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최종장(4)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도 않았다.
땅 밑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럼에도 학장 할아버지의 생존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미 3년이나 지난 일이었으니까.
만약 살아 계셨다면, 어떤 루트로든 반드시 연락을 취해오셨을 테니까.
“호흡은 있어. 지금은 일종의 가수면 상태인 것 같아.”
“가수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과 식량이 필수적이잖아? 한데 그게 없다면… 이렇게 스스로 가수면 상태에 빠져드는 거지. 먹을 게 부족해지는 겨울철, 짐승들이 동면기에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야.”
실비아의 설명에 점차 두 눈으로 습기가 차올랐다.
요약하자면, 결국 진짜 살아계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바깥에 골렘들도 학장 할아버지의 솜씨였던 건가?”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비교적 근래에 생긴 듯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거든. 아까 골렘들의 표면에서.”
“그, 그런 게 있었다고? 나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는데?”
실비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곁의 유리나도 같은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마나’의 흔적만큼은 나한테 선명하게 보이거든. 이리나도 보셨지 않나요?”
“그래. 꽤나 오랫동안 건드린 모양이더군. 하긴, 호기심 많은 인간이 무려 골렘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정리하자면.
결국 학장 할아버지는 고대 시대의 유산인 이곳을 발견했고.
일대를 탐색하던 중, 마침내 아사(餓死)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다른 외부의 요인이 아닌 생존을 위해 자의로 동면기에 빠져든 상태였으니…
“…할 수 있어.”
나는 학장 할아버지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조금씩, 천천히.
갓 태어난 새싹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내면을 훑어간다.
우웅! 우우우우웅!
곧, 웅혼한 공명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마나와 생기(生氣)는 결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내가 불어넣은 기운을 반대로 치환하면…
두근!
“……!”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분명히 전해졌으니까.
귓가로 들려오는 생생한 심장의 박동을.
홱!
그 즉시, 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나, 나도 들었어.”
가장 먼저 손으로 입을 가린 실비아가 반응했다.
유리나는 아예 제 귓가를 재단 근처로 가져다 대기까지 한다.
“딱히 큰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고, 아마 금세 깨어날 것 같은데? 마음의 준비는 미리 해놓는 게 어떠니?”
“뭘 마음의 준비까지나…….”
“쌘 척하기는. 여자애들 앞에서 질질 짜지 말고. 따로 하고 싶었던 말이라도 있을 거 아냐?”
“안 울 거거든요?”
이리나의 말에 가볍게 일침을 가한 내가 이내 정면을 바라봤다.
“…으음…….”
“……!”
한데, 때마침 당신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대략 마나가 전신을 3번 정도 순환했을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갑작스레 스르르, 들어 올려지는 것이 아닌가?
“하, 학장 할아버지…?”
다시금 시야가 희뿌옇게 변해갔다.
“여기는…?”
곧 완전히 상반신을 일으킨 학장 할아버지가 가볍게 눈을 치떴다.
“너… 설마 세타냐?”
“…….”
하고 싶은 말은 굴뚝같이 많았다.
한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석상처럼 제자리에 굳어 있자, 이내 당신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표정이 왜 그러느냐? 꼭 죽은 사람이라도 보는 것처럼.”
“저, 저는… 끄윽.”
결국 내 목소리에서 물기마저 묻어났다.
“…이런. 진짜 그리 생각했나 보군. 나 원, 대지의 마법사가 땅 밑에 갇혀 죽는다는 게 말이 되겠느냐?”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가슴속에 담아둔 말은 채 내뱉지도 못했기에.
지금이 아니라면, 또 영영 당신을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여, 이제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
찰나, 크게 뜨여진 학장 할아버지의 눈이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당신은 내가 봐왔던 그 어떤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보고 싶었단다, 아들아.”
***
부서진 이그드라실의 앞.
“…쿨럭!”
흑의 인영이 울컥, 핏물을 토해냈다.
놀랍게도 그의 실체는 7,000살을 훌쩍 넘긴 블랙 드래곤이었다.
그런 규격외의 존재가 지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로드는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쓰러진 라크제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인영이 존재했다.
에메랄드빛 머리칼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미남자.
전대 로드이자 바람의 일족, 아이젝이었다.
다만, 그런 그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전신으로 침투한 마기로 내부의 마나가 폭주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허무하군. 이만한 힘을 얻었어도, 일족 역사상 최악의 괴물에게는 무리라는 뜻인가?”
“칭찬인가? 만약 아이리스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는 아니다. 라크제.”
“…….”
“이만 가지.”
퍼석!
순간, 연신 꿈틀거리던 라크제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던 그의 육신은 이내 축하고 늘어졌다.
존재의 격을 생각하면, 실로 허무하기 그지없는 최후였다.
“아, 아이젝. 꼭 그렇게까지 했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배신한 일족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생각은 마시지요, 로드.”
“그게 아니라, 같은 일족을 소멸시키면 아이젝 당신도 신의 벌을 받게 될 거예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말이에요.”
“그거야 뭐, 제가 감당해야지요. 그리고, 벌을 받을 일이라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찰나, 로드 일루니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선 상대가, 제 목덜미를 틀어쥐었기에.
“…컥!”
“로드, 그것 아십니까? 나는 인간이 역겨웠습니다. 아니, 단순히 역겨움을 넘어 증오스러웠지요.”
“아…이…젝…!”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옛날 고대 시대, 인간에게 목숨을 잃은 최초의 해츨링은, 다름 아닌 제가 직접 낳은 자식이었으니까요.”
