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 >
한성은 퀘스트 진행 상태를 확인했다.
- 테러 인원 : 198명
- 습격 몬스터 : 780마리
- 희생자 : 69명
- 진행 시간 : 01 : 00 : 34
상당히 준수한 편이다.
1시간 기준으로 희생자 69명이면 모든 [세상의 끝] 플레이어를 통틀어 10명 안쪽에는 들 기록이다. 게다가 한도석이 더 다치기 전에 구해냈으니 시간이 갈수록 진압은 가속화될 거다.
한성은 안혜림과 대회의장 꼭대기로 올라왔다.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기 위함이다.
“헤일렌, 진 훈과 한 별의 위치는?”
- 치안대를 완벽하게 점령하고 다음 포인트인 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성시연 파티는 본부에서 강사 10명과 만나고 마법 물품 연구소로 이동 중입니다.
“그쪽은 안심해도 되겠네.”
그 정도 전력이면 충분하다.
그곳은 중심이 아니니까.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은 한성의 시야 끝에 있는 [무기공학연구소]다. 숨겨진 [보물] 등급 [고대 기간트의 심장]과 그것을 개량하고 있는 연구소장 ‘한지운’을 노리고 있다.
한성은 이것을 반드시 얻어야 한다. 그래야 적에게 강대한 타격을 주고, 한성의 육체를 한 층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니까.
“A등급 인물 1명, B등급 인물 4명이겠지.”
S등급은 다른 곳에서 강사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분탕질을 치고 있다. 문제는 한성을 포함한 3명 이하의 인원으로 [무기공학연구소]에 진입해야 한다는 거다.
혹여나 S등급 강사를 끌어들이는 순간 그들도 S등급과 A등급 인원이 달려온다.
한성은 안혜림을 끌고 [무기공학연구소]로 달렸다.
* * *
황혼의 늑대 소속 A등급 용병인 ‘조나단’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무기공학연구소]에 잠입했다.
곳곳에서 S등급과 A등급이 날뛰어주고 사방에 몬스터가 돌아다니니 아카데미 내 최고 보안 등급을 지닌 이곳도 뚫기 어렵지 않았다.
기본 경비 시스템을 무력화하고 상주하는 B등급 용병 10명을 가볍게 죽였다. 이후, 지하 5층까지 침입한 조나단과 일행은 두꺼운 유리 벽 너머 보이는 [고대 기간트의 심장]을 바라봤다.
“······어마어마하군.”
저거 하나 지키려 사방에 깔린 [대마법 방어진]에 [최고위급 보안 회로]는 재룟값만 수천억 단위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것도 이게 아카데미의 [무기공학연구소] 안에 있으니까 저 정도지 보통 다른 나라에서 저걸 보관하고 있다면 보안을 위해 한화(韓貨)로만 조 단위는 가뿐하게 넘어가지 않을까.
‘보물급 유물이라.’
100년 전 포자가 떨어지며 마력이 발현한 이후.
수천 년, 수만 년 전의 고대 유물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 틀림없는 그것들은 그저 등급의 위계를 뛰어넘어 사용자에게 강력한 힘을 선사했다.
특히, 저 눈앞에 [고대 기간트의 심장]은 특별했다.
단순한 마력 보유량만으로 일개 국가가 500년 이상은 마력 부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며 일개 인간에게 일시적이지만 [격]을 제공하기도 한다.
저런 물건을 A등급 영웅이 사용한다면?
반쪽짜리겠지만, 업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다는 S등급 영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조나단은 탐욕을 잠재웠다.
아무리 격이 탐나더라도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다.
“빠르게 보안 해체를 시작한다.”
이미 어떤 보안 체계가 있는지 파악한 후다. 그 정도도 준비하지 않고 이곳에 올 수는 없으니까.
“해체까지 총 30분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장비지만, 이 장비를 판다면 저런 보안 체계 몇 개를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B등급 용병 두 명을 경비 세운 후, 나머지 2명을 데리고 중앙 연구소로 이동했다.
이곳에 숨어있는 ‘한지운’이라는 연구소장을 확보해야 한다.
[고대 기간트의 심장]은 아주 특별하지만, 그렇기에 이 분야에 최고라는 ‘한지운’ 연구소장이 필요했다.
“무조건 생포해야 한다. 팔다리는 상관없으니까 죽지만 않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가는 길에 몇 개의 포탑과 용병이 보였지만, 조난단의 검에 덧없이 스러질 뿐이었다.
그때였다.
툭. 토르르르.
탁.
조나단의 발끝에 단단한 무언가 걸려 멈췄다.
