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을 서시오. >
한성과 친구들의 역할은 그게 다였다.
일행이 강원 공항을 보호하며 아크 리치를 처리하는 사이, 강원도에서 발생한 게이트 사태는 빠르게 진화되었다.
수만에 이르는 몬스터. 마기에 침식되어 더 강력하고 흉포해진 괴수들은 건물이며 사람이며 가리지 않고 파괴했다. 그것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하지만 한국은 그보다 강력했다.
전 세계 어떤 도시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은 도시가 한국의 강원도다.
강원도의 영웅들과 군은 게이트가 생성되자마자 에워싸며 방어선을 형성했다. 모든 길드와 기업. 그리고 정부까지 하나가 되었다.
그 덕분에 시민들의 피해는 적었다.
하지만 그것도 습격 규모에 비해 적었다는 거다. 못해도 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말이 실종이지, 실종이면 몬스터 뱃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 10대 길드 중 3위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녹지의 성(城)] 길드의 길드장인 이예린은 [화악산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가진 SS등급의 영웅이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랭킹으로 따지면 전 세계에서 30위 권에 있는 강자.
그녀가 게이트를 직접 부수며 강원도는 안정을 되찾았다.
[마지막 게이트가 무너지고 30년 만에 등장한 게이트!]
[강원도의 게이트, 검은 땅의 그것과 비슷했다.]
[최소한의 피해로 진압한 한국의 저력.]
[1만 명의 사망자, 승리인가 패배인가.]
[어떠한 전조인가, 다시 대전쟁의 시대가 도래하다?]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아직 인류와 몬스터는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도시에 몬스터가 출몰하는 것은 당연하고, 몇몇 안전하다는 도시조차도 몬스터로 인한 사망자는 존재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지전이 벌어지며, 세계 곳곳에선 영웅과 몬스터의 전쟁은 끊이질 않는다.
아직도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선 대전쟁의 시대다.
하지만 이 게이트는 또 다르다.
[검은 땅]은 현세의 지옥이라 불린다. 그곳에 있는 게이트가 도시에. 그것도 한국 제 2의 수도라 불리는 강원도에 나타났다는 것은 아예 다른 이야기다.
한동안 언론은 그 이야기로 시끄러울 것이다.
* * *
“감사합니다. 정말. 그리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제현 PMC 상무실.
한성은 길이현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둘뿐이 아니다. 길이현의 옆에는 길성현도 있었다.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이한성님. 앞으로는 무슨 말이든······.”
“누나! 이한성님이라니!”
“누나가 뭐니, 회사에서. 상무님이라 불러.”
“상무님! 그래도 그건······!”
“누가 손님 앞에서 큰 소리를! 조용히 안 해?”
“······끄응.”
길이현과 길성현의 관계다.
길성현은 괜히 분해서 한성을 째려봤다. 한기 풀풀 날리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길이현의 호통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이미지를 가진 ‘능력남’ 길성현인데, 누나 앞에서만 서면 현실 남동생이 되어 버린다.
모든 캐릭터는 고유의 공략 방법이 있고, 길성현의 루트는 길이현이다.
“죄송합니다. 이한성님. 아직 철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죠.”
“아, 그것보다 그때 사용한 소모품이 값은 제가 치르겠습니다.”
그때 만들었던 소모품을 어느 정도는 회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성이 과한 마법을 사용한 것이고. 그런데 방어가 지속되면서 B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계속 등장했고, 아크 리치를 상대하면서 소모품은 모조리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버렸다.
“아닙니다. 뭐, 상급 마력석 가격만 잘 쳐 주면 됩니다.”
“요즘 상급 마력석 물량을 구하기 힘들어요. 마기 정화의 비약을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라······ 하지만 어떤 수를 써서든 최대한 확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길이현은 한성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한성은 필요한 걸 얻기 위한 자리였다.
우연히 길성현이 이곳에 있었고, 길이현이 나가라고 했지만, 길성현은 자기도 알아야 한다며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한성이야 좋다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길이현과 한성의 관계를 보여줄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그것보다······ 그 소모품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길이현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눈이 반짝였다.
그건 길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룹을 위하는 마음은 있다고······.’
길성현은 악(惡)으로 점점 치우쳐진다.
그 중심에는 줄리아 마틴이 있었지만, 가장 큰 역할은 한 건 가족의 죽음이다.
부모와 장남의 죽음에 길이현은 [동결(凍結)]을 얻고 [냉혈의 마녀]라는 이명을 얻으며 대한민국을 아귀(餓鬼)처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운이 좋은 건가. 동결이 이번에 개화했다.’
이건 앞으로 제현 그룹의 방향을 결정할 큰 계기가 될 거다. 한성의 의도대로 길이현을 선(善)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문제는 길성현이다.
길성현은 부모님과 형인 길장현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족과 [직접 계약]을 맺는다.
중도라 생각했던 길성현은 반마(半魔)가 된다.
자기보다 월등한 재능을 지닌 별과 훈을 이기기 위한 삐뚤어진 시기(猜忌)였으며 검은 땅에서 마족 사냥꾼이라 불렸던 양산박(梁山泊)을 넘기 위한 결심이었다.
