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마계화(1)
“그보다, 잠시만 둘이서 얘기 좀 하자.”
“예?”
갑작스레 분위기를 잡는 스승님을 보며, 순간적으로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눈치 빠른 실비아와 스실라 씨가 곧장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혹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신다던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불러주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치유의 마탑주 님.”
“뭘요.”
생긋 미소 지은 스실라 씨가 이내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너도 얼른 가라.”
“…말 안 해도 가려고 했거든요?”
“나 환자다. 감정 소모가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는 잘 아실 테고.”
“근데, 나한테는 안 고마워요?”
“네가 뭘 했다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만이 간호의 전부는 아니죠. 변태 아저씨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기는 알아요? 피딱지들을 닦아내고 소독하는 데만 장장 반나절은 걸렸다고요.”
“기어이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셔야겠다?”
“싫으면 나중에 제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시던가요.”
새초롬하게 대꾸하는 실비아를 보며 스승님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셨다.
“너한테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부탁도 언제든 들어주지. 하나가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하면 가감 없이 말만 해라.”
“…왜 이래요? 갑자기 철이라도 드신 사람처럼.”
일순, 스승님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번져 갔다.
“물론, 이런 몸이 된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돼요.”
“……?”
“‘환자한테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확실하게 부려 먹을 계획이거든요.”
“…큭. 그것참, 기대되는구먼.”
“부디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제 할 말을 마친 실비아도 곧장 자리를 떠나갔다.
이윽고 우리 둘만 남게 되자,
“세타.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네?”
“스승의 복수를 좀 해줘야겠다. 대장의 복수도 네가 다 처리해 줬으니, 내 일도 해결해 줄 수 있겠지?”
“복수라면… 황제 말씀이세요?”
“그건 정당한 싸움이었어. 그저 내가 약했기 때문에 진 게지. 구차하게 황제에게 복수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
“그럼…?”
“네게도 스승이 있듯, 내게도 스승이 있었다. 정확히는 내 스승님에 대한 복수를 해줬으면 한다.”
“……!”
의외의 말에,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대장처럼 열두 명이나 되는 마탑주들을 모조리 다 잡으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딱 한 명만 잡으면 돼.”
“한 명…?”
“참, 제자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원래 그 인간은 내 몫이었거든. 다른 사람에게 패해서는 안 되고, 패할 인간도 아니니까. 허나…….”
순간, 말끝을 흐리던 스승님이 내 눈을 직시했다.
“너라면 얘기가 다르지. 나 따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제자인 너라면.”
“…어울리지 않게 웬 칭찬이세요?”
“네가 요새 그렇게 잘 나간다며? 뭇 대륙인들에게 ‘대륙제일마’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로 불릴 정도로 말이다.”
“크흠… 또 민망하게 대륙제일마는 무슨…….”
허나, 자못 머쓱해하는 나와는 달리 스승님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졌다.
“참고로 그 사람은 ‘대륙제일검’이다. 그것도, 너와는 달리 장장 수십 년 동안이나 최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괴물이지.”
“……!”
“단언컨대, 기사의 시대라 불리는 작금의 대륙이라면… 네가 패할 가능성도 상당히 농후하다. 아마 나 말고도 열에 아홉은 그리 예상하겠지.”
“음…….”
“이게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직후, 턱하니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스승님이 말을 마친다.
“네가 이기면 복수는 물론이고, ‘시대’ 자체가 뒤바뀌게 된다는 의미다.”
***
- 크워어어어어어어어!
“…….”
앤그리가 말없이 정면을 바라봤다.
제자리에서 꼿꼿이 존재감을 뿜어내던 이그드라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두 쪽 난 거목만이,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내고 있을 뿐.
그리고 그 사이로 무수한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수가 사라지는 즉시 생성된 ‘암흑 포탈’의 결과물이었다.
“스으으으읍.”
순간, 앤그리가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전신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지금과 같은 기분이라면, 상대가 그 누구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크하하하하하! 앤그리, 이거 뭐야, 이거 뭐냐고오오오오오!”
제 키보다 더 큰 대낫을 휘두르며 지로시가 광소를 터뜨렸다.
어느새 전투를 멈춘 적발의 사내도,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만 본다.
“이 개자식들. 기어이 이그드라실을…!”
“파이크. 너도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그 입 닥쳐, 이 미친 광룡 새끼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신의 저주를 받는 존재다. 자의적인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지. 하니, 그런 신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벌을 줘야 하지 않겠나?”
“그 벌이라는 게, 고작 세계수를 파괴하는 일이냐?”
“‘고작’이 아니지. 이그드라실을 부숨으로써, 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이곳 중간계를 완전히 악의 구렁텅이에 처넣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라크제가 미소 지었다.
흑의 마나와 마기는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나, 블랙 드래곤은 일족들 중 유일하게 마나를 마기로 ‘치환’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
“싸움은 여기까지다.”
“……!”
순간, 파이크가 ‘흡’ 두 눈을 치켜떴다.
그 말과 동시에, 정면에서 흑색 광선이 쇄도해 왔으니까.
투-콰아아아아아앙!
엑스자로 교차한 파이크의 팔 위를, 예의 흑색 광선이 두들겼다.
고작 한 번의 손짓.
그것만으로, 피아크의 거구가 최소 일백 미터나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호오?”
허나, 정작 그 일을 행한 라크제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부지불식간, 그조차 무시하지 못할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기에.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무려 ‘일곱’씩이나.
