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에필로그
제국의 황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야.
우우우우우웅!
지금 막, 이곳 주변으로 무수한 돌덩이들이 소환되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해야 해. 알고 있지?”
“네. 드래곤은 인간사에 관여할 수 없으니까… 맞죠?”
“잘 알고 있네.”
“그럼, 이그드라실 쪽이라도 가보는 건 어떠세요?”
“언제는 라그하일을 믿는다더니?”
“상대가 상대잖아요. 아마 이리나 님이 가주신다면 무척 큰 도움이 될 거예요.”
“…….”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이리나가 이내 어깨를 으쓱한다.
“좋아. 가볼게.”
“감사합니다.”
“대신, 죽지 마.”
“안 죽어요.”
“죽으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죽인다고…….”
“대답.”
“…물론 죽지는 않을 거지만요.”
그제야 이리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믿는다.”
번-쩍!
이번에도 대규모 텔레포트를 도운 이리나가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제대로 인사라도 해야겠다.
매번 무보수로 신세만 지고 있으니.
“…산개.”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륵!
내 중얼거림과 동시에, 곧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한낱 정사각형에 불과했던 돌덩이가 완연한 구색을 갖추는가 싶더니,
쿵! 쿵! 쿵!
종래에는 두 다리로 걷기까지 했으니까.
크기 5미터를 훌쩍 넘는 고대 시대 최강의 병기.
골렘이었다.
“자, 들어가 볼까?”
저 멀리, 제국의 황성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마 저들은 추호도 예상치 못할 것이다.
설마하니 자신들의 심장부에 갑작스레 적군이 출현할 것이라고는.
“…조금만 기다리시오, 황제. 당신의 자리는, 내가 확실하게 접수해 줄 테니까.”
***
한편, 이그드라실 인근.
“…믿을 수가 없군.”
완전히 짓뭉개진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지로시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금 문자 그대로 소멸 직전의 상태였다.
모두 제노스인가 하는 저 애송이의 솜씨였다.
빛의 마녀와 맞붙었던 앤그리는 양패구상.
둘 모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지금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물론 경중만 따지면 앤그리의 피해가 더 컸다.
이쪽은 죄악의 그릇이 완전히 박살이 났고.
그에 비해 빛의 마녀는 고작해야 일시적인 마력의 고갈이었으니까.
그만큼 둘의 상성이 좋지 않았다.
“…참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군.”
서서히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 속에서, 지로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그보다 저기 쓰러져 있는 앤그리가 훨씬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다.
태생부터 남들이나 시기하던 한낱 거지에 불과했던 자신과 달리, 앤그리는 일대에서도 이름 높은 명문 기사 가문 출신이었으니까.
그런 저 녀석도, 결국 믿었던 제 주군에게 배신을 당해 악(惡)에 잠식당했지만.
“…그보다, 저 애송이가 사실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의 현신이라고?”
힘은 잃었지만 귀는 살아 있었다.
하여, 두 괴물의 대화는 생생하게 지로시에게 전해졌다.
오늘날 드래곤들의 대탈주 사태를 만들어낸 소울 이스케이프.
그 최초의 시도를, 저기 애송이가 하였다고 한다.
그리 생각하자 억울한 마음이 상당 부분 가셨다.
적어도 자신은 인간 따위에게 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이 내가 인간 따위에게 질 리가 없지.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도 너무 불쌍하잖아? 같은 인간을 부러워하여…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는데… 결국 인간에게 최후를… 맞이한다면…….”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문 지로시의 목이 천천히 꺾여 간다.
콰쾅! 콰콰콰콰콰콰쾅!
때마침 두 괴물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무수한 바람의 화살들을 만들어낸 드래곤 아이젝.
허나, 그런 화살들을 하나하나 창으로 쳐내는 제노스였다.
전투는 이미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라크제를 상대하며 마나 폭주 상태에 접어든 아이젝은 이미 위험한 단계였으니까.
“인간의 몸으로도 제법이군, 라그하일.”
“내 이름은 제노스다.”
“물론 그러시겠지. 누가 같은 부류 아니랄까 봐, 아이리스 녀석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말하는군.”
“…결국 당신은 그토록 증오하던 인간에게 지는 것이다, 아이젝. 만약 여기서 내가 죽더라도, 당신 또한 반드시 소멸당하고 말 테니까.”