작은 유리병. 옅은 마력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포션 병이었다.
“응?”
위험을 직감하고 말 것도 없이 너무나 평범한 포션 병. 그렇기에 의심스럽긴 했지만, 겨우 이걸로 [황혼의 늑대]에서도 ‘죽지 않는 협곡의 늑대’라는 이명을 받은······.
그극.
키이이잉.
조나단은 머리가 정지했다. 아니,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시야가 멈춰버렸고 눈에 보이는 자신의 팔과 다리는 뼈 없는 오징어처럼 휘어버렸다.
전혀 고통 없이.
그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의식만 둥둥 떠 있는 게 아니라, 찰나지만 정말 시간이 정지했던 것이니까.
‘우욱.’
언제인지 모를 순간.
발밑에서 늪과 같은 무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목을 넘어 머리끝까지 차오르며 속을 뒤집었고 호흡을 지웠다. 조나단의 의지만으로 움직여야 하는 그의 마력이 성난 말처럼 날뛰었다.
전혀 컨트롤할 수 없었다.
멀리 무언가 흐릿하게 보인다.
찰나에도 수십 번씩 깜빡이는 세상에서 말이다.
‘두 명······?’
그는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평온하게 걸어온다.
이미 그의 휘하인 B등급 용병은 작은 육체 조각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태초의 마력으로 돌아간 후였는데도 말이다.
귓가가 웅웅 거렸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들렸다.
“······아직도 ······이걸? ······그래도 이제······ 야지.”
그가 조나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지?’
라는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의 머리는 사라졌다.
* * *
한성은 [공간이 담긴 마력 포션 병]을 사용했다. 당연히 길이현의 연구소에서 사용한 것처럼 상급 마력석을 갈아 넣은 게 아니라, 본신의 마력을 어느 정도 넣었을 뿐이다.
공간은 공간 자체로 큰 힘을 얻는다.
거기에 마력이 담겨 있다면 위력은 배가된다.
상대는 자신이 있는 공간 자체가 휩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정지한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죽음에 이른다.
그는 A등급이었지만, 포션 병을 보자마자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이 공간을 담은 포션 병의 정보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가자, 안쪽에 B등급 용병이 더 있어.”
“······.”
안혜림은 한성을 쫓아오고 있었지만, 시선은 머리가 없는 조나단에게 향해 있었다.
피도 흘리지 않은 전투였지만, 시신은 시신이다.
안혜림은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 겪었다. 본래 이게 정상인 거지만, 다른 친구들이 터무니없이 죽음과 가깝기에 이상해 보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에서 또 다른 박동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혜림. 앞에 적이 있어. 정신 차려.”
“······아, 알았어.”
두근. 두근.
한성도 혜림의 두근거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인다. 동시에 눈의 흰자가 충혈되기 시작한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극도의 흥분이 육체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래, 나와라.
저 앞에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본인이 죽는다.
저들은 적이다. 눈에 띄기만 해도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적이라는 거다. 안혜림의 눈동자는 텅 비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인격과 싸우고 있는 거다.
한성은 그녀 옆에 검 하나를 내려놓고 먼저 나갔다.
“봐라, 사람을 죽인다는 게 무엇인지.”
한성도 꺼려지긴 하다.
52년 동안 한성이 죽인 이 세상의 사람을 헤아려보라고 한다면 머뭇거림도 없이 포기할 거다. 셀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대략 수만 명.
간접적으로는 수백만 명도 넘을 거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들은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고 0과 1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일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느낌이 다르다.
두근- 두근.
한성의 심장도 뛰었다.
이곳에 떨어지고 사람을 죽이는 게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한성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흥분에 젖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안혜림이 보인다.
‘동요되는 건가.’
안혜림의 다중인격은 주변 인물에게도 ‘버프’ 비슷하게 영향력을 준다. 그래서 그녀는 대규모 전장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후-”
한성은 그 감각을 받아들였다.
잠시 감았던 한성이 눈을 떴고.
그의 발은 길게 뻗어 나갔다.
검을 든 적 한 명.
전기 이능을 사용하는 한 명.
한성은 검을 휘둘렀다.
상대는 B등급. 수치만으로 본다면 능력치가 60이하이며 50이상인 용병. 비록 영웅이라는 타이틀은 얻지 못했지만, 실전만으로 B등급에 다다른 이들이다.
결코 현역 영웅에 떨어지지 않는다.
캉.
한 번의 휘두름은 그대로 막혔다.
한성은 몸 전체가 띄워지며 뒤로 밀쳐졌다.
