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혈(龍血)이란. >
한성은 정신을 잃었다.
과도한 힘을 사용했고 전신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듯 공허했다. 검과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움직인 마력, 이능에 소모되는 정신력 등. 뭐 하나 빼놓지도 않고 모조리 뽑아냈으니까.
원래 이곳에서 이렇게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공간이 담긴 포션 병을 사용하면 더 쉽게 이길 수도 있었다. 적에게 정보가 알려지면 그 순간 효용을 잃겠지만, 오늘만큼은 어떻게 쓰더라도 압도적인 효율을 보여줄 테니까.
그런데 안혜림의 특성에 휘말려 버렸다.
그녀의 [도살자]라는 인격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었다. 특히 전장에서 그녀와 함께라면 그 어떤 것보다 든든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니까.
한성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한성이 전 회차에 겪었던 것과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운의 영향인지. 완벽한 조교··· 아니, 공략의 영향인지.’
원인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 안혜림은 천천히 한성의 사람이 되어 갈 테니까.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이 게임은 일반적인 RPG나 스토리 게임이라고 하기엔 [육성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것 같다.
“어후, 머리야.”
한성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콰아아앙!
바닥에서 올라오는 진동에 몸이 흔들렸다. 한쪽 눈을 겨우 뜬 한성에게 보인 것은 거대한 결계에 막혀 수많은 몬스터에게 공격당하는 친구들이었다.
S등급 한도석과 이정현은 적으로 보이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상대방도 S등급인지 둘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한성은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플랜 B로 돌렸구나.’
이 메인 시나리오에서 테러리스트의 움직임은 몇 가지로 나뉜다.
이렇게 완벽하게 공략당하고 [고대 기간트의 심장]마저 얻지 못했다면 열에 아홉은 기숙사를 공격한다. 후보생이라도 죽여야 뒤를 봐준 기업에 할 말은 있으니까.
“일어나 보긴 해야 하는데.”
몸이 정상이 아니다. 이걸 곧바로 정상화하려면 하급 엘릭서 정도는 있어야 한다.
- 인지도 포인트 : 1,200
전에 4,000포인트를 바로 어제 사용했다. 그런데도 벌써 1,000포인트가 넘게 모였다. [중급 랜덤 포션 박스] 하나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
어차피 1,000포인트로 하급 엘릭서를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 못해도 30,000포인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운을 믿는다.”
하급이라도 엘릭서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한성이 저 결계를 해체하고 직접 기숙사까지 가서 공략을 진행할 수 있다.
- [중급 랜덤 포션 박스] 1개를 구매하였습니다.
- [중급 랜덤 포션 박스]를 사용합니다.
툭. 도르르르.
박스가 돌아가다가 뚜껑이 열린다.
- 잭팟!
- [운]이 플레이어의 상황에 반응합니다!
- [하급 드래곤 진정제]
“응······?”
플레이어의 상황에 반응했다면서, 이건 도대체 왜 나온 것일까.
한성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기숙사를 향했다.
쿠우우웅.
쿠우웅.
“아.”
그제야 알았다.
왜 이게 필요한지.
그때, 다급하게 한성을 부르는 헤일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폴 홀렌드는 50명에 달하는 A 혹은 B등급의 용병들을 이끌고 아카데미 기숙사로 향했다.
큼지막한 아파트 단지를 연상시키는 이 [한국 영웅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규모와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단위 마법 방어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해체 시작한다.”
S등급 마법사인 ‘제임스 린’. 그 옆에는 ‘동쪽의 마법 사냥꾼’으로 활동하는 마법사의 천적 ‘샤오링 룽’이 폴 홀렌드와 동행한 상태였다.
둘은 미리 챙겨온 장비와 함께 방어진 해체를 시작했다. 아무리 S등급에 이른 초인이라도 이 정도 규모의 방어진을 해체하려면 특별한 ‘장비’ 없이는 반나절 이상은 걸린다.
“도대체 대회의장의 결계는 누가 해체한 거지?”
제임스 린은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렸다.
대회의장의 결계는 제임스 린이 1개월이나 걸려 직접 제작했다. 몸을 숨기기 위해서 옆에 폴 홀렌드의 이능까지 빌렸다.
이날을 위해서 S등급 둘이 뼈 빠지게 고생한 걸, 누군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해체해 버린 거다.
“한 시간이 뭐야, 거의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
린의 투덜거림에 폴 홀렌드가 대답했다.
“알고 있거든! 분명히 외부에서 뚫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한 4시간 걸려야 정상인데.”
“곧 알게 되겠지. 말은 후보생이라는데 그건 말이 안 되니까.”
폴 홀렌드도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다.
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도석과 이정현이 너무 이른 시간에. 그것도 아무런 피해 없이 대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치안대와 본부가 정상화됐고······.
폴 홀렌드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서 뭐하냐. 빠르게 치고 빠지자. 금방 되지?”
