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벌한 데이트 신청 >
사실 말이 마조히스트라는 거지, 특성 [복종근성]이라는 게 있는 그녀는 누군가에게 압도되어 복종할 때 정신적 안정감을 느끼고 일정 능력치가 대폭 상승한다.
‘그러면서 묘한 고양감을 느끼고······ 떨어질 수 없는 껌딱지가 되지.’
그녀의 하얀 얼굴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열이 오를 만도 할 거다.
10위권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꽤 엘리트인데다가 자신의 배경을 보고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올만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한성은 손가락을 들어 이마에 댔다.
그리고 힘을 줘 뒤로 민다.
“악!”
비명을 지른다. 아프진 않겠지만, 굉장히 수치스럽겠지.
“누가 내 카메라를 함부로 만지래.”
“뭐, 뭐라는 거야!”
나디아가 손을 저어 한성의 손을 쳐보려 했지만, 이미 예상하던 일이기에 스윽 피해 다시 이마에 손을 댔다.
화가 난 나디아가 훈련용 창을 휘두른다.
멍청한.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창을?
한성은 검을 살짝 올려 나디아가 쥔 손 바로 위쪽을 막는다. 창사답게 손목을 회전하며 한성의 검을 벗어나려 한다. 굉장히 유려하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성한테는 안 된다.
마치 검이 창에 접착된 듯, 나디아의 창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을 줘도, 어떻게 피해도 한성의 손바닥 안이다.
이 상태에서 마력을 끌어올려 압도적인 육체 능력으로 밀어붙인다? 그렇게 되면 한성이 다칠 수 있다. 아직 능력치 자체는 부족하니까.
“이익!”
하지만 이미 기세를 잡힌 후였고.
실력으로도 자신이 떨어진다는 걸 체감했다.
자존심이 굉장히 상했을 거다.
“블라디미르 나디아.”
나디아는 씩씩거릴 뿐 대답하지 않는다. 언제든 마력을 흩뿌려 죽이고 싶은 마음이겠지.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될 거다.
지금 당장 자신이 마조히스트라는 걸 모르지만, 은연중 그런 걸 바라고 있으니까.
‘기세는 잡았고, 실력도 잡았고, 정신적 가학도 시작했고.’
나디아의 공략이 힘든 이유는 그녀의 실력, 배경, 자존심 등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배경 쪽은 플레이어가 밟기 불가능한 게 정석.
“블라디미르 안톤은 잘 지내지?”
러시아는 보통 성을 뒤에 붙이지만, 한국에서 번역하게 되면 한국식으로 뒤바뀐다. 부칭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아카데미에선 생략하는 편이다.
한성의 말에 나디아는 물론이고 세르게이까지 번쩍 놀란다.
“······너, 지금 무슨 말을······.”
“안톤한테 전해. 검은 땅에서······.”
나디아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한성은 조용히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한성의 말이 계속될수록 나디아의 표정은 창백하게 변해갔다.
풀썩.
한성이 훈련장을 빠져나갔을 때, 나디아는 멀쩡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 *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있었다.
“넌 또 왜 왔냐?”
성시연이 날카롭게 물었다.
자신이야 암살을 위한 관찰 중이다. 약점을 알아보고 언제든 기회를 잡기 위해선 지켜보는 것은 필수니까. 하지만 한 별은 왜?
성시연은 잘 안다.
한 별의 가문은 대한민국의 수호가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알아볼 게 있어서.”
“알아볼 거?”
“응. 검은 땅의 아이······가 맞는지.”
성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은 맞다. 특히, 대한민국의 수호가문인 정연에선 검은 땅의 아이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체가 한 별이라는 거다.
쏴아.
성시연의 전신에서 잘 벼려진 살기가 새어 나왔다.
“맞다면?”
한 별은 그 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둘은 비슷하다. 어렸을 때부터 살인을 시작했고 살인을 위해 키워졌다. 다른 후보생이었다면 압도적인 살기에 기세가 꺾였겠지만, 이들끼리는 그저 제스처에 불과하다.
“맞으면 맞는 거겠지.”
한 별은 나른한 듯 싸늘한 눈빛으로 반짝였다.
성시연은 알 수 있었다.
깊숙한 곳에서 은은하게 발하는 살기.
방금의 제스처로 서로는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스윽.
성시연은 은밀하게 어둠에 섞여 뒤로 물러났다.
한 별은 그곳을 지긋이 바라보다 고개를 꺾었다.
저 앞에 나디아가 풀썩 주저앉는 게 보인다.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블라디미르 안톤에 대해 잘 아는 듯 말했다. 귓속말을 하기 전에 ‘검은 땅’을 언급했다.
한 별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차가웠다.
* * *
“잘한 거겠지.”
한성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확실히 그냥 게임일 때와는 긴장감이 다르다.
한성의 연기는 완벽했지만, 외줄타기와 같다.
