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최종장(2)
서걱!
“…….”
라포르테가 가만히 전방을 바라봤다.
손가락 두 마디에 검기를 덧씌워, 허공을 향해 거볍게 휘저은 직후였다.
우지직! 쿠구구구궁!
순간, 높이 십수 미터에 이르는 아름드리 거목이 통째로 쓰러졌다.
전신에 힘이 넘쳐흘렀다.
한때 마나 홀이 완전히 부수어진 기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대단하군.”
몸 상태를 점검할수록, 감탄만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기존의 마나가 ‘마기’로 대체되었다는 것 외엔, 경지 자체가 진일보한 느낌.
“…계약은 간단했고, 큰 힘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 이런 걸 제약 없이 무한정 해낼 수 있다면…….”
일순, 라포르테가 저도 모르게 온몸을 오스스 떨었다.
가히 일인 군단이 아니라, 일인 국가쯤 되지 않을까.
그것도, 왕국이 아니라 최소 대륙 제일이라는 제국 수준의.
빙글.
어느새 돌아서는 라포르테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자리해 있었다.
“…나는 참으로 엄청난 존재를 생에 두 번째 주군으로 모신 것 같군.”
***
“흠…….”
블랙 드래곤, 라크제가 가만히 제 턱을 쓰다듬었다.
눈앞에 자리한 골치 아픈 두 존재는 고사하고.
유일한 아군들도 속절없이 무너진 직후였다.
“지엔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때마침 분노로 가득한 지로시의 고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이에, 라크제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이그드라실을 부수고 암흑 포탈까지 개방했건만… 마왕의 권속이라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그 근본은 인간이라는 건가?”
다만, 그들을 상대하는 두 남녀 또한 ‘순수 인간’이라는 사실이 문제였지만.
특히나 사내아이 쪽은, 마법에 대한 응용력이나 이해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진짜 인간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대단하군. 이름이 제노스 델 카이클이라고 했던가?”
“한눈팔 틈이 있는가? 라크제여.”
“…아이젝. 후후후.”
그제야 라크제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에메랄드빛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른 미남자가 서늘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前)대 로드, 바람의 일족 아이젝.
기실, 그는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로드에 올랐을 정도로 강한 드래곤이었다.
허나…….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더욱이 마기가 범람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도리어 내 쪽의 승산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터.”
바로 곁의 당대 로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수명은 다했으며.
9써클 마법을 단 한 번만 사용해도 당장에 비틀거릴 허약한 상태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리나, 그 실버 일족의 계집애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계에 변고가 발생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기 마왕의 권속들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이토록 속절없이 밀리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드래곤의 합류는 라크제에게도 크나큰 부담이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
찰나,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온 직후였다.
그 즉시, 라크제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콰쾅! 콰콰콰콰콰콰콰쾅!
보이지 않는 무형의 예기가 사방을 할퀴어댄다.
압축된 바람이, 뒤늦게 ‘펑! 펑!’ 하고 터져 나갔다.
8써클 마법, 윈드 스톰(Wind storm).
그 흔한 캐스팅조차 없이 시전된 초거대 마력의 결정체가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있음이었다.
“…아이젝. 지금에 와서 막으려 해봤자 ‘마계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부서진 결계는 다시 회복시키면 그만이지. 내게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대신 그대의 수명도 상당 부분 깎여 나가겠지. 시간을 거스르는 건 신이 기꺼워하지 않는 일. 아이젝이여, 그대에게 중간계가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더욱이, 저 포탈 너머의 일곱 마왕을 홀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이젝이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라크제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봐, 라크제. 나는 한때 로드까지 해 먹었던 존재다. 그런 내가 천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멍청이로 보이느냐?”
“무슨…….”
“일곱 마왕은 저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도 이미 느끼고 있을 텐데?”
“……!”
라크제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물며 내가 로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무슨 일을 해왔는지 네놈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할 테지?”
“…….”
“궁금하지 않나? 참고로 유체 이탈 연구 따위는 아니야. 나는 오히려 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지.”
“기원… 이라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니까. 시기가 너무 묘하지 않나? 유체 이탈 마법이 갑자기 유행하게 된 그 타이밍이 말이다.”
“…….”
“일족들은 그저 한 미친 망룡의 기행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쎄. 나는 언제나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삐뚤어진 드래곤이라서 조금 다르게 생각했거든.”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아이젝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과연 ‘유체 이탈’ 마법을 펼쳐 모든 드래곤이 사라졌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존재들은 누구일까?”
“……!”
“지금과 같은 상황만 봐도 답은 간단하지. 바로 ‘마계’다.”
말을 마친 아이젝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에, 라크제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애당초 유체 이탈은 이전부터 마계의 존재들 사이에서나 유행하던 흑마법이었다. 그 지식을 최초로 가지고 온 것이, 우리 일족의 망룡인 라그하일이었고.”
“…….”
“여기서 문제. 하면, 그 지식을 건네준 존재는 누구일까?”
아이젝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언제 마기의 폭격이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혼(魂)과 관련된 건 마계에서도 최상위로 취급되는 흑마법이지. 그것도 마왕쯤은 되어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즉, 그 마왕들 중 하나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지식을 공유해줬다는 얘기가 되는데…….”