“훗. 몸이 상당히 달아올라 있던 모양이군.”
예의 암흑 포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내 라크제가 그들의 정체를 중얼거린다.
“마왕(魔王).”
***
이튿날, 테라의 북부 인근.
“테라가 이렇게 먼 곳이었나?”
“그게… 북부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나 다름없던 마그릭 협곡이 무너져, 어쩔 수 없이 우회하다 보니 진군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행한 것도 예의 그 아이라지?”
“…예. 대륙제일마의 소행입니다.”
“크크크, 이번에야말로 꼭 만났으면 좋겠군.”
제국의 대공, 레오나르도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현재 테라 북부군의 추정 병력은 5만. 지휘관은 카이클 공작입니다.”
“폐하는?”
“귀국하셨습니다. 황성에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하셔서…….”
“호오? 나보다도 전쟁에 환장하시는 분인데, 얼마나 중한 일이기에 귀국까지 하신 게지?”
“…연유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그제야 레오나르도가 고개를 돌렸다.
연이어 보고를 올리는 사내 또한 그만큼은 아니지만 대륙에서 이름 높은 검사였다.
“라포르테.”
“…예, 대공.”
“전투가 벌어지면, 자네는 구태여 전장에 끼어들지 않아도 되네.”
“그게 무슨…?”
“애초에 병력이 너무 과하지 않나? 고작 테라의 5만 병력을 상대로, 정예 제국군 10만에 십이월이 셋이라니.”
“하지만 적군에도 고급 전력이 얼마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누가 오든, 나와 파이만 둘이면 충분하네. 명색이 대륙에서 첫째와 둘째가는 검사가 아닌가?”
“…….”
직후, 라포르테의 시야에 또 다른 사내가 잡혔다.
그 말대로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는 파이만 공작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강자였으니까.
‘…이번에야말로 테라가 점령당할지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왜, 혹시 걱정되나?”
“예?”
“듣자 하니, 대륙제일마는 돌아가신 이리스 황자 전하의 친자라고 하던데?”
“……!”
찰나, 라포르테가 움찔 몸을 떨었다.
허나, 놀란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출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들어주기 힘든 헛소문이군요.”
“헛소문이라고 생각하나?”
“아시다시피, 대역죄인 이리스 폰 트쉬베르와 그 자식의 죽음은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순간, 레오나르도가 징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베어 물었다.
“그랬지. 그리고, 그 손으로 직접 이리스 전하의 목을 베었었지?”
“…….”
라포르테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떠보기 위한 수작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으니까.
여기서 발끈해 봐야 상대가 원하는 대로 되는 셈이었다.
“그게 폐하의 명이셨으니까요.”
“크크크. 그거야 잘 아네만, 그래도 쉽지 않았을 거야. 일평생을 제 친부모보다 더 떠받든 ‘주군’이 아닌가? 그런 이의 목을 베는 일인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제국을 배신한 이상, 그자는 주군도, 황자도 아닌 일개 대역죄인에 불과합니다.”
“흠…….”
이어지는 말에, 이윽고 레오나르도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참 재미없는 사내야. 그렇지 않나, 파이만?”
“…장난이 너무 짓궂으십니다, 대공.”
“뭐야, 같은 편이었나?”
“제가 봐온 라포르테 공작은 누구보다 폐하를 위해 노력해 온 충신입니다. 방금 대공의 발언은, 군의 사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순간,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라포르테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편을 들어준 파이만 공작이 고마웠기 때문에?
아니, 도리어 그 반대다.
피눈물을 흘리는 주군의 목을 벤 게 이 손이라면.
그 육신을 갈가리 찢어 들개들의 밥으로 던져 준 것은 저자, 파이만 공작이었으니까.
“에잉, 쯧. 아무리 늙은이가 장난을 좀 쳤기로서니, 그리 정색할 것까지야.”
완전히 흥미를 잃은 얼굴이 된 레오나르도가 이내 말머리를 빨리했다.
…진심으로 싫었지만, 라포르테는 감사의 의미로 파이만 공작을 향해 목례했다.
곧 제 고개를 주억인 상대도 이내 전방으로 나아갔다.
‘…언젠가는 네놈들도 똑같이 이 검으로 벨 것이다, 반드시.’
한데, 그 기회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 라포르테 공작님.
“……!”
일순, 그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 티 내지 마시고 듣기만 하세요. 저 세타 쿤 이그니스입니다.
‘어떻게…?’
- 오면서 보니까 선두와 본대의 간격이 상당히 떨어져 있던데요. 물론 자신감의 발로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다시없을 기회로 보이거든요?
‘…….’
- 근데, 아무리 기습이라도 둘은 무리일 것 같고. 한쪽은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재차 전해지는 머릿속의 의념에, 라포르테의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그리곤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은 앞서가는 파이만 공작의 등짝에 고정한 채로.
- 레오나르도 대공은 제가 맡지요. ‘셋’하면 동시에 움직이는 걸로. 간단하죠?
이번에도 라포르테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 그럼, 하나, 둘…….
마지막 숫자는 라포르테의 몫이었다.
머릿속에 ‘셋’이라는 의념이 미처 울리기도 전에,
“셋.”
스팟!
그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코앞에서 나아가는, 예의 파이만의 등을 향해서.
번-쩍!
“뭣!?”
서걱!
곧 허공을 수놓는 은빛 실선과 동시에, 섬뜩한 파육음이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