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포 더 킹(3)
나는 가만히 전방을 굽어봤다.
“크으으으…….”
“네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딴 개짓거리를. 당장 풀지 못하겠느냐!?”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 사악한 종자야!”
그런 내 앞에, 네 명의 왕이 줄줄이 묶여 있었다.
물론 밧줄 따위가 아니었다.
마스터조차 쉽사리 풀 수 없는 6써클 마법, 마나 웹(Web).
상황이 이리되자 주변의 기사들조차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굴려댔다.
“이게 뭡니까? 그래도 나름 일국을 이끄는 지배자들이신데, 부하들 앞에서 모양 빠지게 말입니다.”
“놈! 이제는 모욕까지 서슴지 않는구나. 당장 네놈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성싶으냐?”
“제 걱정은 해주실 필요 없구요, 대화만 잘 통한다면 네 분을 풀어드릴 의향은 있습니다만.”
“……!”
순간, 예의 왕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푸, 풀어줘? 그게 정말인가?”
“미우나 고우나 ‘같은 편’이니까요. 그도 아니면, 테라는 연합에 끼워 주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그, 그럴 리가! 테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연합의 일원이지. 암, 그렇고말고!”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이루는 게르힘의 국왕을 보며,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물론 다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일종의 ‘밀고 당기기’였으니까.
“그 대신, 절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응? 돕다니? 뭘?”
“손잡기로 해놓고, 먼저 배신을 때리셨지 않습니까? 걱정돼서 한달음에 달려온 저만 바보가 됐습니다. 설마하니 황제와 그런 작당을 꾸미고 계실 줄이야…….”
“오, 오해네! 자네가 잘못 들은 거야.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게르힘의 국왕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왕들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쳐대기 시작한다.
“이런 차선책도 있다… 하는 대화만 오가는 중이었네. 물론 나는 그 계획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어!”
“신을 모시는 자로서, 어찌 그 사악한 무리와 손을 잡을 수 있겠나?”
“황제는 힘만 센 머저리다! 우리 트루크 인들은 그런 부류의 사내를 인정하지 않아. 자고로 남자라면 지성과 무력, 둘 모두를 겸비해야지! 암!”
순간적으로 ‘지랄’이라는 두 글자가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아까는 황제의 똥구멍도 핥을 기세더니, 인정 안 하기는 개뿔이.
“아니요. 무언가 오해하시나 본데, 저는 딱히 그 부분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응? 그게 무슨…?”
“연합을 버리고 제국으로 갈아타신다고 해도, 저는 크게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네 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허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왕 제국과 손을 잡기로 했다면, ‘줄’은 확실한 것으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줄…?”
“대륙 전체로 보면 소국(小國)에 불과한 테라조차도 권력 투쟁으로 오랜 내전을 치렀습니다. 땅덩어리가 그보다 족히 수십 배는 더 큰 제국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권력 투쟁? 하지만 현 황제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전쟁이 끝나도 제국은 전혀…….”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적겠지요. 하지만.”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전방을 직시했다.
지금부터가 핵심이었으니까.
“만약 이 시점에서 황제의 대항마가 등장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대항마라니…?”
“가령… 사람들에게서 잠시 잊혀진, ‘비운의 황족’ 같은 존재 말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봐라. 원, 이리 답답해서야.”
트루크의 국왕 와카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하면 본론만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현 황제의 동생, 이리스 폰 트쉬베르가 바로 제 아버지입니다.”
“……?”
일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허나, 그 반응도 찰나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대에 경악의 폭풍우가 휘몰아쳤으니까.
“뭐어어어어어어어엇!?”
“이제 아시겠습니까? 제국으로 돌아가면, 저도 정당한 ‘황위 계승권자’라는 뜻입니다.”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대륙제일마가 화, 황족이라니!?”
“현실이 그렇습니다. 더불어, 저는 대륙 통일이니 하는 야망 따위는 쥐똥만큼도 없습니다.”
“……!”
그 즉시, 네 왕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덟 쌍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제 얘기는 끝났습니다. 하니, 왕들께서 직접 결정하시지요.”
“…….”
숨 막힐 듯한 침묵 속, 내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이들은 결코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령의 한낱 소군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도 아니면, 지금처럼 ‘왕’의 지위를 유지하며 뭇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시겠습니까?”
이대로 거부하기에는 눈앞에 놓인 떡이 너무나 컸으니까.
***
세계수 이그드라실.
그 새하얀 거목 앞에, 세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피식 웃음을 터뜨린 라크제가 세계수의 겉면을 쓰다듬었다.
이미 호수를 가득 채운 물은 온데간데없었다.
라크제의 브레스 한 방에, 수만 톤의 물은 태반이 증발한 지 오래였으니까.
“시간 끌 여유는 없겠지? 내가 할까, 아니면 그대가 할 텐가?”
“…제가 하지요.”
직후, 앤그리가 이그드라실로 다가섰다.
곧 그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고.
이내 ‘스으으읍’ 숨마저 들이쉬었다.
“잠시 물러서 있지.”
“응? 아, 아니. 아, 알겠습니다.”
“…존대를 하든, 하대를 하든 하나만 해라. 나는 그런 겉치레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니까.”
“크, 크흠. 그, 그럼 그럴까… 요?”
그럼에도 지로시는 섣불리 말을 놓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흑의 사내.
블랙 드래곤 라크제의, 전혀 인간 같지 않은 힘을 이미 두 눈으로 목도했기 때문이다.
‘…아, 하긴 진짜 인간도 아니기는 하지만.’