“당연하지 이런 장비가 있는데, 30분 안에 못하면······ 어후! 화난다. 도대체 누구야? 정말 결계에 대한 사전 정보 없고, 아무런 장비도 없이 그 시간에 해체했다면 SS등급은 돼야 한다고.”
“그만하고 거기에 집중해. 누군지 몰라도 분명 정보와 장비가 있었을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 대화를 듣던 샤오링 룽이 입을 열었다.
“······뭔가 불안하다.”
“응? 넌 또 왜 그래?”
“그러게. 불안할 게 뭐가 있어. 한도석하고 이정현은 결계에 막혀있고 S등급 두 명이나 갔는데. 그것도 둘 상성 딱 맞춰서.”
샤오링 룽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식스센스]라는 특성이 있다.
제 여섯 번째 감각.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특성.
샤오링 그가 수많은 죽음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식스센스] 덕분임을 안다. 그렇기에 그 감각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상황까지 와서 후퇴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위험이 있으면 돌파하면 되는 일이니까.
“후, 다 거의 다 됐다. 한도석 쪽. 뚫리진 않았지?”
“어, 아직 완벽해.”
제임스 린이 마지막 회로를 흐트러뜨리자 기숙사 전체를 감싸고 있던 방어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안 보이던 하늘에 반투명한 돔이 거둬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작전을 시작하자.”
“오케이. 1층 점령은 내가 간다.”
아무리 [한국 영웅 아카데미]. 즉, 세계에서 알아주는 천재들이라도 후보생일 뿐이다. 실전 경험도 없는 애송이들. 등급으로 따지면 이제 겨우 D등급이나 됐을까.
이쪽은 50명에 불과한 인원이었지만, 이 넓은 기숙사 단지를 점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특히, 제임스 린의 활약은 단연 최고였다.
자존심이 잔뜩 상한 제임스 린는 대단위 프리즌 마법을 발현하면서 기숙사 단지 바닥 전체와 각 기숙사의 1층까지 모조리 얼려버렸다.
숨어서 대기하던 몇몇 강사, 경비대 등은 아무것도 못 하고 죽어버렸고 기숙사에 숨어있던 후보생들도 심각성을 눈치챈 것인지 난리가 났다.
그래도 최고의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3학년으로 보이는 몇몇 후보생들이 무리를 지어 멀리 나타났다.
“후훗. 애송이들. 하나씩 차근차근 죽여주지.”
제임스 린이 앞장섰고 폴 홀렌드와 샤오링 룽은 뒤를 따랐다. 세 명의 S등급 영웅이다. 굳이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적당하게 해도 되겠어. 아직 결계도 안 부서졌고 한도석하고 이정현도 잘 붙잡고 있다.”
“다른 S등급 영웅은?”
강사를 말하는 거다. 그 둘을 빼고도 4명의 S등급 영웅이 더 존재한다.
“이곳으로 오는 모양인데, 우리면 충분해.”
이미 전력은 파악한 후다.
그들은 이제 거칠 것 없다는 듯 사냥을 시작했다.
몇몇은 기숙사를 폭파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빠져나가는 영웅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들은 작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 아니, 변수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세상엔, 알았을 때 너무 늦어버린 일이 있는 법이다.
쿠우우웅.
“응?”
제임스 린은 근처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충격에 고개를 돌렸다.
쿠우우웅.
“기숙사 내려앉는 소린가? 폭발은 해도 기숙사가 무너지진 않을 텐데.”
크아아아아.
뭔가 거대하면서도 어린 듯한 포효.
그 순간 제임스 린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언젠가 느꼈던 공포였으며,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최상위 포식자의 존재감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폴 홀렌드였다.
“끄으윽.”
폴 홀렌드는 입에 거품을 물고 몸이 고꾸라진다. 무어라 말하려 하지만, 이미 정신을 잃기 직전이다. 끔뻑거리던 눈은 금세 정지해 버렸다.
제임스 린과 샤오링 룽은 그 모습을 보곤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럴 리 없어. 여기에 왜······?”
“준비해라.”
그들은 안다.
폴 홀렌드와 계약한 신격은 [하늘 위의 중재자].
이명은 ‘용의 비늘을 갈취한 자’라는 것.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용(龍)의 신격과 계약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하늘 위의 중재자]의 비늘을 갈취하며 삐뚤어진 방법으로 S등급에 올랐다.
본래 반쪽짜리 S등급에 불과해야 했다.
하지만 [하늘 위의 중재자]의 힘은 보통 신격이 아니다.
현재 밝혀진 최상위의 신격이자 [신화]에 다다른 규격 외의 신격. 그렇기에 폴 홀렌드가 얻은 힘은 대단했다. 이 셋 중에서도 가장 강했고 [황혼의 늑대]에서도 최고위를 다투는 실력자 중 하나.
그런데 그런 그도 약점이 존재했다.
“······드래곤.”
“드래곤까지는 아니겠지.”