“훗. 대신 나는 인간들에게 대륙을 구한 영웅으로 기억되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발아한 악의 씨앗을 막은 것도, 사악한 악룡(惡龍)을 처단한 것도 이 내가 아니던가?”
“……!”
그제야 제노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당신, 그럼 설마 일부러…?”
“인간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이런 게 아니겠나? 그 옛날 내가 없었다면 인류는 더욱 진일보할 수 있었을 텐데, 내 덕에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으며…….”
순간, 말끝을 흐리던 아이젝의 입가가 완연한 호선을 그렸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제 영원토록 나를 원수가 아닌 영웅으로 기억하겠지. 이것이야말로 진짜 복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끝끝내 당신의 생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제노스가 다시금 창을 겨누었다.
폭주하는 마나 속에서도 아이젝은 도리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번-쩍!
“나도 동감이야.”
“……!”
그 순간, 아이젝의 뒤쪽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순백의 미녀였다.
“아이젝. 드래곤도 노망이 든다는 사실을, 당신이 제대로 보여주는구나?”
“…이리나인가?”
“전대 로드로서 예우는 해줄게. 곱게 죽어.”
미간을 좁힌 이리나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푸욱!
곧, 그녀의 가녀린 손이 아이젝의 하트 한복판에 박혀 들었다.
다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상대는 그 흔한 반격조차 하지 않았다.
“쿨럭!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의외네. 충분히 피할 힘은 남아 있었을 텐데.”
“크크크크크…….”
재차 귓가를 때리는 웃음소리에, 이리나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의문인 점은.
아이젝 또한, 라크제처럼 마지막까지 폴리모프를 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걸로 이리나는 확신했다.
“…역시. 당신이나 라크제나, 사실은 누구보다 ‘소울 이스케이프’를 시전하고 싶었던 거겠지?”
“……!”
“우리 드래곤들에게, ‘영생’은 다른 무엇보다 지독한 저주니까. 그래서 이토록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잖아? 적어도, 자의에 의한 죽음은 아니니까.”
죽어가는 아이젝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번져갔다.
그것은, 이리나가 본 그 누구보다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럴지도.”
작게 중얼거린 아이젝의 신형이 마침내 완전히 허물어졌다.
***
제국의 황성.
가까운 거리였기에 나는 곧장 색욕의 이능을 발동시켜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
그중에서도 황제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전의 한복판으로.
작금에 이르러서는, 골렘 수백여 기가 철통같이 열이나 되는 출입구를 막고 있었으니.
“폐하! 폐하아아아아아아아!”
그토록 강하다고 알려진 황실 기사단도, 이 내부로는 단 한 발자국도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딱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빌어먹을.”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원래는 전투 또한 단숨에 끝낼 계획이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전쟁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할 테니까.
허나, 온갖 마법을 사용해 봐도 모두 허사였다.
벌써 한 시간째.
저 괴물 같은 황제에게는 내 힘이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설마 벌써 마왕과 완전한 ‘합일’을 이룬 것은 아니겠지?”
그런 황제의 검 위로 새까만 기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검강과 마기가 합쳐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지상 최악의 생체 병기.
서걱! 콰콰콰콰콰쾅!
“……!”
한 번의 휘두름에 지면이 움푹 파였고.
그저 내딛는 발걸음에 대기가 진동했다.
종래에는 공간 전체가 그의 격에 영향을 받았으니…
“…직접 경험해 보니 대단하군. 과연 마왕의 힘이다.”
“역시 탐욕과 계약한 거구나, 당신.”
탐욕의 마왕 마몬.
예상대로 황제는 놈과 계약을 맺었다.
저 드넓은 마계를 일통하고, 무려 수천 년이나 힘을 키워온 존재.
그런 놈을, 지금의 나로서는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딱 한 가지.’
찰나, 내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일족 역사상 제일의 괴물이라 불리는, 아이젝보다 더했던 존재.
‘아이리스’의 마지막 여섯 번째 조각을 해방한다면…
“…승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사실, 준비라면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
갑작스레 폭증하는 마나의 압력에 황제 또한 표정이 일변했다.
일반적으로 9써클 마법이라고 하면 메테오처럼 요란스러운 것들만 있겠거니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상대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파워 워드 킬.
