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조 인공지능 헤일렌. >
성시연은 왜인지 모르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계속 생각났다. 사실 그런 위험은 기억에 남을 만한 것도 아니다. 성시연의 삶은 항상 죽음의 경계에 있었으니까.
평소처럼 무언가를 훔치기 위해 카지노에 갔고, 눈에 띄는 팔찌가 있기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 등장한 이한성이라는 친구.
신입생 실기 시험에서 1등을 한 못생긴 후보생.
‘맞아. 정말 그 정도일 뿐인데······.’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구해줘서? 말도 안 되는 마력 활용으로 밤의 존재를 죽였기 때문에? 아니면 이상한 이능으로 적을 죽이고 그 압도적인 기세를 지닌 ‘그’의 공격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연, 딱 여기 있어. 눈이 보일 때까진.’
그때, 그 말이 계속 생각난다.
정말······ 왜인지는 모르겠다.
성시연은 하얀 이불을 머리까지 올려버렸다.
“아아아아! 죽이고 싶어서 그런 걸 거야! 죽이면 기분이 좋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성시연은 이불을 걷고 벌떡 상체를 세웠다.
“그래, 죽이면 끝나. 죽이면 될 거야.”
그런데 어떻게?
비록 500위에 불과하지만, 측정 테스트에서 봤듯이 1위에 못지않은 무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단순히 후보생 수준이 아니었다.
그 어마어마한 마력 활용 능력, 정교한 검술, 기이한 이능. 거기에 밤의 존재를 둘이나 죽이고, 벤토의 공격에 초연했던 그 눈빛까지.
“안 돼. 자칫하면 되려 당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암살자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자도 죽일 수 있다.
성시연은 결심했다.
오늘부터 타깃은 이한성이다.
“······첫 번째.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것.”
성시연의 스토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이한성은 병원에 하루를 꼬박 입원했다.
마력 탈진과 전신의 자상(刺傷) 때문이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고 힐러의 치료와 포션 몇 개로 완치할 수 있었다.
“생각 외로 큰 성과였어.”
일단 바바리안 검과 팔찌가 [보물] 등급으로 개화했고 인지도 포인트가 261이나 됐다. 거기에 능력치도 전체적으로 상승했다.
[상태창]
이름 : 이한성
능력치 : [근력 15] [속도 12] [민첩 12] [체력 15] [감각 11] [마력 27] [정신력 21] [지능 5] [매력 3] [행운 99]
잠재력 : 220/1,000
겨우 2일 만에 총 능력치가 30이나 올랐다. 마력이 가장 큰 폭으로 올랐고 정신력과 육체 능력치가 조금씩 올랐다.
거기에 마력지배가 D등급이고 정보 열람까지 E등급으로 상승했다.
“시스템 상점.”
눈앞으로 인터페이스가 떠오른다. 플레이어를 제외하곤 아무도 볼 수 없는 유저만의 시스템.
한성은 랜덤 박스 목록으로 들어갔다.
- 하급 무기 랜덤 박스(100P)
- 하급 방어구 랜덤 박스(100P)
- 하급 소모품 랜덤 박스(100P)
- 하급 능력 랜덤 박스(100P)
.
.
.
- 중급 무기 랜덤 박스(1,000P)
“중급은 아직 멀었군.”
인지도 포인트라는 게 시간이 갈수록 얻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얻는 포인트도 커지니 빡빡하게 아낄 필요까진 없다.
“하급 랜덤 박스.”
이건 200P. 무기, 방어구, 소모품 등 구분 없이 모든 분류를 포함하는 랜덤 박스다.
뭐가 나올까.
- 하급 랜덤 박스를 구매하였습니다.
- 하급 랜덤 박스를 사용합니다.
또르르르.
박스가 빠르게 회전하다 멈춰 열린다.
- 잭팟!
- 기이한 [운]이 발동됩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운]이 발동됩니다!
- 다시 없을 [운]이 발동됩니다!
- 보조 인공지능 [헤일렌(영혼)]을 얻었습니다.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보조 인공지능의 위계(位階)는 다양하다.
인간이 직접 제작한 ‘공산품’은 [하급] ~ [상급]으로 분류되고, 던전과 오랜 유적에서 발견한 ‘유물’은 [희귀] ~ [전설]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한성이 얻은 [영혼] 등급.
