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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239화 (240/251)

239화. 포 더 킹(2)

“…큭…….”

기어이 앤그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과연 드래곤인가.

눈앞의 적발 사내는 괴물이었다.

칠악 제일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앤그리조차 전력을 다 해도 상대조차 되지 않는.

“음…….”

허나, 의외로 파이크의 표정도 썩 좋지는 않았다.

바위보다 더 단단한 주먹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단언컨대, 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마왕도 아니고, 고작 그 권속 따위에게…….”

찰박, 찰박, 찰박.

이윽고 파이크가 전방으로 나아갔다.

호수 뭍까지 밀려난 앤그리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순간, 그의 얼굴 위로 짙은 갈등이 떠올랐다.

이대로 도망쳐야 하는가.

아니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맞서 싸워야 하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스팟!

직후, 앤그리의 신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어딜!”

퉁!

파이크가 지체없이 잽을 뻗었다.

순식간에 어그러지는 주변의 대기.

한 박자 늦게 터져 나가는 공기의 압력.

퍼어어어엉! 촤아아아아아악!

곧장 강력한 풍압이 뒤를 따랐다.

호수가 몸서리치고, 수우(水雨)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직격탄을 허용한 앤그리가 피를 흩뿌리며 저만치 날아갔다.

덥썩!

“…쿨럭!”

순간, 거짓말처럼 앤그리의 신형이 멈춰 섰다.

마치 벽이라도 가로막고 있는 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그의 거구가 단단히 고정되었음이다.

앤그리는 그 상태로 연신 기침을 쿨럭였다.

“이봐. 괜찮나?”

“……!”

“너무 무모했어. 그래도 드래곤인데, 일대일로 덤벼들 정신 나간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제야 앤그리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웬 흑발의 인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일견,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상착의의 사내였다.

“대공…?”

“…네놈. 설마 라크제냐?”

“…….”

재차 귓가로 박혀 드는 목소리에 점차 앤그리의 초점이 맞춰져 갔다.

예상했던 이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

“광룡…!”

“오랜만이야, 파이크.”

블랙 드래곤 라크제가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곧 그가 쥔 검의 위로 불길한 마나가 아른거렸다.

“피차 대화는 필요 없겠지?”

“놈!”

쿠우우웅!

파이크가 강하게 호수를 밟았다.

그와 동시에, 파이크의 신형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바보 같은 짓을 하네. 그렇게 몸을 띄우면, 내 검은 어떻게 피하려고?”

“그까짓 젓가락 따위, 내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하다!”

“과연 그럴까?”

정말로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라크제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다만, 그로 인한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예의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는 흑의 마나는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했으니까.

핏!

“……?”

최초의 상처에, 파이크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점점이 맺힌 살갗의 핏물은 빠르게 호수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곧,

피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

지켜보던 앤그리의 입이 쩌억하니 벌어졌다.

고작 한 번의 휘두름.

허나, 최소 수백은 되는 듯한 검흔(劍痕)이 적의 신체 위로 아로새겨졌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악!

추락한 파이크의 신형은 또 한 번 주변으로 거친 물보라를 일으켰다.

전투는 그걸로 끝이었다.

물속으로 가라앉은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떠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갓 성룡 수준이라 그런가? 예상보다 훨씬 쉽군.”

“…….”

조용히 검을 거두는 흑의 사내를 보며 앤그리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한편, 리비아의 북문 인근.

“이렇게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르고만 있을 건가요? 뭐, 말 잘 듣는 개라도 되는 것마냥?”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전(前) 빙결의 마탑주, 에르사 아인하르트가 조심스레 제 의견을 피력했다.

한 떨기 차가운 꽃을 연상케 하던 그녀의 미모도 갖은 고생으로 이제는 상당히 시들해 있었다.

“끌끌끌. 따르지 않으면?”

“도망쳐야죠. 어차피 게이트 설치가 성공적으로 끝나도, 우리를 그냥 보내주지는 않을 테니까.”

“도망쳐도 금세 붙잡히고 말겠지.”

“그래서 계속 이렇게 있자고요?”

“그리 불안하다면, 차라리 세타 쿤 이그니스에게 충성 서약이라도 하는 건 어떤가?”

“……!”

순간, 에르사 아인하르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친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마탑주들이 동시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으니까.

“영감. 노망났어? 그딴 핏덩이한테 뭐? 충성?”

“세상에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지. 아니면 뇌전, 자네는 정말 리치라도 되고 싶은 건가?”

“리치 같은 소리하고 있네. 거짓 충성이라면 모를까, 나는 절대로 그 애송이 놈한테는 고개 못 숙여!”

“듣자 하니, 그의 스승이 다름 아닌 ‘빛의 마녀’라지?”

“……!”

“만약 우리가 여기 있다는 얘기가 그녀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그제야 엑스토나 제우스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빛의 일족, 아락서스들을 몰살시킨 주범이 바로 이들이었으니까.

빛의 마녀 세논 벤자민은 그 아락서스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리 따지면, 간다르 테이들러. 당신이 가장 위험한 것 아닌가요? 아락서스들의 육신으로 그 끔찍한 실험들을 행한 것을 떠올리면… 곱게 죽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끌끌끌. 그러니 내 말하지 않았나? 한시라도 빨리 통합 마탑주에게 충성을 맹세하자고. 설마하니, 스스로 개가 되겠다는 노인네를 죽이기야 하겠나?”

“…당신, 정말로 진심이군요. 마탑주로서의 자존심도 없나요?”

