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의 태동. >
“저런 미친놈.”
아르헨은 그렇게 외쳤다.
진짜 저건 말도 안 되는 미친놈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저 소년이 릴리스와 마주했을 때, 릴리스의 거대했던 격은 줄었고 소년의 격은 증폭되었다. 그가 한 발 한 발 다가갈 때마다 릴리스는 위축되었고 뒷걸음질까지 쳤다.
“······뭐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상황.
검은 땅의 검은 하늘이 요동쳤다.
방대한 격의 분출에 주변의 마수와 마족은 한 줌의 재로 사라졌으며 둘이 선 곳은 다른 곳보다 한 뼘은 낮아져 있었다.
그가 릴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울부짖었고 소년은 웃었다.
아르헨은 소름이 끼쳤다. 옆에 있던 피터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내가 보는 게······ 꿈은 아니겠지?”
“······아니지.”
“저······ 놈은 뭐지?”
“······내가 어떻게 아냐.”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쓸데없는 말을 해 봤다.
피터는 평소와 똑같이 무뚝뚝하고 조용했다.
릴리스가 소년을 공격했다.
소년이 당할 거라 생각했다.
아르헨의 생각은 당연했다. 소년의 능력치는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수치가 보인다는 게 아니다. 움직이는 걸 보면 어느 정도인지 안다.
반면에, 릴리스의 화신체는 [귀족]급 마족의 육체였다.
소년이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소년이 가볍게 휘두른 검에 릴리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팔이 잘렸다. 분명 누구든 피할 수 있을 것 같이 느리고 가벼운 검이었다.
다음도 마찬가지다.
릴리스가 날개를 휘둘렀는데, 오히려 그녀의 날개가 떨어졌다.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날개와 두 팔. 두 다리까지 베어내고 그녀의 복부에 검을 꽂아 넣었다.
바로 죽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고통을 극대화했고 비명을 지르게 했다.
그 비명만으로 아르헨의 속이 진탕될 정도로 강력한 격이었다. 분명 릴리스는 약해진 게 아니다. 하지만 저 소년 앞에서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약하다.
“······업적인가.”
하지만 저런 업적은 들어본 적도 없다.
신격에 적용되는 업적이라니.
아르헨도 비슷한 건 있다.
[마수의 학살자], [마족을 불태우는 자] 등등.
그렇기에 이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죽음을 피하고 그 많은 마수와 마족을 학살할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신격을, 그것도 릴리스를 상대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소년은 릴리스를 죽였다.
그리고 그곳에 떠오른 신격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뭐, 뭐야. 저 미친놈!”
아르헨은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저대로면 죽는다. 아무리 괴상한 방법으로 릴리스를 죽였다고 해도 신격을 버틸 수 있는 몸이 아니다.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런 전력을 죽게 둬선 안 된다.
* * *
수많은 문구가 한성의 눈 앞을 가렸다.
- [긴급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 완벽한 클리어입니다!
- [릴리스를 사냥하는 자.]
- [역사] 등급의 업적입니다.
- 릴리스를 사냥하는 자, 당신은 완벽한 사냥꾼으로서 릴리스를 사냥감으로 만들었습니다. [격]의 수준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릴리스는 당신에게 영원히 도망쳐야 할 것입니다.
원하던 업적이 만들어졌다.
한성은 앞으로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릴리스를 추격할 거다.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신격을 갉아먹을 것이다.
- 업적을 이뤘습니다!
- [신격 사냥꾼]
- 등급 판정······.
- [전설] 등급으로 판정되었습니다.
- 아주 오래전 존재했던 [신격 사냥꾼]이라는 이명이 다시 빛을 찾았습니다. 당신은 그 어떤 신격을 만나더라도 사냥꾼의 포지션을 잡을 수 있습니다.
- 단, [격]의 수준이 맞아야 합니다.
또 하나의 [전설] 등급 업적이 만들어졌다.
이 업적은 앞으로 한성에게 어마어마한 힘이 될 거다. 이후, 한성이 진정한 [격]을 얻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운이 정말 좋았다.
지금이 아니면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얻을 수 없었을 거다.
낮은 능력치, 희미한 격,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기도 전인 이른 시점. 릴리스라는 거대한 신격. 이 모든 게 하나가 되어 [전설]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가는 거니까.
- [전설을 걷는 자]가 갱신되었습니다.
- 앞으로 당신은 스스로 이야기한 전설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과거이자 미래인 운명(運命)입니다.