혼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소울 어택.
기억을 통째로 빼앗는 메모리 스틸까지.
오히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상대의 내면부터 무너뜨리는 마법들이 대다수였다.
우웅! 우우우우웅!
웅혼한 공명음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이놈!”
그 즉시, 황제가 움직였다.
새까만 검기가 시간차 없이 이쪽으로 날아든다.
일 초를 수십 등분으로 쪼갠 찰나의 찰나.
“…….”
나는 고개만 살짝 젖혀 그 검기를 피해냈다.
홱!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볼 끝을 스친 검기가 벽면에 쑤셔 박힌다.
충돌한 황성의 일부는, 파이는 정도가 아니라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집중을 거듭했다.
지금부터는 정신력 싸움이었으니까.
“너와 나.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 그 억겁의 세상을 지금 이곳에 펼치노니.”
“이놈!”
이윽고 황제가 자리를 박찼다.
다만, 이쪽도 이미 준비는 끝났다.
“백야(白夜).”
화아아아아아아악!
“……!”
쇄도해 오던 황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갑작스레 세상이 바뀌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늘 위에 새하얀 달이 떠올라 있었기에.
“…달이라고? 이곳은 분명 황성 내부일진데…….”
고위도 지방에서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발생하는 현상이 이 백야이나.
이건 단순히 모티브일 뿐이다.
이곳에서는 둘 중 하나가 꺼지지 않으면, 절대로 공간은 깨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꺼진 이는 종말을 맞이하겠지.
정신 마법이란 대게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굳이 이 힘으로 승부를 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 황제와 탐욕의 완전한 합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결국, 마몬은 정신이 무너진 황제의 육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옴!”
백야 내부에서 거친 마기가 휘몰아친다.
그럴수록 내 써클도 과열을 거듭했다.
“하아, 하아, 하아…….”
흐릿해지는 시야.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그럼에도 나는 마나의 운용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야는 더욱 하얗게 물들어갔다.
어느새 바로 눈앞의 상황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게… 이게 무엇이냐? 왜 내가 죽인 것들이 이곳에 있는 게지?”
“…….”
백야의 진정한 힘이 발현되었다.
또 다른 이름은, 과거의 악몽.
이곳 내에서 황제는 끊임없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닌, 제 손으로 죽인 이들로 인해서.
“모두 꺼져라! 감히 이 몸에게 어딜…!”
“…….”
“에인즈. 흐흐흐, 네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성싶으냐? 너는… 데피론. 네 덕에 선황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지. 그 부분은 고맙게 생각한다.”
황제의 검이 의미 없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이리스?”
“……!”
일순, 내 몸이 움찔 떨렸다.
익숙한 이름이 귓가를 때렸기에.
“흐흐흐흐. 너도 나를 원망하느냐?”
“…….”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이 황성인 것을. 너도 이해하겠지?”
꽈아아아악.
비록 기억에 없는 친부였지만,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놈은 권력을 위해 제 형제를 모조리 죽인 학살자에 불과했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저곳으로 뛰어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외부의 개입으로 백야가 깨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네게는 고마웠다.”
“…뭐?”
“만약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넓은 궁에서 영원토록 혼자였을 테니까.”
“……!”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둘만의 비밀이 또 있는 듯했지만, 그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없었다.
다만, 입은 내 의사에 반하여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는, 고작 그 자리를 위해 이토록 많은 피를 흘렸는가? 그 많은 가족들까지 죽이고서?”
“이 목소리는… 크크크. 그래, 이리스의 자식이군. 이제야 기억이 나.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진심으로 후회하지는 않는가?”
“후회?”
어느새 두 눈이 백안(白眼)으로 물든 황제가 비죽이 미소 지었다.
“사람 단단히 잘못 봤군. 내가 그따위 것을 할 위인으로 보이는가?”
“하면 다시 묻지. 만약 정말로 ‘신’이 된다면, 그땐 지금이랑 다를 거라고 생각하나?”
“뭐라고?”
“아마 그대 생각보다 훨씬 더 시시한 세상이 펼쳐질 거다. 심지어 죽지도 못할 테지.”
“……!”
“당신은 그 고통을, ‘영원토록’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나?”
찰나, 황제의 동공이 요동쳤다.