“나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네. 내 필생의 연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거든.”

“그 미친 키메라 얘기군요.”

이내 에르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나 더글린. 당신도 같은 생각인가요?”

“…뭐, 세타 쿤 이그니스가 역사상 유래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은 동감이니까. 그리고…….”

찰나, 말끝을 흐리던 그녀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저기 있는 제노스 델 카이클인가 하는 놈도 마찬가지고.”

“끌끌끌. 아무래도 대화는 이만하면 충분할 듯하군. 결국 양자택일이야. 이대로 새로운 마탑주에게 충성을 맹세할지, 그도 아니면 패배를 인정하고 깔끔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

“선택은 스스로 하는 거네만, 개인적으로 전자를 추천하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 않나? 참고로 나는 그가 돌아오는 대로 충성 서약을 할 생각이야.”

간다르 테이들러가 말을 마치자, 이윽고 주변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렇듯, 세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마탑을 통합한다는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게르힘 왕국의 연회장.

“길을 트시죠.”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오만하게 중얼거렸다.

“큭…!”

내 마나를 느꼈음일까?

이제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후, 후회할 짓 하지 마라. 이 많은 인원수를 상대로, 너 혼자 무얼 할 수 있겠느냐?”

“뭘,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대군(大軍)도 상대해 봤는데 이 정도야.”

“이곳에 있는 이들은 각국의 최정예다! 네가 경험해 온 이들과는 질 자체가 다르다는 말이다!”

재차 들려오는 게르힘 국왕의 목소리에 절로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지금껏 어떤 적들과 싸워왔는지 알게 되면 저따위 말은 못할 테지만.

이미 우위를 점한 이상, 구질구질하게 그런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됐고요. 아직 자각이 덜 되셨나 본데, 제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 네 분의 왕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인질이라고 해도 좋아요.”

“놈…!”

한 기사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얼핏 보기에도, 엑스퍼트 상급에는 이를 듯한 강자였다.

하니, 직감적으로 내 마나의 격을 느끼는 것이겠지.

“인질?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하!”

“……?”

한데 그 순간, 내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왕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옷차림의 중년 사내였다.

아니, 저건 숫제 옷이라기보다는 거적에 가까웠다.

소매가 없는 상의에, 팬티를 방불케 하는 짧은 반바지.

얼굴을 뒤덮은 수염은, 마치 ‘나 산적이요!’ 하고 외치는 듯했다.

“나는 트루크 왕국의 국왕, 와카다.”

“음…….”

그는 거침없이 내게로 접근해 왔다.

고작 3미터가량을 남겨두고 우뚝 멈춰 선 그는 곧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남부의 야만국, 트루크 왕국.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의 이 행동은 근거 있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강자존의 원칙에 따라.

그는 황제를 제외하고, 대륙에서 유일하게 왕이면서 ‘마스터’였으니까.

우우우우우웅!

“네놈을 보고 있자니,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르는구나.”

직후, 짙은 공명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곧 와카 왕의 손 위로, 선연한 오러가 솟아났다.

검이 없음에도, 의지만으로 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지.

저런 건 최소 숙련된 마스터가 아니고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단칼에 베어주마.”

물론, 나라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주변에 산재한 마나를 일시에 한곳으로 집중한다.

나아갈 방향은 명확했다.

지금 막, 내게 살기를 흩뿌리는 그.

퍼석!

“……?”

일순, 트루크 국왕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갑작스레 제가 생성해 낸 오러 소드가 부지불식간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당연히 내 솜씨였다.

달리 인간의 정점이라고도 불리는 8써클에 오르면, 실로 많은 일들을 행할 수 있었다.

가령, 눈앞의 이런 것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지정한 일대의 범위는 완벽한 무(無)의 환경이 된다.

“…안티 매직 필드 같은 건가? 근데, 괜찮겠냐? 공간의 범위 안에 드는 건, 네놈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건 또 글쎄요?”

“순수 신체 능력만으로 마법사 나부랭이가 이 나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저벅, 저벅, 저벅.

폭발적인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며 와카 왕이 천천히 내게로 접근했다.

그 얼굴은 여전히 자신만만.

“응?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은 비리비리한 놈아. 대답해 보거라.”

뚜두둑.

이제는 아예 보란 듯 제 관절을 꺾어대는 상대였다.

잠시 당황하던 기사들이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내 입가에 짙은 조소까지 베어 무신다.

“나 참, 웃기지도 않는구만.”

하여, 나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즉시,

퍼어어어어엉!

“꾸에에엑!”

“……!”

웬 돼지 멱따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내가 쏘아낸 에어 붐(Air bomb)에 직격당한 와카 왕이 저만치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주제를 좀 아세요. 아니면, 야만인이라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가?”

“어, 어떻게 마법을…?”

“그거야 간단하죠.”

나는 설명 대신 친절하게 마나에 ‘색채’를 덧씌워 줬다.

“……!”

직후, 쓰러진 와카 왕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황금빛 무리는, 정확히 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둘레로 따지자면, 대략 한 평 남짓?

“이 무(無)의 공간은 최소 1센티미터부터 최대 1킬로미터까지. 그 범위를 설정하는 건, 전적으로 제 자유 의지다, 이 말입니다.”

“뭔 미친, 그딴 사기적인 능력이 어디 있어!?”

“여기 있죠. 그래서, 이제 항복할 마음이 드시려나?”

“이런 씹…!”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기사와 그렇지 않은 마법사의 싸움.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 또 덤벼보실 분?”

“…….”

드넓은 연회장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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