강하다. 역시 B등급은 B등급.
하지만 한성은 씨익 웃었다.
즐거웠다. 흥분되었고 심장은 마구 뛰었다. 이게 마치 싸움이라는 듯. 살아있다는 것을 이렇게 느껴보라는 듯 말이다.
훅.
옆으로 무언가 튀어나갔다.
활을 버리고 검을 든 안혜림이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붉게 물든 상태였고 모든 능력치는 근력과 체력 쪽으로 이동한 것인지 몸도 달라졌다.
- 메인 캐릭터 ‘안혜림’이 [다중인격]을 개화합니다.
- 또 다른 자아 [도살자]가 등장합니다.
- 살인에 특화된 모든 특성을 활성화합니다.
- ‘인간’을 대상으로 압도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 [도살자] 버프를 받습니다.
- 모든 육체 능력치가 150%로 상승합니다.
- ‘인간’을 대상으로 압도적인 특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시작되었다.
안혜림의 도살자.
한성은 몸에서 끌어 오르는 힘을 만끽하며 안혜림의 옆으로 붙었다.
적은 B등급이지만, 지금은 호랑이 앞 사슴에 불과하다. 한성과 안혜림은 도살자의 특성으로 인해 완벽한 포식자가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젠장!”
두 용병은 급격히 상승한 둘의 기세에 주춤거린다. 아무리 능력치가 준수하고 경험이 많더라도 이런 싸움에서 주춤한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
한성의 마력이 흩뿌려지며 마법진 4개를 동시에 소환했고, 공간 관여를 이용한 [부분 분쇄]가 뿌려졌다.
콰지직.
안혜림은 본능적으로 한성의 공격을 피해 적에게 검을 그어댔다. 강건하던 그들의 방어는 얇고 가벼운 안혜림의 검에 무너졌다.
B등급 용병이 겨우 후보생에 불과한 이들에게 말이다.
이게 추후 SS등급의 영웅이 될 천재 후보생의 힘이다. 거기에 고인물인 이한성까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털썩.
상대방은 쓰러졌다.
투둑.
안혜림의 검 끝에서 핏물이 떨어진다.
그녀는 죽일 ‘적’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직 다중인격이 풀려선 안 된다.
한성은 빠르게 [고대 기간트의 심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이 사용한 보안 해제 장비가 보안 시스템을 해체한 다음이었기에 한성은 별 어려움 없이 [고대 기간트의 심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운의 영향인 것인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혜림아, 나가자.”
안혜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아 속에서 또 다른 자아와의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지금의 거의 본능만 남은 상태이기에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을 거다.
하지만 한성은 그녀를 컨트롤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혜림아. 사람 죽이러 나가자.”
씨익.
안혜림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어찌나 섬뜩하던지 살갗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우, 착하다. 혜림이.”
한성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도 그녀는 묵묵부답.
“앞으로 내 말 잘 들으면, 내가 죽일 사람 많이 소개해 줄게. 알았지?”
씨익.
다시 웃는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적응되질 않는다. 이목구비는 예쁜 친군데 이렇게 보니까 거의 악마가 따로 없다.
“그러니까 잘 따라와.”
한성의 말에 안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는다.
흠칫.
한성은 정말 깜짝 놀랐지만, 옷깃을 잡는 거였다.
꾸욱.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이 정도면 성시연이랑 한 별하고 거의 동급이다.
무섭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
소심한 궁사 안혜림일 때는 다른 인격이 나오더라도 지켜준다며 한성에게 의지하게 해야 하고, 지금의 [도살자]는 죽일 사람을 알려주는 것으로 의지시켜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안혜림의 두 인격이 지닌 ‘이한성’에 대한 호감도가 80을 넘길 거다. 그렇게 되면 안혜림은 완전히 한성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건.
“적.”
한성은 빠르게 달렸다.
안혜림은 한성의 옷깃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이제 옆에 있는 안혜림만 공략한다면 아카데미 안에서 크게 위험한 사람은 없다. 성시연은 어찌어찌 공략이 거의 되어 버렸고 한 별은 진 훈과 친해지면서 검은 땅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
‘그리고······.’
세르게이, 얜 샤를은 신뢰를 잃지만 않으면 되고 블라디미르 나디아는 한 번씩 괴롭혀주면 끝이다.
걱정되는 건 길성현과 줄리아 마틴.
둘을 죽이느냐, 살려서 아군으로 만들어 보느냐.
“적······.”
안혜림이 입을 열었다.
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기 적이다. 모조리 죽여버려.”
씨익.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 > 끝
ⓒ [동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