“황제여, 그렇기 때문에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이다.”
“…….”
“신은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유한한 생을 부여했다. 그대는, 정녕 그 축복을 스스로 걷어차려 하는가?”
“…….”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는 것일까?
황제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시점에서, 내 정신도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가히 9써클 마법답게.
인간의 몸으로 백야의 시전 시간은 3분이 한계인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막 그 3분을 넘어섰다.
- 지금 뭣 하는 거냐!? 당장 멈추지 못해!?
직후, 황제가 아닌 분명히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
그것을 끝으로, 이내 내 의식도 완전히 끊어졌다.
***
리비아의 성도.
여기, 세 여인이 초조한 낯빛으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세타 녀석은 잘하고 있겠지?”
“…걱정해 봐야 소용없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걱정이라도 해야지. 아, 진짜. 이런 기다림은 딱 질색인데 말이야.”
실비아를 향해 가볍게 투덜거린 유리나가 이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루나!”
“……?”
“너는 전쟁이 끝나면 뭘 할 생각이야? 계속 주군, 주군하며 세타를 따라다닐 생각인가?”
이어지는 유리나의 물음에, 실비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벌써부터 견제?”
“넌 닥치고 있고.”
“참고로 난 왕국부터 안정시킬 계획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한테는 안 물어봤거든? 넌 평생 일이랑 연애나 해라.”
“아마 네가 관심 있는 그 사람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걸?”
“엥? 그건 또 뭔 소리여?”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는 왕국 수준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안정시켜야 할 테니까.”
“대, 대륙?”
그제야 유리나가 낮은 침음을 삼켰다.
과연 그랬으니까.
녀석은 무려 ‘황족’이었고, 그 황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러니, 만약 녀석이 후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럼 나는 황후가 되는 건가?”
“…정상이 아니구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유리나를 보며 실비아가 팍 인상을 구겼다.
“…황후? 농담은 거기까지 하지. 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니까.”
“…응? 루나?”
“내게도 주군의 반려를 검토할 권리가 있다.”
직후, 유리나의 머리 위로 ‘어이없음’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헹. 웃기고 있네. 신하면 신하답게 뒤에서 구경이나 하셔?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불가.”
파지직!
유리나와 루나 사이로 때 아닌 불똥이 튀었다.
실비아는 한 걸음 물러서 연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로 그때,
“이봐!”
“……?”
세 여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저 멀리서, 한 인영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뭘 노닥거리고들 있는 게야?”
“초월의 마탑주 님…?”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 막 제국의 황성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
이어지는 페르의 말에, 거짓말처럼 세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뭐, 뭐라고요?”
***
“…….”
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화려하기 그지없던 황성의 내부는 어느새 반쯤 폐허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원래 황좌가 존재했던 단 위에, 황제는 가만히 쓰러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스스로 내면의 마기와 마나를 충돌시켰다.
“그게 당신의 선택입니까?”
“흐흐흐.”
황제가 누운 채로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은, 이전보다 더 지독한 고독일 거라는 사실 정도는.”
“…당신만 한 인물이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요?”
“왜 아니겠나? 네가 말했듯이, 나 또한 ‘인간’인 것을.”
“…….”
황제의 대답에 이내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 한마디가, 가슴속 깊숙이 파고들었기에.
“그것 아느냐? 나와 네 아비는 생각보다 사이가 좋았었다.”
“…한데 왜 죽이셨습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같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이미 손안에 있는 것의 소중함은 천지도 모르고, 아직 갖지 못한 것에만 욕심이 들더군.”
“…….”
“‘일인지상’이라는 자리는 내게 그런 의미였다. 유일하게 정을 줬던 형제조차도, 단숨에 내칠 수 있는.”
직후, 황제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내면의 탐욕과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인간의 추악한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지. 크크크. 죽을 때가 되니 온갖 소리가 다 나오는군. 이제 그만 나를 죽여다오, 이리스의 아들이여.”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완전히 파괴되었던 황제의 육신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물론 탐욕의 권능이었다.
마몬은 한 번 문 먹잇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기꺼이.”
푸우우욱!
나는 망설임 없이 생성해 낸 마력 검을 내리꽂을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황제의 심장을 향해서.
“…이리스의 아들이여.”
“……?”
“적어도 마지막은… 꽤나 즐거웠다.”