오래전, 어떠한 이유로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한 ‘영혼’과 고대 ‘유물’의 조합. 거기에 인간의 기술력이 합해 만들어진 물건. 그렇기에 따로 정해진 ‘등급’의 분류가 없다.
‘그래서 하급 박스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가.’
보조 인공지능은 이 세계관에서 최소 10억 이상 하는 물건이다. 당연히 최하급 물품이고, 개인 비서와 같은 역할이 전부.
비싸면 비쌀수록 많은 기능이 탑재된다.
개인 비서는 물론이고, 전투 보조, 주변 기기 해킹, 소규모 마법, 이능 부여까지. 하나의 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대신한다.
그중에 [영혼] 등급의 보조 인공지능은.
주인과 같이 성장하는 ‘성장형’.
초기엔 공산품의 ‘중급’ 정도의 성능을 내는 게 전부지만, 후엔 한계가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다.
“이게 말이 돼?”
‘다시 없을 [운]이 발동됩니다.’
이런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헤일렌(영혼)]
설명 : 대륙과 대륙이 부딪히던 고대 시대를 풍미하던 ■■술사. 그녀는 ■■■였으며 ■■■의 ■■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대륙을 떠돌다 ‘이계’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 ■■를 ■■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장도 : 1%
현재 등급 : 중급
“이게 뭐야.”
한성은 궁금증에 [정보 열람]을 사용했다.
- [정보 열람]을 사용합니다.
- 대상 [헤일렌(영혼)]이 저항합니다.
- [정보 열람]의 수준이 터무니없이 낮아 대상의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이게 안 되네.”
한성은 인터넷을 찾았다.
하지만 헤일렌이라는 보조 인공지능은 그 어떤 곳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 세계관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하긴, 이래서 직접 사는 것보다 랜덤 박스를 구매하는 거니까.
한성은 신경을 끄고, 헤일렌을 활성화했다.
- [헤일렌(영혼)]을 활성화합니다.
- 본체를 설정해 주십시오.
여기서 ‘버그’ 아닌 ‘버그’가 하나 있다.
모두 ‘버그’라고 생각했지만, 운영자가 알고도 막지 않았다. 딱히 답변은 없었지만, ‘그 정도는 봐 줄게.’ 느낌이랄까. 이후에 게임 내 [재앙(災殃)]이 20% 정도는 늘었으니 그 뉘앙스가 맞을 거다.
“시스템 카메라.”
- 본체를 [시스템 카메라]로 지정합니다.
카메라와 화면에 옅은 빛이 뿌려진다.
보통 보조 인공지능은 본체가 파괴되면 같이 파괴된다. 새로운 걸 사면 되지만, 개인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이기에 다시 길들이는 게 굉장히 힘들다.
하지만 시스템 카메라는 절대로 파괴될 수 없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물론, 한 번 깃든 인공지능을 없애기 위해선 본체를 파괴해야 하기에, 후반에나 쓰이는 ‘버그’지만, 끝까지 성장 가능한 [영혼] 등급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앞으로 3대의 카메라는 헤일렌의 눈이 될 것이며, 한성이 보는 화면은 헤일렌의 정보 전달을 원활하게 만들어 줄 거다.
- 안녕하십니까. 헤일렌입니다.
화면의 스피커에서 헤일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좋아. 반가워, 헤일렌. 지금 가능한 기능은 어떤 게 있지?”
- 아직 중급이기에, 기본적인 개인 비서 기능과 옅은 실드를 구성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개인 비서는 말 그대로 개인 비서다.
사용자의 스마트 워치나 노트북 등을 연동해 일정, 통장, 연락 등의 관리를 총괄한다.
“옅은 실드? 중급인데 벌써 그런 게 가능한가?”
- 네, 아직 아주 옅은 정도지만 가능합니다. 제 생전의 능력과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영혼 등급의 보조 인공지능은, 성장도에 따라 생전의 기억이 해금되기 시작한다.
“각인 마법이야?”
- 아닙니다. 이능으로 분류되는 실드입니다.
“오, 정말?”