폴 홀렌드는 드래곤의 저주를 받아, 용혈(龍血)을 지닌 무언가의 앞에 서면 한없이 약해진다. 보통은 빈사상태에 빠지고 진정한 드래곤 앞에 서면 즉사할 수도 있다.
크아아아앙.
그 용혈은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울음이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살짝 귀여워 보일 정도.
하지만 위엄은 그대로였기에 둘은 바짝 정신 차렸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본래 드래곤이라면 수십 미터는 가뿐하게 넘어가는 거대한 몸체와 꼬리. 그리고 하늘을 뒤덮을 날개가······ 있어야 하는데.
“꼬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것은 꼬마였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꼬마. 아주 귀엽게 생긴 소녀였다. 5살이나 되었을까. 작고 얇은 팔다리는 툭 하면 다칠 것 같이 여렸고 하얀 피부는 꼭 아픈 것처럼 보였다.
“크앙.”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작은 소리는.
“끄으으윽!”
폴 홀렌드의 팔다리를 뒤틀어 버렸다.
흠칫.
제임스 린과 샤오링 룽은 동시에 뒷걸음을 쳤다.
그제야 보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 순백의 작은 뿔 두 개. 등 뒤로 보이는 두껍고 통통한 하얀 꼬리.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황금빛 눈에 세로로 길게 갈라진 홍채.
용혈의 증거였다.
꿀꺽.
둘은 물론이고 50명의 용병 또한 움직일 수 없었다.
작고 귀여운 꼬마처럼 보이지만, 용혈의 강함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마존의 레드 드레이크의 왕 ‘아움브’가 그러했으며, 검은 땅의 블랙 바실리스크 족장 ‘데세르드’가 그러했다.
그것들도 용혈이 1%도 있지 않은 아룡(亞龍)에 불과하다.
인간의 모습을 한 용.
그것은 드래고니안 뿐이다.
용과 인간의 혼혈이며, 최소 용혈의 비율이 40%는 넘어가고 그 강함은 순수한 드래곤에 버금간다는 위대한 존재.
제임스 린은 머릿속에서 무수한 시뮬레이션이 그려지고 있었다.
‘드래곤. 용혈이 최소한 40%. 태어난 지 10년이 지나지 않았다면 승산이 있다. 하지만 저 위엄. 드래곤 피어는 보통이 아니야. 마법 사냥꾼인 샤오링 룽이 드래곤의 마법을 먹을 수 있을까? 내 마법은 통할까?’
드래곤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마법을 마스터한 상태다. 하지만 드래고니안은 다르다. 용혈의 비율에 따라, 그리고 부모의 [격]에 따라 모두 차이가 있다.
‘마법은 할 줄 알까? 이능은 뭐가 있을까.’
찰나의 시간, 수백 개의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이길 수 있는 2%
전멸할 확률 98%
[황혼의 늑대]라는 길드에서 S등급 3명을 잃는다? 상상도 하기 싫다. 세계 20위 권 안에서 순식간에 100위 밖으로 떨어져 버릴 거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광폭화 시키고 탈출한다.’
최적의 결과는 그거다.
드래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길들일 수 있는 확률은 0.00000001%도 되지 않는다. 0이 몇 개냐고? 모른다. 그저 불가능하다는 표현일 뿐.
그렇다는 건, 흥분만 시키면 아카데미의 절반은 가뿐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제임스 린은 0.1초도 되지 않는 순간.
[탈출 마법 세트]를 발현했다.
[연막], [결박], [방벽], [하이드], [메스 텔레포트], [블링크] 등등. 상대를 혼란 시키고 자신을 숨기며 팀원을 후퇴시키는 것.
한 번으로 수백억 원이 날아가는 초고가 아티펙트가 사용되었지만, 그 정도로 저 드래고니안의 눈을 속일 수 있다면 아주 싼 값이다.
일련의 과정은 빠르게 지나갔다.
사방이 번쩍거리며 시야가 차단되었고 제임스 린과 샤오링 룽의 모습은 수백 개로 불어났다. S등급 영웅의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다.
‘됐다.’
제임스 린은 폴 홀렌드와 샤오링 룽을 데리고 기숙사 단지에서 1km 밖으로 빠져나왔다. 동시에 폴 홀렌드의 품에서 [가루다의 미약한 힘이 실린 깃털 가루]와 [삼족오의 체취가 섞인 세계수 잎]으로 만든 [드래곤 흥분제]를 꺼냈다.
드래곤의 이성을 잃게 하는 약.
다행히 저 드래고니안은 이쪽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남아서 발버둥 치는 50명의 용병이 효과적인 미끼가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써야겠어.”
폴 홀렌드가 목숨을 담보로 모험하며 겨우 만든 ‘보험’이지만,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너무 체면이 안 선다.
뭐, 오늘 폴 홀렌드를 구해줬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제임스 린은 마법을 이용해 [드래곤 흥분제]를 날렸다.
< 용혈(龍血)이란.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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