또, [영웅]이라는 존재가 부모와 형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여러모로 길성현은 악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인데, 옆에서 줄리아 마틴이 마족과 연결도 해주고 양산박과의 갈등에서 꼬드기는 역할까지 한다.
‘부모님의 죽음을 막는다면 악(惡)으로 빠지지 않을까?’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성은 마음먹는다면 못할 건 없다. 하지만 길장현을 두고 부모만 살릴 순 없다. 셋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죽게 되니까.
‘길장현은 안 돼.’
길성현의 형이자 현 부회장인 길장현은 거의 ‘벤토’급의 악역(惡役)이다. 감정 공감 능력이 제로에 가까운 ‘사이코패스’니 말 다했다.
그가 회장직을 장기집권하게 되면, 한국은 마족에게 가장 빨리 점령당하고 만다.
어떻게든 제현 그룹은 길이현의 손에 들어가는 게 맞다.
그 상태에서 길성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저기, 이한성님?”
“아, 네. 몇 개는 팔 생각이 있긴 합니다.”
제현 그룹을 키우면서 특허료를 받는 건 꽤 중요한 일이다. [마기 정화의 비약]으로 조 단위의 돈을 벌게 되겠지만, 그 정도 돈은 금방 쓴다.
지금 상급 마력석을 사는데도 수천억이 훅 나가는데, 나중에 S등급인 최상급 마력석이나 보물 등급 이상의 재료를 구할 때는 얼마나 많은 돈이 나가겠는가.
한성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제대로 만든 AT······ 아니, [수호의 위성]입니다.”
전 회차에선 [AT 필드]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했다. 일단은 튜버이기에 남이 만든 회로를 쓰려면 만든 사람이 정한 이름을 써 주는 게 예의다.
튜버 본인은 신경 쓰지 않지만, 해당 튜버의 팬들이 몰려와 분탕질 치는 것 때문에 생긴 관례였다.
“상급 마력석 하나가 들어가고, 여기 겉을 두르는 링은 금입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마력석 표면엔 빽빽한 회로로 들어 차 있었고, 주변은 허공에 뜬 상태로 천천히 회전하는 금색 링이 있었다.
한성은 감정한 스펙까지 넘겼다.
물론, 이름은 바꾼 상태였다.
[수호의 위성(희귀)]
설명 : 물리 및 마법 공격을 감지해 최적의 상성 방어를 하는 자동 방어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다. 해당 장비는 주인을 인식한 후, 공간의 파편 속에 숨어있다가 공격을 감지한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 충전율 : 100%(자동 충전)
길이현과 길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품위는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입은 떡 하니 벌어져 있고 손가락은 덜덜 떨렸다.
“이, 이건······.”
“엊그제 애들이 쓰던 것보다 한 단계 위의 물건입니다. A등급 공격은 3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고, S등급은······ 당연히 힘들 거고요. 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출력은 달라질 수 있어요.”
한성은 일부러 ‘금’을 사용했다. ‘미스릴’ 혹은 ‘아다만티움’처럼 보물급에 드는 재료를 사용했다면 S등급의 공격도 한 번 정도는 막을 [보물] 등급의 물건이 나왔을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막 뿌릴 생각은 없었다.
“참고로 이건 한 달에 딱 하나씩만 팔 겁니다.”
돈을 벌려면 여러 개 파는 게 났다. 하지만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선 슬슬 줄 세우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냐고?
저 작은 마력석과 링에 [자동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공격의 형태, 속성, 방향, 거리, 힘, 종류 등을 판단해 알아서 최적의 방어를 행하는 것.
거기에 자동 충전까지 있다.
당연히 현재 이 세계관에서는 구성할 수 없는 물건이고, 따라 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료는 간단하지만, 차원이 다른 회로 실력 때문이다.
즉, 한성만 만들 수 있으며, 아티펙트 등급으로 따지면 [보물] 급에 드는 성능을 지녔다는 거다.
A등급의 공격을 몇 번 막는다는 것. S등급의 공격을 막진 못하지만, 0.1초 정도의 시간을 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목숨을 여분으로 가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길이현이 겨우 진정한 상태로 한성을 바라봤다.
“줄 세우기를 할 예정이십니까?”
한성에 대한 존댓말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길성현도 지금만큼은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재능 있는 마법사라고, 이 물건의 진가를 알아보는 거다.
“네, 일단은 경매에 하나를 내놓고, 다음부터는 비슷한 가격으로 특정 길드나 기업을 선정해 하나씩 파는 것으로 하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만약, 길성현의 성장을 돕고 제현 그룹이 무너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어 준다면. 거기에 줄리아 한성의 손에 넣는다면.
달라질까?
길성현을 죽이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제현 그룹과 적이 된다고 생각하면 어렵진 않고, 오랜 시간 계획하여 실행한다면 제현 그룹과도 적이 되지 않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다 함께 가고 싶기 때문이다.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동료가 되는 것.
가능할까?