역시 영혼 등급의 인공지능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보통 중급은 인첸트. 즉, ‘각인 마법’으로 실드가 내장된 경우고 상급으로 가야 직접 마력을 이용해 실드를 시전할 수 있다.
이능은 ‘유물’로 분류된 경우나 가능하다고 본다.
생각보다 뛰어난 기능이었다.
“좋네, 앞으로 내 일정 관리에 신경 써 주고. 따로 할 건 없을 거야. 아, 증권 계좌도 만들어줘.”
- 알겠습니다. 스마트 워치와 노트북에 연동을 시작합니다.
앞으로 도박만으로 돈을 벌 순 없다.
도박은 기반을 마련할 자금이고, 한성이 아는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하는 게 주목적이다.
“돈 쓸 일은 무지하게 많으니까.”
그만큼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곳이다.
한성은 당장 필요한 물건 몇 개를 주문하곤 일어났다.
아직 마력의 움직임이 뻣뻣했지만, 육체 훈련을 쉴 수는 없었다. 운동복을 갈아입은 한성은 가장 가까운 검술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 * *
한국 영웅 아카데미.
이 게임이 한국에서 만든 게임이니만큼, 세계관에서 한국은 꽤 큰 강대국이었고 ‘한국 영웅 아카데미’는 시스템, 강사진, 후보생 수준, 역사 등은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최고의 아카데미.
그렇기에 외국 학생도 큰 비율을 차지했다.
세르게이 노브코프.
러시아 출생이며 세계 랭킹 수위에 있는 [검성] ‘미하옐’의 아들이기도 하다.
노브코프는 그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검을 잡았고, 세계에서 천재들만 모인다는 ‘한국 영웅 아카데미’에서 신입생 5위에 오를 정도로 검의 천재였다.
스윽. 훅.
그의 검로(劍路)엔 마력이 선명하게 요동쳤다. 찰나, 수십 개의 검로가 허공을 수놓았고 그의 주변은 작은 마력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쏴아아아.
마력의 요동은 대기를 밀어냈고 널찍한 원형을 파동을 생성했다.
세르게이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검을 넣었다.
“어? 세르게이?”
“······이한성? 날 압니까?”
러시아어였지만, 이 세계관 설정상 모든 언어는 스마트 워치로 동시 번역되어 들린다.
“아, 아니. 유명하니까······.”
한성은 아차 했다. 너무 익숙한 얼굴에 반가워서 막 불러 버렸다. 전 플레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몇 안 되는 캐릭터였으니까.
다행인 건, 강하다는 것과 유명하다는 말을 상당히 좋아한다는 것.
“조금······ 그것보다, 한성 당신이야말로 유명하지 않나요?”
“반짝일 뿐이죠. 그보다 전 당신의 검을 더 좋아합니다.”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칭찬은 더 좋아한다.
“크흠. 한성도 주무기가 검이죠?”
“네, 한 수 배워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한성은 [정보 열람]을 이용해 호감도를 확인했다.
- ‘세르게이 노브코프’의 ‘이한성’에 대한 호감도.
- 신뢰도 : 43
- 호감도 : 55
- 우정도 : 30
‘오, 이렇게까지 보이는구나.’
호감도가 존재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전 플레이 때도 A등급 정보 열람 관련 능력을 지녔으니, 대략적인 확인도 가능했다.
하지만 [정보 열람]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자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40에서 60이면 정말 별 관심 없는 수준. 우정도야 낮은 게 당연했다.
‘이거 잘만 쓰면 괜찮겠는데?’
“한 수라······ 제가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세르게이와 한성은 목검을 들고 마주 섰다.
‘세르게이와 쉽게 친구가 되는 법 첫 번째.’
검술로 그를 압도하라.
“시작할까요?”
세르게이가 먼저 말했고 한성은 조용히 검을 들었다.
전투였다면 육체 능력치 때문에 한성이 질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한성은 그와 수십 년 동안 함께했다. 적어도 이 세계관 안에서는 그의 검술, 약점, 습관 등. 모든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전투’가 아닌 ‘검술’을 다루는 대련이라면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승패를 떠나 그는 알 거다.
한성의 경험이 얼마나 되는지.
또 자신의 검술에 얼마나 허술한지.
< 보조 인공지능 헤일렌.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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