- 업적 :
* 역사 등급 : 5/10
* 전설 등급 : 2/3
이제 한성은 [전설]의 격에 한층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한성은 눈앞에 떠 있는 [릴리스 신격의 일부]를 바라봤다. 보통 이런 신격은 온전한 [격]이 있어야 아주 일부만이 흡수할 수 있다.
[격]이 없다면?
한성은 버틸 수 없다.
하지만 한성은 신격을 잡아 삼켰다.
꿀꺽.
화륵.
순간 전신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한성의 영혼에 [릴리스의 신격]이라는 불이 붙은 거다. 신격은 격 낮은 영혼을 잡아먹는다.
영혼은 재가 되어 사라지고.
육체는 붕괴한다.
그게 정석이다.
하지만.
『 나는 과거에서 태어난 자. 』
처음 릴리스를 상대할 때.
한성은 도박을 했다.
전 회차에서 얻은 이명들, 그곳에서 쌓은 전설과 신화를 재현했다. 확고한 믿음과 한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성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규칙을 정하는 [역행 마법]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거짓이라도 완벽하게 믿으면 진실이 된다. 허풍뿐인 업적이라도, 수많은 사람이 칭송하면 그는 위인이 되고 전설이 된다.
그렇기에 전 회차에 [영웅의 업적을 갈취한 희대의 사기꾼]이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기도 했고, [배 곪는 이들의 등을 처먹은 자]라는 놈이 [배 곪는 이들의 구원자]가 되기도 한다.
업적이란 스스로 행한 일보다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다.
한성은 그곳에서 가능성을 봤다.
그런데.
‘릴리스의 반응은 달랐다.’
한성이 알기로 [용살자]이니 [신격 사냥꾼]이니 하는 이명은 한성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전 있었던 신격이라 생각했다.
한성이 모르는 이명이 있었다?
아니다.
그런 신격이 있었다면 한성이 전 회차에 그 이명을 얻었을 때 알았을 거다. 그렇다고 게임이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무작위성이 있다고 하지만 없던 신격이 생겨나진 않는다.
‘이 게임은······ 아니, 내가 갇힌 세상은 전 회차와 연결되어 있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성은 충분했다.
중요한 단서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성은 역행 마법을 이어갔다.
『 신격 사냥꾼이자. 』
우우웅.
한성의 격이 반응한다.
‘과거’와 이번에 얻은 ‘신격 사냥꾼’이 연결되었고.
『 릴리스를 사냥한 자. 』
우우웅!
새로운 업적이 또 연결된다.
『 그것은 오래전 잃었던 나의 격. 』
화륵.
그의의 영혼을 태우던 신격의 불이 꺼지고.
한성의 격이 신격을 태우기 시작한다.
[업적]이란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한성이 행한 행동. 그리고 그것을 본 이들의 시선과 생각. 그것은 영혼에 기록되고 직접적인 힘이 된다.
그런 것들이 쌓여 하나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그것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한없이 깊어지면 [전설]이 된다. 그리고 그 전설이 누적되어 경이(驚異)를 담게 되면 그것은 [신화]가 된다.
『 나는 신격을 먹는 자. 』
화르륵!
그것을 마지막으로 릴리스의 신격은 사라졌다. 온전히 한성의 영혼에 스며들었으며 격에 더해졌다.
- 업적을 이뤘습니다!
- [신격을 먹는 자]
-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뤘습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신격의 일부를 섭취했으며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 업적 등급 판정······.
- ······. ······.
- 기이한 [운]이 영향을 끼칩니다!
- [전설] 등급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성은 정신을 잃어가는 과정에도 웃을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시작하고 끊임없이 원했던 결과였으며, 앞으로 밟아야 할 가장 큰 고비이기도 했다.
- [전설을 걷는 자]가 [신화의 태동]으로 갱신되었습니다.
-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거대한 신화의 태동이 시작됩니다! 그 중심에는 플레이어 ‘이한성’이 존재하며 앞으로 모든 행보에 [신화]가 깃들 것입니다.
- 업적 :
* 역사 등급 : 5/20
* 전설 등급 : 3/7
* 신화 등급 : 0/5
- 당신은 [역사]를 뛰어넘어 [전설]에 도전했습니다.
- 그리고 이제는 [전설]을 뛰어넘어 [신화]에 도전합니다.
- 업적을 이뤘습니다!
- [처음으로 걷는 길]
-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업적입니다. 당신은 아무도 걷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 [역사] 등급입니다.
- [신화에 도전하는 인간]
-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역사]를 써내려갔으며 [전설]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신화의 탄생]에 도전합니다. 앞으로 모든 신격이 당신을 주시할 수 있습니다.