나디아가 한성의 말을 안톤에게 전하는 것까진 괜찮다. 어차피 안톤이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움직이면 말이 달라진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속해 있을 때까진 안전하겠지만.”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한성이 날린 ‘뻥카’를 완벽하게 진실로 만들어야 한다.
한성은 조용히 헤일렌을 불렀다.
- 네, 한성님.
“헤일렌, 튜브 접속 좀 부탁해. 1년 전에 올라온 브이 로그”
브이 로그. V-Log라고 쓰며 비디오와 블로그의 합성어다. 즉, 비디오로 촬영한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알겠습니다.
외로웠다.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오랜만이다.
혼자인 기분. 주변의 많은 캐릭터와 튜브 구독자가 있지만, 모두 게임 속 인물이라 생각하니,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었다.
한성은 소파에 발을 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불도 제대로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이라 화면이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자, 오늘은 새로 이사한 집을 소개할 거에요. 아, 여긴 제 누나. 싸가지없고 폭력적이지만, 그래도 똑똑한······ 악! 봐요! 여기 가정 폭력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고 계십니다악!’
불이 꺼진 어두운 거실에 알록달록한 화면이 빠르게 지나간다. 앙칼진 누나의 목소리. 뒤이어 들려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슴을 움켜쥐듯 조여왔다.
다음은 친구들과 캠핑을 간 영상.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여행 ‘계’가 있다. 대학교 동기이며 형과 동생이기도 한 친구들. 다들 멋진 직장인이 되어 SUV를 끌고 고가의 캠핑 장비를 이용해 텐트를 치고 요리를 한다.
쌀쌀한 밤하늘. 그리고 소주 한 잔과 끊이지 않는 수다에 빠져든다.
가슴은 아파왔고 코끝은 시큰해진다.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아, 나이 먹고 무슨 주책이야.”
이곳에서야 17살이지만, 원래는 서른도 훨씬 넘었다.
짝짝.
한성은 두 볼을 따갑게 때렸다.
그래, 원래 혼자였다.
현실에서도 이 게임 속의 캐릭터와 더 친했던 사람이었다. 현실보다 게임에 시간을 더 쏟았고 오랜 시간 감정을 공유했다.
근데 그게 더 서러웠다.
새롭게 시작하는 세상.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캐릭터. 혼자만 세상을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공허하고 서글픈 일인지,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았다.
‘처음 튜브를 시작한 것도, 외로워서였지.’
어쩌면 처음부터 타고난 관종이었을지 모른다.
한성은 튜브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 들렸다.
딸랑.
“어서 오세요.”
아카데미의 면적은 상상 이상이다. 하나의 도시였고 학생과 강사 5,000여 명을 제외하고도 5만 명 이상 상주하는 곳이다.
편의점도 있고 술집 가득한 거리도 있다. 기본적인 편의 시설은 전부 있는 편이라,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다.
한성은 조용히 ‘신선한’ 소주 두 병과 거뭇한 오징어 다리를 담았다.
“여기요.”
“······신분증 보여주세요.”
“아, 잠시만요.”
하긴, 17살이니 성인처럼은 안 보일 거다. 한성은 후보생 신분증을 내밀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산을 마쳤다.
정말 후보생 신분이 성인 인증이 되지 않았다면 힘들 뻔했다. 최소 3년은 술을 못 먹는다는 이야기일 테니.
한성은 편의점 앞에 파란 의자에 앉아 소주를 땄다.
이곳에 와서 소주 생각이 잔뜩 났지만, 매일 훈련 일정 때문에 참아야 했다. 아까 나디아의 방해만 아니었으면 오늘도 걸렀을 거다.
하지만 오늘처럼 적적한 날 소주만 한 친구도 없다.
“아, 컵······.”
한성은 일어나려다 귀찮아서 병째로 입에 가져다 댔다.
“크으, 좋다.”
이 맛에 술을 먹는다. 한성은 살짝 데운 오징어 다리를 입에 물었다.
한성은 술도 좋아하고 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도 이 시간만큼은 카메라를 켜지 않는다. 모든 생활을 카메라에 담는 한성의 유일한 휴식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뭐하냐.”
“앗. 깜짝이야.”
성시연이었다. 이 여자는 시도 때도 없이 어둠을 타고 이렇게 접근한다. 순간 오싹했던 마음을 다잡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한테 올 때는 그림자 타고 오지 좀 말래?”
“뭐, 그거 맛있나.”
그러고 보니, 성시연도 17살이면서 이제 막 성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나중엔 굉장한 애주가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자를 죽인 날은 술을 반드시 먹어줘야 한다나.
그래서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먹을래?”
한성은 먹던 걸 그대로 내밀었다.
성시연의 인상이 확 굳는다.
‘입에 닿은 거라 안 좋아하는 건가.’
“싫음 말고.”
“······아니야.”
성시연은 한성의 손에 쥐어진 병을 그대로 낚아채 입에 들이부었다.
“어어? 그렇게 먹으면.”
“푸확! 으으. 이거 뭐야.”
다행히 한성의 얼굴에 뿜진 않았다.
“여기 닦아.”