“…….”
일루니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상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그래서 더욱 안타까워했다.
기실, 일족 최강자로 군림하던 아이젝이 예정보다 일찍 로드에서 물러난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었기에.
“원래는 한 나라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의 씨를 말리려고 했습니다. 감히 하등한 머저리들이 내 새끼를 건드렸으니… 그에 대한 벌은 톡톡히 치르게 해줘야지요.”
“…….”
“한데도 왜 원래 계획대로 하지 않으셨는지, 아마 로드는 모르실 겁니다.”
폭주하는 마나의 폭풍우 속에서 아이젝의 고저 없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때마침 웬 별종 놈이 제게 내기를 걸어오더군요. 비록 용서받지 못할 일을 벌였지만, 인간 전체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 그걸 제 놈이 직접 증명해 보이겠답니다.”
“…….”
“모든 인간이 악하지는 않다. 인간의 성악설은 그저 당신의 복수심에서 발아한 개똥철학일 뿐이다. 하니, 너 자신을 이 이상 괴롭히지 마라. 뭣하면 ‘내기’를 해도 좋다.”
“…….”
“솔직히 기도 차지 않았습니다. 한데, 내기의 내용만큼은 제 흥미를 자극하더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제 스스로 ‘인간’이 되어 증명하겠다니…….”
“……!”
“네, 맞습니다. 그게 우리 일족의 역사에는 수치로 기억되는 최악의 망룡, ‘라그하일’이었습니다.”
부르르르.
목덜미를 붙잡힌 일루니스가 가늘게 전신을 떨었다.
실로 충격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닐 수 없었기에.
“머지않아 놈은 정말로 소울 이스케이프를 시전하더군요. 이후의 일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종족 자체는 아니지만, 나는 문명이 퇴보할 정도로 인간을 죽이고 또 죽였고, 그것마저 질려갈 때쯤 스스로 로드에서 물러나 수면기에 빠져들었습니다.”
“…….”
“남은 뒷일은 모두 이전부터 점 찍어둔 녀석에게 맡길 계획이었는데… 유일하게 후계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곳에 관심을 가지더군요.”
“아… 이리… 스…….”
“예. 그 녀석도 소울 이스케이프에 흥미를 보이덥디다.”
“…….”
“사실 라그하일과의 일은 내게 흑역사나 다름없습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원래 목적대로 인간들의 씨를 말리는 일도 가능했을 텐데… 끝내 녀석과의 약속이 목에 가시처럼 걸린 것도 사실이니까요.”
“…….”
“아무튼, 내가 후계라 생각했던 아이리스가 한낱 망룡 따위에게 영향을 받는 모습은 더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또 모르지요. 나는 그 녀석에게서, 죽은 자식의 모습을 찾으려 했는지도…….”
위태위태하던 일루니스의 동공에서 빠르게 생기가 사라져 갔다.
수명이 다한 육신으로 이미 상당한 무리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아이젝의 억센 악력은 차치하고, 폭주하는 마나까지 버텨내지는 못한 것이다.
홱! 털썩!
직후, 아이젝의 손짓 한 번에 일루니스의 육신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제 손에 또 하나의 일족이 스러졌음에도, 아이젝은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직후, 그는 거침없이 한 곳으로 나아갔다.
“이봐, 라그하일이여.”
“……!”
“수천 년이 지난 이제야 묻는다.”
“…….”
“인간으로 살아보니 어떤가. 지금도 네 생각은 같나?”
“…….”
예의 이그드라실의 앞.
어느새 칠악과의 전투를 끝낸 제노스가 척하니 창을 겨누었다.
“물론.”
***
리비아의 북문 인근.
학장 할아버지와의 감동적인 해우 이후, 나는 곧장 이곳으로 돌아왔다.
지금 막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전에 내가 명했던, ‘대규모 워프’가 완성되었다고.
“곧 테라 북쪽 지역에서 연합군과 제국군이 충돌할 예정이라고 해.”
“…그건 의외네. 사령관인 레오나르도 대공이 전사했으니, 일단은 후퇴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별도로 황제의 명이 있었다나 봐.”
재차 이어지는 실비아의 보고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두 십이월이라는 어마어마한 전력이 사라졌다곤 해도.
명실상부 대륙 최강인, 수십만 제국군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을 상대로 아군이 얼마나 더 버텨줄지는…
“…전적으로 카이클 공작에게 달렸겠지. 작전을 서두를 필요가 있겠어.”
이내 내 시선이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 가만히 내 쪽을 바라보는 학장 할아버지가 있었으니까.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세요?”
“그냥. 고작 몇 년 사이, 내 새끼가 이리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원래부터 제가 좀 잘났었지 않나요?”
“적어도 겸손이라고는 모르는 그 시건방진 성격은 여전하구나.”
“흐흐흐.”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린 내가 이윽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저 세계에서 가져온 그것들, 실전에서도 이용할 수 있겠죠?”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살펴본 바로 큰 문제는 없을 게다. 부족했던 건 그저 ‘동력’ 하나뿐이었으니까.”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곧장 전장에 투입할 계획이었는데… 마침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응?”
“그것들과 함께 제가 직접 킹(King)을 노리겠습니다. 아, 여기서는 킹이 아니라 엠페러(Emperor)인가?”
“…네 계획은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다만,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당신의 우려에, 내 입가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두고 보세요. 처음 저를 거두셨을 때의 그 생각, 틀리지 않으셨다는 걸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여 드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