“소설 한번 잘 쓰시는군.”
“끝까지 들어봐라. 여기서부터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니까. 이건 라크제 네놈도 잘 모르겠지만, 약 이천 년 전 마계는 이미 한 존재가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
“…뭐?”
“탐욕의 마왕.”
“……!”
라크제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어느새 상대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다.
“왜 일대의 마기가 네 생각보다 약한 건지 이제는 알겠나? 저기 있는 건, 탐욕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일순, 지진이 난 라크제의 동공이 한쪽을 향했다.
예의 암흑 포탈 너머였다.
그곳에는, 여전히 일곱의 인영들이 제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게… 껍데기라고?”
“확실하게 깨달았겠지? 너는 그저 이용당한 것일 뿐이다. 이 모질이 망룡아.”
“…크크크크크크크.”
직후, 라크제가 낮은 광소를 터뜨렸다.
잠시 멈칫한 아이젝이 곧장 고개를 갸웃한다.
“설마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
“아이젝. 너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이다. 추론을 했으면, 결론도 똑바로 냈어야지.”
“…뭐라고?”
“마계 일통을 이룬 마왕이 고작 그곳만으로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나? 경쟁자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그저 저만의 세상에서 평화로이 지낼 족속이라고. 진정 그리 판단하나?”
“……!”
“반대로 내가 묻지. 하면, 네가 언급한 최후의 마왕이자 마계 역사상 최악의 생명체인 그 탐욕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순간, 아이젝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느낌표가 떠올랐다.
어느새 의문으로 가득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라크제가 새빨갛게 미소 지었다.
“이미 이그드라실이 파괴된 이상, 암흑 포탈은 대륙 어디에서든 재생성해 낼 수 있다, 이 모질이 전대 로드 놈아.”
***
한편.
“지, 지저 세계라니?”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도무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도 이렇게 빨리 소득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미 지저 세계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있던 분이 계시더라고.”
“그, 그게 누군데?”
“이리나 씨야.”
“……!”
대답은 유리나가 아닌 실비아에게서 흘러나왔다.
찰나, 내 동공이 좌우로 요동쳤다.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네?”
“…그럼 뭐야. 설마 이리나 씨도 세타한테 흑심을 품고 있었다는 건가?”
“너도 1절만 해, 유리나.”
“뭘 1절만 해. 부탁도 안 했는데 그 아가씨가 왜 제 발로 그만한 수고를 감수하냐? 에잉, 그쪽은 루나보다 더한 경쟁자인데…….”
뒷얘기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지저 세계’라는 한 단어만이 내 머릿속에 웽웽 맴돌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리나의 행동은 나로서도 전혀 뜻밖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걸이를 빌미로 그간 얼마나 많은 노가다(?)를 시켜왔던가.
드래곤이 아니라, 거의 ‘움직이는 워프 게이트’쯤으로 취급해 왔건만.
“…하긴, 이리나 씨가 유독 세타에게만 태도가 남다르기는 했지.”
“그러체.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니까? 관계를 의심한 사람들만 몇 명인데.”
“뭐, 다른 사람들을 보는 눈빛만 봐도 마치 벌레를 보듯 싸늘하기 그지없었는데, 적어도 세타에게만큼은 아니었으니까.”
두 여인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의심 어린 시선을 던져올 정도로.
“둘이 뭐 있냐?”
“있긴 뭐가 있어. 이런 상황에서 그딴 농담이 나오냐?”
“당장 진실을 고하지 않으면 이 몸도 네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놓지 않겠다.”
“…….”
이어지는 유리나의 으름장에 내 인상이 팍하고 구겨졌다.
“아주 좋으시겠어? 여러 방면으로 능력이 뛰어나셔서 말이야.”
“됐고,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지저 세계에 대한 얘기부터 해봐.”
“흐음…….”
잠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유리나가 이내 제 어깨를 으쓱한다.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나와 실비아는 리비아의 왕실 도서관을 뒤지고 있었어. 다행히 그곳만큼은 멀쩡했거든.”
“그런데?”
“한데, 의외로 그곳에 먼저 온 손님이 계시더라고.”
“그게 이리나였다?”
“그래. 우리와는 달리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모양새였지.”
하기야, 드래곤인 이리나라면 지저 세계의 존재를 알고 있던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그 추가적인 무언가가 뭔데?”
“입구야.”
“입구……?”
“지저 세계로 향하는 입구가 바로 그곳이었거든.”
“……!”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다.
“어, 어떻게……?”
너무 당황해, 이제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리비아의 옛날 이름이 뭔지 알아?”
“리비아의 옛날 이름……?”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내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대체 왜 진즉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고대 유일의 제국, 리바이스……!”
“그래. 참고로 그 찬란했던 마도 문명의 수도가 바로 이곳이었어. 지저 세계는 바로 그 시절에 가장 활발하게 개발과 연구가 진행 중인 영역이고.”
이윽고 말을 마친 유리나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제 잘 알겠지? 우리는 지금, 그 중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