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길이현이 나온다는 걸 만류하고 길성현을 바라봤다.
“너.”
“······?”
“나한테 빚 하나 진 거다.”
강원 공항에서 길이현을 구해준 것과 제현 그룹과 함께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이야기다.
한성은 그 말을 끝으로 제현 PMC 건물을 나왔다.
‘천천히 만들어 나가 보자.’
왜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한성은 하나의 캐릭터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놈도 참 불쌍한 놈이니까.
* * *
“이제 중간고사네.”
세계가 떠들썩하든 말든 아카데미의 시계는 움직였다. 후보생과 강사 중에서도 사망자는 있었다. 강사는 지원을, 후보생은 잠시 고향에 갔던 친구였다.
하지만 수업에는 지장이 없었다.
후보생은, 간혹 주말 던전에 갔다가 죽어서 오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여기 토스트입니다.”
헤일렌이 만든 토스트다.
한성에게 큰 것을, 하얀이에게 작은 것을 줬다.
고소하고 단 냄새가 맛있게 풍긴다. 안에 계란, 케첩, 양상추, 얇게 썬 사과 등이 들어 있다. 소소 팁이지만, 토스트에 설탕 대신 사과를 넣으면 훨씬 맛있다.
“앙.”
평상시랑 용의 폼을 한 하얀이는 뜨거운 토스트를 덥석 물었다. 어찌나 맛있는지 꼬리를 부르르 떤다.
한성도 한 입 했다.
역시 맛있었다.
아무래도 헤일렌은 요리 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전에 먹던 기계로 만들어진 요리보다 훨씬 나았다.
“시험 일정이 어떻게 되지?”
헤일렌이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회로학, 기초 마법, 검술의 기초, 레이드, 구울의 활용, 영웅의 소양. 그리고 몇 가지 실전 시험과 대련.
딱히 신경 써야 할 건 없다.
이번 시험부터 순위를 빠르게 올려 10위 안에 올라가는 게 목표다. 하지만 이런 시험은 한성에게 문제가 될 수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게 없는데 인터넷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대련.
“한 번에 10위권까지 올라가려면······ 진훈이나 한별.”
혹은 3위인 길성현과 대련해서 이겨야 한다.
길성현이야 같은 마법 계열이기에 어려울 건 없다. 하지만 이 진훈이나 한별은 쉽지 않다. 장비 혹은 어떠한 외부의 도움 없이 순수한 육체로 싸워야 하니까.
게다가 이번 대련은 진훈과 친해질 좋은 기회다.
“육체 능력을 더 키워야겠네.”
아무래도 진훈은 육체 전투를 좋아하기에, 한성도 육체 혹은 검술로 그를 꺾거나 대등하게 싸우는 게 친밀도를 올리기 좋다.
“아니, 호감도를 올리는데 대련을 해서 이겨야 한다는 게 말이야 방구야.”
하긴, 성시연의 암살 데이트. 나디아의 마조히즘. 길성현의 누나 공략(?). 안혜림의 인간 사냥. 한별의 아버지 공략(?).
이런 것들보다는 훨씬 평범한 편이긴 했다.
여러모로 캐릭터 하나하나가 개성이 뚜렷하고 공략 방법이 다른 게 이상하긴 했으나 이게 이 게임의 매력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디아도 공략을 시작해야 하고.”
한성에게 관심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호감도를 일정 수치까지 올려야 오래 떨어져 있더라도 한성을 등지지 않을 거다.
“한성님, 중요 연락이 몇 개 있습니다.”
[마기 정화의 비약]의 경매가 가까워질수록 연락은 점점 많아졌다. 말로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에서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치고 있는데 한성은 뜸을 들이는 중이었다.
더 맛있는 밥을 위해선 기다림이 필요한 법이니까.
“일단 정연부터 연락을 해볼까?”
“연결하겠습니다.”
한구본이 직접 받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겠지, 어차피 상관없다. 오늘은 약속만 잡으면 되니까.
정연, 흑연, 언더월드에 연락해 모두 약속을 잡았다.
“······한성님.”
헤일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성을 불렀다.
이제 감정이 조금씩 생기는 모양이다.
“왜?”
“그래도 괜찮습니까?”
“뭐가.”
“······그 세 분을 같은 곳에서, 동시에 본다는 거······ 아니십니까?”
“흐흐. 맞지.”
[마기 정화의 비약(55%)]는 세계 경매를 치를 거고, [마기 정화의 비약(20%)]는 줄 세우기 용으로 만들어 팔 거다.
이번에 저들과 거래하려는 것은 [마기 정화의 비약(35%)]하나와 [아크 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이용해 만든 새로운 아이템이었다.
이 정도면 세 명에게 한성이 원하는 걸 얻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일단 그건 만나서 생각해 보고, 오늘은 튜브나 확인하자.”
엊그제의 생방송으로 인해 한성의 튜브는 완전히 달라졌다. 조회수와 구독자는 폭발했고, 후원도 어찌나 쌓였는지 한성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거기에 인지도 포인트까지.
정리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 줄을 서시오.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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