동 착취라는 타이틀이 뜨곤 한다. 공밀레, 공밀레. 마법 공대생들의 희생을 애도한다는 댓글이 가득 찬 모습을 보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정문에 다가가자 수십 개의 카메라가 한성과 하얀이를 스캔했다. 그리고 곧이어 한성의 신분이 나온 것인지, 꽤 강해 보이는 문지기가 허리를 숙였다.

“31번 구역주님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정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경비대원들이 한성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성은 그저 어린 후보생이 구역주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쿠웅.

옆에 작은 문을 놔두고 방벽을 가르는 거대한 문을 연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왕이면 조용히 다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한구본이 어떤 식으로 한성에 대해 말해 놓은지 몰라도, 그들은 이 정도에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31번 구역주, 이한성님이 입장 하십시다!”

“제 31번 구역주, 이한성님이 입장 하십시다!”

“제 31번 구역주, 이한성님이 입장 하십시다!”

문지기 한 명이 그렇게 외치자, 방벽 위의 경비대원들이 똑같이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은 도시 안까지 퍼져나갔다.

“미친.”

“와아, 아빠 유명해?”

“······.”

한성은 하얀이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튜브에선 유명하지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 않은가.

거대한 문이 열리고, 한성이 발을 내딛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군악대와 영웅들이 좌우로 서서 길을 만들었다. 또, 마법으로 급하게 깐 건지 모를 레드 카펫이 중심까지 길을 놓았으며 하늘에선 벚꽃잎으로 보이는 분홍빛 잎이 떨어져 내렸다.

“······하아.”

한구본. 이 사람을 정말.

원래 좀 여러모로 과한 사람이긴 했다. 마음에 안 들면 죽이고, 약간이라도 위협이 되면 죽인다. 하지만 또 은혜를 입은 사람은 과할 정도로 보답하곤 한다.

하지만 한구본이 직접 이런 지시를 할 사람은 아니고, 분명 밑에서 과한 충성심을 지닌 사람이 오해한 거겠지.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극진하게 대접해라.’ 정도의 명령이었겠지만, 그것을 ‘성대하며 모자람 없이 극진하게 모셔야 한다.’로 받아들일 만한 사람.

“후······ 나중에 복수해줘야겠어.”

한성이 아무리 관종이라도 이건 좀 과하지 않은가.

게다가 저 중앙의 으리으리한 성엔 갈 생각조차 없었다.

조용히 [대가]를 만나 영입할 생각뿐이었는데.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한성은 진정한 관종이 뭔지 보여주기로 했다.

한성은 드론 카메라를 양옆으로 날렸다. 그리곤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나머지 손은 높이 들어 올렸다.

한성은 [관종의 삶]까지 활성화하며 손짓 하나까지 예술로 승화했다.

“우와아아아!”

반응을 보니 한성을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곳은 31번 구역에 비해 훨씬 안전한 도시였으니까. 아마 31번 구역에서 한성이 찍었던 영상을 봤을 수도 있겠다.

하긴, 확실히 그 격을 막지 않았다면, 이곳도 멀쩡할 순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짜릿한데?

“크흠······.”

한성은 빠르던 발걸음을 한층 늦췄다.

< 지금 필요한 것은.(4권 시작) > 끝

ⓒ [동주]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