- [전설] 등급입니다.
한성은 그것까지 보고 쓰러졌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 그를 받았다.
* * *
“진짜 할 거야?”
“······응. 하고 싶어.”
한별의 물음에 진훈은 끄덕이며 말했다.
한성은 검은 땅으로 가기 전에 선물을 전해주고 갔다.
한 가지는 휴대용 훈련용 중력장이라는 거다. 높이 1m짜리 원통 형상으로 30평 정도의 땅에 중력장을 적용하는 물건인데, [중력]이라는 게 그렇듯 수백억은 가뿐하게 나가는 고가의 물건.
거기에 한성이 직접 업그레이드까지 해 줬기에 그 성능은 최고였다.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강원도 화악산에 있는 던전이라······.”
한성은 한별과 진훈에게 던전 하나를 알려줬다. 그곳엔 상급 마족이 보스로 있고 여러 마수가 일반 몬스터가 상주하는 A등급 최상급의 던전.
검은 땅에서 기다리겠다.
강해지고 싶다면, 와라.
대신, 그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할 만한 실력이 된다면.
“멋지잖아!”
진훈이 동그란 눈으로 외쳤다.
“······뭐가?”
“그 눈빛! 어디 따라올 수 있다면 따라와 보라는 그 시선. 대박이야. 처음부터 그런 친구인 건 알았지만······.”
한별은 그런 진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이상한 거에 한 번 빠지면 걷잡을 수 없다.
“거길 꼭 가야겠어?”
“응, 갈래. 난 아직 약하니까.”
“하아······.”
한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훈은 끔찍한······ 아니, 기억해선 안 될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건 검은 땅과 연관이 있다. 그곳에 가면 당연히 기억이 살아날 거고, 버틸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언제까지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기억을 되찾는다면 진훈은 버티지 못할까?
악신(惡神)의 영향에서 멀쩡할 수 있을까?
한별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대신 한 달만 훈련하자. 진짜 죽도록.”
“역시! 알았어. 그 정도는 해야지 던전에 도전할 수 있는 거겠지.”
“······응, 그래.”
한별은 이런 거 하나하나에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 * *
길이현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성이 검은 땅으로 가면서 벌여놓은 일들.
[마기 정화의 비약]의 경매.
[마기 저항 포션]과 [수호의 위성] 판매.
하루에도 수십 명의 길드, 가문, 정부의 관계자를 만난다. 그들이 제시한 조건 리스트를 보며 면담을 통해 이번 달 판매자를 정한다.
“다음 들여보내세요.”
길이현은 미간을 주무르며 피곤이 덕지덕지 뭍은 표정으로 비서가 안내한 다음 손님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길이현 상무님.”
“오호, 반갑습니다. 홍지현 부회장.”
길이현의 짧은 호칭에 홍지현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인생이란 참 묘하다.
상무와 부회장. 물론 나이는 같고 영웅 동기이기도 했지만, 라이벌인 우전 그룹에서의 위상은 그녀가 높다. 게다가 재벌 후계 모임에 나가면 으스대며 시비 걸기 바빴던 홍지현이다.
그런데 이젠 이렇게 숙이고 들어온다.
“······잘 부탁드립니다.”
홍지현이 억지로 고개를 숙이는 게 보인다. 앞으로 쏟아진 머리칼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억울하다는 표정이 생생하다.
‘아우, 꼬셔라.’
길이현은 쾌감에 몸부림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조건은······ 마기 저항 포션 100개와 수호의 위성 10개의 판매를 6천700억 원. 거기에 미국 유통권의 사용······ 중국 던전의 공동 공략······ 검은 땅의 PMC 사업권 일부 양도.”
길이현은 조건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미 돈 자체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다른 조건 하나면 수천억의 이익이 돌아오니까. 게다가 한성이 원한 것은 돈이 아닌 줄 세우기다.
“마음에 안 드네요.”
“응? 아니······ 어떤 게 마음에 안 드시나요?”
“뭐, 그냥.”
“······끄응.”
당장이라도 폭발할 거 같은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든다.
홍지현은 능글맞은 표정에 본심을 숨기는 타입, 길이현은 차가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서로 만났을 땐 본연의 표정이 나오곤 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투닥거리며 싸우며 이어진 인연 때문인지도 몰랐다.
길이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 표정. 마음에 드네요.”
“······네?”
“대신 조건 몇 개만 바꿉시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길이현은 씨익 웃으며 몇 가지 ‘딜’을 했다. 모두 한성에게만 이득이 가는 거래였지만, 길이현은 홍지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 신화의 태동.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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