황제의 동공에서 빠르게 생기가 꺼져 갔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가만히 목례를 했다.
이게 진짜 ‘끝’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알폰스 폰 트쉬베르라는 인간의 생은 확실한 마지막이었으니까.
“…이리 허무하게 갈 것이었다면, 그리 많은 죄악을 저지를 필요도 없었지 않습니까?”
“…흐흐흐흐.”
조용히 눈을 감은 황제가 이내 마지막 말을 중얼거린다.
“그 또한,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
훗날 제국 전쟁이라 명명된 대사건이 벌어진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음…….”
평소 입지 않은 의복을 입었기 때문일까?
무려 황좌에 앉은 나는, 연신 불편한 침음만 내흘리고 있었다.
“거기 앉아보니 기분이 어떠냐?”
“생각보다 썩 좋지는 않은데요?”
내 대꾸에, 곁에 선 학장 할아버지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신다.
보다시피 나는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었으니까.
내가 황제와 전투를 시작한 시점에서 제국군과 연합군도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아무튼…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전으로 들어서는 모든 이들이 나를 향해 예를 표하고 있었다.
대신들이 속속들이 들어서고 있음이었다.
열두 마탑주와 살아남은 십이월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의외로 내 명을 잘 따라줬으니까.
전자는 페르를 중심으로.
후자는 라포르테를 주축으로.
덕분에, 나는 빠르게 제국을 접수할 수 있었다.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새로운 황제 폐하시여!”
“라포르테 공작님에게 말씀은 모두 전해 들었습니다! 그 이리스 저하의 자제분이셨다니… 몰라 뵈어 죄송하옵니다!”
“이리스 저하는 우리 제국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분이셨습니다!”
입가로 떨떠름한 표정이 지어졌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들 하기는.
“세타… 아니, 황제 폐하시여.”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그럼, 그럴까?”
냉큼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페르가 내게로 다가왔다.
“네 어머니를 찾았다.”
“……!”
“별궁에 갇혀 계시더구나. 다행히 건강상 큰 문제는 보이지 않으셨다.”
“…….”
“지금 만나볼 테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억에도 없는 분을 지금 만나봐야, 괜히 마음만 심란해질 뿐이니까요.”
“그럼?”
“일단 뒷정리를 완전히 끝낸 뒤에. 그때 제가 뵈러 갈게요.”
“…그렇게 하거라.”
용건을 마친 페르가 이내 선선히 물러났다.
감히 예상컨대, 이런 분위기라면 아마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대륙에 다시 평화기가 찾아오지 않을까?
연합군은 이미 내 편이나 다름없었고.
자존심 높은 제국의 귀족들조차 내 태생의 비밀이 알려진 뒤에는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고자 찾아오고 있었으니.
다만, 다음으로 내부로 들어서는 손님만큼은 조금 뜻밖이었다.
“…제노스?”
지금 막 입궁하는 인영을 보며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쟨 또 왜 여기까지 왔대?
물론, 입가에는 드물게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뭐야, 제법 지독한 부상을 당했다더니?”
“이봐, 세타.”
“엉?”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벤트 전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게 무슨…?”
“세계관 최강자가 누구인지는 가려봐야지.”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후에는, 피식 실소마저 새어 나왔다.
그제야 나는 황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침 내부 대신들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거든.
“자신은 있냐?”
“난 언제나 자신 있었다.”
“어디서 할까?”
“따로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나? 바로 여기서 하지.”
“…….”
내 입가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역시나, 녀석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소문으로만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는 내게 충성을 맹세하겠다며 찾아온 무수한 제국의 귀족들이 자리해 있었고.
내게는 그들의 기선을 제압할 의무가 있었다.
“…딱 알맞은 대전장인데?”
직후, 나는 가볍게 손가락 마디를 풀었다.
“하면, ‘셋’과 동시에 싸우는 걸로 하지.”
“좋아. 바로 할까?”
“하나, 둘…….”
“…셋!”
나는 봤다.
셋 직전에 움직이는 녀석의 움직임을.
저 비겁한 놈.
물론 나는 조금도 괘념치 않는다.
“어차피 이기는 건…….”
“…나니까!”
같은 생각을 했던 건지, 서로를 향해 쇄도하는 녀석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나태한 마법 천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