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뷔전. >
성시연은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홀로 쉬고 있을 때였다.
문득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전에는 없었던 ‘본능’이라는 감각. 손발이 저리고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 위험하다는 경보가 마구 울렸다.
쾅-!
순간, 천장이 뒤집혔다.
하늘이 훤히 보이고 그곳에 어둠이 가득 차기 시작한다.
다행히 [흑연]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결계에 한성이 직접 손을 보면서 더 단단해진 결계다. 그게 누구라도 쉽게 뚫을 순 없다.
하지만 상대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밤의 존재?”
게다가 한 번 봤던 인물도 있었다. 한성과 처음 만난 날, 카지노에서 한성의 목을 베려 했던 ‘벤토’라는 인물.
성시연도 그를 안다.
이미 유명한 악(惡)의 존재였으며, SS등급이라 추정되는 강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곳의 결계가 아무리 강해도 상대가 SS등급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저 [격]이라는 것을 뛰어넘어 스스로 완전한 격에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쾅-!
사방이 진동했다.
그 단단한 결계는 물결치듯 출렁였으며 건물의 기둥과 지반은 줄기줄기 갈라진다. 강한 격의 요동에 먹구름이 몰려든다. 거대한 [격]은 기후까지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익숙하지?”
성시연은 원래 어둠에 익숙했다. 이능으로 그림자에 숨어 이동할 수 있으며, 그 이능 덕에 어둠 저항도 있다.
그런데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성시연이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휘릭.
결계 전체를 감싸던 ‘어둠’이 한낱 먼지 바람처럼 휩쓸려 나간다.
우뚝.
결계 위의 ‘벤토’와 그의 휘하들은 그 자리에 멈췄다.
당황한 것이다. [마력 기관]이라는 게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벤토가 직접 뿌린 [어둠]을 이렇게 쉽게 없앨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벤토는, 그 모습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성시연은 그 웃음에 소름이 쫙 끼쳤다.
“젠장할.”
쾅-!
그들은 며칠 굶은 사냥개마냥 침을 질질 흘리며 결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해체도 아니고 부수는 거다.
“저 미친놈들.”
[흑연] 가문 내에 상주하는 인물은 아무리 강해 봐야 S등급이 한계다. 그 이상의 무력을 지닌 사람은 어머니인 소이연이고 몇몇 강자는 검은 땅에 가 있다.
이곳에서 성시연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
쾅-!
와장창!
결국, 결계가 깨졌다.
벤토는 하얗게 웃으며 홀로 성시연 앞에 내려왔다. 다른 이들은 성시연을 지키기 위해 몰려든 이들을 막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반쯤은 여성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더욱 소름 끼쳤다.
성시연은 날개를 펼치고 뿔을 한계까지 뽑아냈다. 언제든 방어하고 틈이 있으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미친 변태 새끼.”
“크흐흐흡. 그렇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여자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그 말이 더 무서웠다.
성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야. 이한성은 건들지 마라.”
성시연은 왜 그따위 말이 나갔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만약 저런 변태가 한성을 건들면······.
“끄아악. 상상해 버렸어!”
“······한동안 격을 얻고 내 상대가 될 만큼 성장할 때까지는 그냥 둘 거니까. 맛있게 익을 때까지······ 흐윽.”
그는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불룩해진 고간을 부여잡으며 이상한 신음을 냈다.
“기다리기 힘들지만······, 지금까지 잘 기다렸으니까.”
“······이거 상상 이상으로 미친 새끼네.”
벤토는 이제 말을 더 할 생각이 없는지, 성시연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성시연은 당장이라도 반격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고양이 앞 생쥐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성시연의 명치로 다가왔다.
휘익.
콰아아아앙!
찰나, 무언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무언가 벤토의 얼굴에 닿았다. 벤토는 황당한 표정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으며 그곳엔 경멸스럽다는 눈빛을 한 익숙한 얼굴이 내려왔다.
“한성!”
“이 미친 새끼가. 어디로 손을 갖다 대?”
그건 한성이었다.
극도로 화가 난 그의 모습에 성시연은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아래서 어둠이 뭉글뭉글 뿜어지더니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 냈다.
콰아아앙!
성시연은 그 순간 재빠른 판단으로 순수한 마기를 뿜어내며 한성을 감싸 안았다. 아무리 한성이 강하다고 해도 이 어둠에는 본인의 마기가 적합하다.
하지만 그런 방어에도 그들을 위로 튕겼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한성과 성시연이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을 정도로 벤토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둘의 앞을 막았다.
“크흐흐, 나에게서 도망칠······.”
벤토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뒤에서 따가울 정도로 강력한 살기와 기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감히 내 딸을 건드려?”
“돈값은 충분히 해야지.”
“······전 돈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충분한 값을 치르긴 하겠습니다.”