휴지 몇 개를 뽑아 건넸다.
한성은 그 모습을 보며 성시연에게서 소주병을 잡아 입구를 살짝 닦고는 콸콸 마셨다. 침이 조금 들어갔겠지만,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은 아니다.
크으.
쓴맛에 오징어 몇 개를 씹는다.
예쁘긴 무지하게 예쁘다. 어떻게 저런 비율의 얼굴이 있을 수 있을까? 하얀 피부는 백옥 같고 매끈하게 붉은 입술은 탕후루 같이 달달하며 상큼할 것 같다.
또 비율은 어떤가.
가녀린 팔과 허리가 어떻게 지탱하는지 모를 미드. 정말 딱 과하지 않게 넓은 골반의 곡선. 사실 메인 캐릭터 중에서도 원탑이라 불릴만한 외모다.
특히 골반은 정말 예술이다. 서른 넘어서는 왜 자꾸 골반이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지만, 170을 넘기는 키에 골반까지······.
“뭐, 뭘 그렇게 봐!”
“천하의 성시연이 술 못 먹는 걸 보니 웃겨서.”
“뭐!? 내놔 봐.”
콸콸. 그대로 붓는다.
“ 꿀꺽. 끄으으윽. 마, 맛있네! 맛있어.”
“······.”
한성은 얘가 이렇게 단순했나 싶었다. 보면 볼수록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라 당황스러울 정도다. 아무래도 분명 오류가 있거나 버그일 게 분명했다.
‘살인 기계. 그것뿐이었는데.’
엔딩에 다다를 때까지 만나는 남자도 없었다.
무서운 소문은 몇 개 있었다.
그녀와 만난다는 소문이 뜬 남자 영웅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사망 처리되어 조용히 사라졌다. 많은 튜버들도 그게 사실인지 우연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시연은 그 이후로 벌써 소주에 적응했는지, 한성이 먹던 소주를 가져가 홀짝홀짝 마신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게, 조금은 취하는 모양이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한성의 말에 성시연이 들고 있던 소주를 내려놓고 슬쩍 눈치를 본다.
‘얘기 진짜 어디 아픈 건가.’
보면 볼수록 이상하다.
“······음. 그거 있잖아! 그 나한테 있다는 미개화된 능력!”
“그건 던전 들어갈 때 해준다니까.”
“아하, 그랬지······. 음.”
“무슨 할 말 있어?”
“······너 혹시······.”
뭘 이렇게 머뭇거리는 걸까.
한성은 새 소주를 따서 마셨다.
“심심하면 암살 임무나 몇 개 해볼래? 근처에 쉬운 것도······!”
“푸확! 커억. 커어억.”
사레가 제대로 들렸다. 소주로 사레들리면 굉장히 고통스러운데.
미친, 이 여자는 기본 상식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쉬운 건 역시 별론가? 아하! 이참에 며칠 다녀오는 게 어때? 중국 쪽에도 큰 건 하나 있는데.”
“암살이라.”
암살은 무슨. 요즘 몬스터 죽이는 것도 살이 떨릴 지경이다. 게임일 때랑 현실일 때랑 마음가짐이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
한성은 고개를 돌려 소주만 들이켰다.
성시연은 방금 전 한 별과의 만남을 온전히 기억한다.
그의 눈에선 절제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손에 수백, 수천 번 이상 사람의 피를 묻혀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혈향(血香).
‘분명 한성을 죽일 생각인 거야. 당장은 아니라도······ 죽이고 싶은 생각이겠지.’
저런 눈빛과 살기는 [흑연]에서 매일 같이 보던 것. 절대로 착각할 수가 없었다.
“암살, 좋잖아. 돈도 벌고 재미도 있고······.”
암살에 대해 배워라. 그래서 대비하라.
한 별 따위에게 죽어선 안 된다.
널 죽일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런 말까지 할 수는 없었다.
“아니야.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디 있냐.”
한성이 그렇게까지 거부하자 성시연도 더 말하지 못했다.
“그, 그럼 나 그 개화 관련 훈련도 시켜준다며! 그럼 난 살인이나 암살 알려줄게······!”
한성은 붉게 올라온 성시연의 볼을 지긋이 바라봤다.
‘데이트 신청 멘트, 실화냐······.’
한성은 호감도를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성은 시선을 돌려 밝게 뜬 달을 바라보며 소주를 들이켰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한 번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 맞아! 살인이 얼마나 재미있는 건데. 나랑 같이 실습도 하고 훈련도 해보자. 진짜 나 그런 거 잘하거든!”
이렇게 순진무구하게 웃는 게 더 섬뜩하다.
“야! 며칠 후에 용인에 암살 의뢰 들어온 거 있거든? 그때 같이 가는 건 어때?”
“······.”
하.
그냥 이대로 취해 잠들고 싶다.
아니, 그냥 취한 척하면서 기억 안 난다고 할까?
정말 잘못 걸린 것 같다.
< 살벌한 데이트 신청 > 끝
ⓒ [동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