한참이나 뒤로 물러난 지로시가 이내 제 머리를 긁적이던 순간이었다.
“라크제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
우렁한 고성이 고막을 때렸다.
브레스와 함께 소멸당했을 거라 생각했던 존재.
예의 적발의 사내가 한층 너덜해진 옷차림으로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쯧. 저건 내가 맡지.”
가볍게 혀를 찬 라크제가 다시금 시야에서 사라졌다.
번쩍! 쾅! 콰아아아아아앙!
연이어 폭음이 울려 퍼진다.
곧 투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친다.
그 사이에서, 지로시는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이 괴물 같은 놈들…….”
콰드드득!
“후우우…….”
앤그리 또한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 다리를 단단히 고정한 채 전신으로 마기를 뿜어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온 힘을 주먹 하나에 오롯이 집중시켰다.
곧이어,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윽고 포탄과도 같은 앤그리의 주먹이 이그드라실과 정면에서 충돌했다.
***
게르힘의 일을 마무리 짓고, 나는 레이브 성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네 왕은 내게 적극 협조하기로 약조했다.
내가 황족이라는 얘기는, 이미 공공연히 퍼져 있던 소문이었으니까.
이제는 이다음이 궁금해졌다.
과연 내 태생의 비밀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그 전에, 계획한 작전부터 성공시켜야겠지만.”
나는 거침없이 성문을 열어젖혔다.
1층 로비는 여전히 성이 아니라 의원을 방불케 했다.
족히 수백 개는 되는 병상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
한쪽 구석에, 스승님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누워 계셨다.
예의 한쪽 다리를 잃은 채로.
다만, 이전과 달리 의식은 완전히 회복하신 모양이다.
“스승님.”
하여,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스실라 씨를 대신해 실비아가 곧장 반응한다.
“괜찮아.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거든.”
“너…….”
한데, 그리 말하는 실비아의 얼굴도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물론 그 이유는 분명했다.
“…의외네. 너랑 스승님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내가 그 정도 자각도 없어 보이니?”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인력 관리는, 참모로서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니까.”
그 순간, 스실라 씨의 마나가 점차 잦아들었다.
곧 감겨 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오셨어요?”
“네. 조금 쉬세요. 스승님을 치료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뭘요.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실비아와 똑같이 대답한 스실라 씨가 미소 지었다.
둘 모두 심신이 상당히 지쳤을 텐데도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에게 더 고마웠다.
“뭘 하다 이리 늦었냐?”
“누가 싸놓은 똥을 대신 치워야 했으니까요.”
“지랄. 스승은 이제 병신이 됐는데, 그깟 똥이 무에라고.”
장난스레 중얼거리는 스승님이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론 상당히 작위적인 표정이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괜찮아 보이냐?”
“…….”
“그리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라. 확 성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아 버린다?”
“…할 수 있다면 해보시던가요.”
“어쭈? 이제 뭐, 네가 더 세다. 이거냐?”
“…….”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대화는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직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아 올랐기에.
“뭐야, 너 우냐?”
“…….”
“푸헤헤헤헤헤헤! 동네 사람들, 이 새끼 운대요! 세상에, 명색이 마탑주라는 놈이 질질 짜기나 하고 말이야!”
“…….”
“너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하고 다니지 마라. 내가 다 쪽팔린다, 야.”
“…….”
나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제야 머쓱한 표정을 지은 스승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앗! 아직 일어나시면 안 돼요.”
“괜찮습니다. 이깟 다리 하나가 뭐라고.”
만류하는 스실라 씨를 향해 가볍게 손사래 친 스승님이 이내 내 코앞까지 접근했다.
슬며시 인상을 구기면서도, 남은 다리를 이용해 폴짝폴짝 뛰시는 그 모습을…
“…빌어먹을.”
나는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날 봐라.”
“…….”
“보라니깐?”
재차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내 고개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 눈에는 내가 불쌍해 보이냐?”
“…아니요.”
“그럼, 이제 완전히 한물간 퇴물처럼 여겨지냐?”
“그것도… 아니요.”
“물론 그리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
“설령 두 다리를 모두 잃어도. 아니, 사지 하나 없는 불구가 되어도, 나는 언제나 네 뒤에 있을 거다.”
“……!”
“스승이잖냐?”
주르륵.
결국 맺혀 있던 눈물이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뒤 말고 앞은 안 됩니까?”
“네가 인간 새끼냐? 방패막이는 힘들지. 보다시피 몸이 이 모양 이 꼴인데.”
“…….”
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스승님의 다리를 고쳐 드릴 방법을 찾기로.
‘데스 나이트’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딴 계약을 스승님이 받아들이실 리가 없다.
“얌마.”
“……?”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딱 세 가지 있다. 들어볼래?”
“…갑자기요?”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신 분을 스승으로 모신 거고.”
“…….”
“둘째는 이보다 나을 수 없는 동료이자 상관과 함께한 것.”
“…….”
“마지막은…….”
“그만, 그만하세요, 제발.”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마지막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인 일…’ 정도가 아닐까?
“그래도 소싯적에 여자 여럿 후리고 다녀서 후회는 없다는 거야.”
“…네?”
직후, 내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생각해 봐라.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보고 미혼인 채로 이 꼴이 되었다면, 얼마나 억울했겠냐?”
“…….”
“뭐, 이 얼굴이면 다리 하나 없어도 충분히 더 꼬실 수는 있을 테지만.”
“…….”
지금 이 순간,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 스승님 걱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