그곳엔 소이연, 한구본, 심우주가 허공에 떠 있었다. 마력을 이용한 고난이도의 응용법이었다.
“도망쳐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한성은 그렇게 말했다.
마음 같아선 여기서 잡아버리고 싶은 악역이다. 잡으려고 시도도 할 거고, 하지만 도망치는 것에 있어선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 능력을 지닌 캐릭터다.
벤토는 한순간 검은 연기로 사라졌다.
뭘 해보기도 전에 말이다.
아주 빠른 판단이었다.
“뭐, 아쉽지만.”
“······.”
한성은 어쩐지 조용한 성시연을 바라봤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왜 그런지 봤더니, 한성이 성시연의 손목을 잡고 있었던 거였다. 한성은 황급히 손을 놨지만, 눈앞에 세 명은 이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흐뭇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웃음이랄까.
괜히 어색했다.
* * *
한성은 정리를 시작했다.
어차피 아카데미의 이번 학기는 없다. 한성에게 최소 3달 정도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당장 자퇴할 필요는 없어진 거다.
한성이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성시연이었다.
“난 검은 땅으로 떠날 거야.”
“······거길? 왜?”
“해야 할 일이 있어.”
단순히 성시연과 연결될 수 있는 릴리스가 전부는 아니었다. 필요한 인재를 찾아 친해지고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 여러 신격을 사냥해 한성도 격을 쌓아가는 것.
할 일은 아주 많다.
“굳이 지금 가야 할 필요가 있어?”
“응, 지금 가야 해. 더 끌어봤자······.”
주변 친구들이 위험해진다는 말은 못한다.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상관없다고 할 게 분명했다.
“······나는?”
성시연이 보랏빛 눈동자로 한성을 바라본다.
턱. 숨이 막힌다.
그녀의 꿈틀거리는 입술. 촉촉한 듯 또렷한 그녀의 눈빛은 한성의 심장을 꽉 잡아 버린 것 같았다.
한성은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다.
성시연을 데려가야 하나.
데려간다면 같이 올까.
같이 가면, 그녀의 안전은 장담할 수 있을까?
성시연은 아직 뿔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고 눈동자와 검은 피부가 된 다리도 숨기지 못한다. 서울에서 활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검은 땅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더 안 된다.
사람들은 마수와 마족이라면 치를 떤다. 게다가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영웅들이 악의 신격에 종속되어 미쳐가는 것을 두 눈으로 겪었던 사람들.
당연히 성시연은 배척당할 거다.
그곳에선 ‘흑연’이고 뭐고 없다.
“나도 데려가.”
“······안 돼.”
바로 안 된다고 하지 못했다.
“그럼 나 혼자 갈 거야.”
“위험해.”
“난 항상······ 위험했어. 내 삶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었다고.”
“모든 사람이 널 배척할 거야.”
“최소한 여기보다 낫지 않을까?”
“······.”
한성은 더 말릴 수가 없었다.
같이 가고 싶었다는 말이 더 맞다. 그녀는 검은 땅에서 완벽하게 적응할 거다. 인간들 사이에 낄 순 없겠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성시연은 S등급 못지않은 힘을 낼 거다.
“······그럼 너희 부모님한테 허락받아야 하나?”
한성이 뜬금없이 물었다.
“······내가 애냐.”
“17살은 아직 애긴 애지.”
“너도 17살이거든.”
문득 죄책감이 올라온다.
한성은 서른 중반이다. 이제 34살이라는 거다. 그런데 저런 어린 미성년자를······. 아니다. 친구니까. 친구로서 함께 하는 거다.
한성은 그렇게 자위(自慰)했다.
* * *
한성은 여러 사람을 만나야 했다.
말없이 떠나고 싶진 않다. 돌아올 수도 있고 그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어차피 왔다 갔다 하면서 들릴 순 있겠지만, 한동안 이곳에 없는 건 분명하니까.
성시연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길이현이었다.
“······검은 땅이군요.”
“네, PMC에 물산 계열이랑 건설 계열······ 도움 좀 받을 수 있죠?”
“도움이라뇨. 당연히 해드려야죠.”
길이현은 자주 보게 될 거다.
31번 구역은 다른 도시보다 훨씬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자주 무너진다. 방어벽은 물론이고 도시 안의 기반 시설까지.
그걸 한성 홀로 감당할 순 없다.
“저에겐 큰 기회입니다.”
길이현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검은 땅은 위험하다. 특히, 제대로 격도 얻지 못한. 게다가 세력 또한 없는 이한성이 소유하게 될 31번 구역은 더 위험하다.
그곳을 보호해 줄 세력도 없으며 무력도 한참 부족한 상태. 하지만 길이현은 믿었다. 이한성이 별생각 없이 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들.
“완전히 정비할 겁니다. 아마 제현 그룹만으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이요.”
“······세운 줄을 이용할 때군요.”
“네, 줄리아 마틴. 그리고 우전 그룹에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
길이현은 갸웃했다.
우전 그룹은 제현 그룹과 라이벌이며 경쟁 구도에 있다. 이런 거대한 매출이 나오는 사업은 끼지 않아야 한다. 줄리아 마틴의 마틴 사도 이한성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일단 그건 그렇게 해 주시고, 영웅 협회에도 인맥을 만들어 놓는 걸 추천합니다.”
한성의 머릿속에선 큼지막한 계획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검은 땅에서는 쉽게 할 수 있다.
한성은 길이현과 헤어지고 다른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기 시작했다.
이종칠을 만나 한동안 구울 제작에 집중해 달라고 했으며 대장장이 이강철에게 재료 몇 개를 건네며 호감도를 올렸다.
후보생 친구들은 한 명씩 만나서 선물을 전달했다. 무기 혹은 훈련용 아이템을 말이다. 이미 [마기 저항]도 생겼을 테니, 정말 거칠 것 없이 성장할 거다.
한성은 검은 땅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 * *
[아프리카 제 31번 구역, 방어벽 1번 소초.]
아프리카는 검은 땅으로 불린다. 마수의 피와 영웅들의 피가 땅을 적셔 검게 변했기 때문이고 전쟁에 불타오른 영혼이 승천하지 못하고 검은 땅을 떠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도 여지없이 깜깜하네.”
“들어 와, 이제 금방 [피의 시간]이 시작될 거 같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 검은 땅엔 붉은 피가 흐른다.
마수와 마족들은 피에 취해 이성을 잃고 날뛴다. 인간 또한 다르지 않다. 악의 신격에 종속된 이들은 마족과 다름없이 이성을 잃게 된다.
이럴 땐 종속되지 않는 이들이라도 밖을 나가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것보다 요즘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마수들 말이야. 평소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꽤 생겼단 말이야.”
“항상 똑같은 것만 오겠냐. 가끔 다른 것도 오는 거지.”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마족도 말이야. 이 지역에 있는 게 아닌 추운 지역에서 내려온 것도 보여. [설인] 같은 거 말이야.”
“음······ 그건 좀 이상했지.”
경비대원 둘은 점점 붉게 변해가는 하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빛이 내리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게 된다.
정면에 보이는 산맥과 계곡에서 무엇이 튀어나와 이곳을 공격할지 모른다. 그런데 방어할 병력도 없다. 대부분이 종속된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몇몇 종속되지 않은 영웅들이 있지만, 그들만으론 다수의 적을 막을 전력이 되지 않는다.
“에라, 이 구역을 누가 샀다던데.”
그는 도시 중앙에 건설된 게이트를 보면서 투덜거렸다. 몇 주 전부터 이 구역의 새로운 주인이 온다며 주변 도시에서 전력을 빼 갔다.
“이러다가 우리 다 털리면 어떡하냐. 걱정돼 죽겠다.”
“듣기로는 일개 후보생이라는데, 도대체 뭔 자신감에 이 구역을 산 건지.”
“빌어먹을, 우리도 뒤로 빠져야 하는 거 아니야?”
이곳의 경비대원은 B등급 아래의 월급쟁이들이다.
이들은 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마기를 지닌 마수와 마족과 직접 싸우는 건 S등급 이상만 참여하기 때문이다.
A등급도 원거리 공격이나 보조만 한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가 몬스터 등장하면 보고만 잘하면 돼. 나머지는 영웅들. 그리고 저 위에 ‘포수’들이 잘 싸우겠지.”
방어벽 위엔 [레일 건]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다른 도시에 비하면 저렴하고 허름한 무기였지만, 보조로써 큰 역할을 한다.
그으으.
“응? 무슨 소리지?”
두두두두.
둘은 저 멀리 산맥과 산맥 사이의 계곡을 바라봤다. 검고 누런 땅이 미약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내 그 진동은 점점 커지고 멀리서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제, 젠장. 하필 오늘······!”
쾅.
- 웨에에에엥!
빨간 비상벨을 강하게 내려치자 31번 구역 전체에 경보음이 울린다.
하지만 경비대원 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저건 못 막는다.
콰과과광!
몇몇 마수가 거대한 검은 파이어 볼을 날렸다. 바위로 만들어진 방어벽 곳곳이 불타오르며 검은 마기가 피어오른다.
콰과과과!
아래로는 근접 마수가 달려들어 방어벽을 물어뜯고 할퀴며 위로 올라오려 난리다. 앞에 같은 마수를 밟고, 뒤에서 또 밟히며 방어벽을 오른다.
뒤늦게, 수십 명의 영웅이 방어벽 위로 올라와 마법을 난사하고 이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 못 막아.”
경비대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때, 그들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휴우, 데뷔 한 번 쌈빡하게 하겠네. 그렇죠. 여러분?”
< 데뷔전.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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