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악의 소멸(1)
리비아 인근의 숲.
“…쿨럭!”
목구멍을 타고 핏물이 치솟았다.
디자이어가 ‘자폭’하기 직전.
나는 가까스로 색욕의 이능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다만, 급격한 힘의 운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명확했다.
“스, 스승님은…?”
“으음…….”
“하아.”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스승님은 여전히 내 눈앞에 쓰러져 계셨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피해는 상당했지만 탈출에는 무사히 성공한 셈이니까.
“세타…?”
그때,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나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섰다.
예의 플래르쉬 후작의 기사단은 이미 정리된 상태였다.
적어도 시야에는 단 한 명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눈치 빠른 루나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 준다.
“…치명상을 입은 플래르쉬 후작으로 협상을 벌였어. 홀이 완전히 부수어져, 이제 마나는 사용할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아마 돌아간 그의 기사단도 본대로는 합류할 수 없을 거야. 황제의 성격상, 주군이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그들을 그냥 둘 리가 없을 테니.”
“잘했네. 역시 루나는 일 처리가 깔끔하다니까?”
“…그쪽 일도 잘 해결된 것 같군.”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했던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선 루나가 잽싸게 내 몸을 부축해 줬다.
“나보다는 스승님부터…….”
“곧 치유의 마탑주 님이 리비아의 성도로 직접 오실 거다.”
“응…?”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따로 연락을 취해뒀다. 마탑과 국가를 잇는 워프 게이트도 일부 수리를 마쳐 정상 작동이 가능하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수도 있겠군.”
“…….”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이 철두철미하기 그지없는 기사의 배려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이능을 한 번 더 사용해야겠네.”
“안 되면 내가 업고서라도 가겠다. 성도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까.”
“…뜬금없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루나가 보기에는, 내가 뭐처럼 보여?”
“…….”
찰나,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얼핏 듣기에는 ‘이게 뭔 헛소린가’ 하는 생각마저 들 테지.
허나, 그럼에도 나는 묻고 싶었다.
디자이어와의 대면은 내게 퍽이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니까.
놈은 내 혼의 실체를 알고 있었고, 그 정체성을 흔들었다.
하물며, 그는 전생의 나를 알고 있다는 투로 얘기까지 했다.
상식적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디자이어 또한 무려 일천 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뜻이니까.
다만, 줄곧 의심해 왔던 스스로의 정체성이 요동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내 생각이 궁금한 거라면…….”
“응. 그저 개인적인 생각. 그거면 충분해.”
“…세타는 세타다.”
“…….”
“더불어, 내 주군이기도 하지.”
“…….”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내면에서 실망감이 번져 갔다.
“…그래?”
“일평생 단 한 명만을 섬겨야 하는 존재. 나는 그런 주군을 당신으로 선택한 것을, 개미 눈곱만큼도 후회하지 않는다.”
“……!”
“그러니 흔들리지 마라.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누가 뭐라고 하든,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주군이니까.”
“…….”
왜인지.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반대로 마음 한구석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만한 신의를 받고 있다 함은.
적어도, 앞으로 계속 살아갈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 누구도 아닌, ‘인간’ 세타 쿤 이그니스로서.
“…고마워.”
“별말씀을.”
다시금 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진군(進軍)하는 대군의 선두.
“음…….”
순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가볍게 침음을 삼켰다.
기껏해야 160센티미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는, 달리 제국의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갑자기 옛 상처가 쑤셔와서 말이네.”
짧게 대꾸한 노인이 눈가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우측 눈썹부터 볼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검흔(劍痕)이었다.
기실, 그는 이 흉터 탓에 과거 의도치 않은 살인까지 저질렀었다.
“대공, 곧 테라의 영역입니다. 달리 계획은 있으신 거겠지요?”
노인은 사람들에게 대공(大公)이라 불리었다.
마계의 대공이 아닌, 중간계의 대공.
대륙 천지를 뒤져 봐도 양지에서 이런 칭호로 불리는 이는 단 한 사내뿐이었다.
제국 제일검, 철혈의 대공 레오나르도 펜 아르카스.
“계획은 무슨. 그저 이전처럼 보이는 족족 죽여 없애면 그만인 것을.”
“…외람되오나, 카이클 공작은 그리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훗. 폐하께서 늙은이에게 잔소리나 하라고 이리 보낸 것은 아닐 테고… 그보다 파이만, 직접 상대해 본 그 아이는 어떻던가?”
순간, 선두에서 말 머리를 같이하던 파이만 공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옛날 생각이라는 게, 질풍의 검사 얘기였던 모양이군요.”
“이미 죽은 이 생각을 해서 뭣하겠나? 정확히는 그 제자 놈이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내게 보여준 녀석이니까.”
“8월의 검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꽤나 기대가 컸어. 놈이라면 머지않아 내 ‘일검(一劍)’ 정도는 받아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으니까.”
“압니다. 그래서 제국의 보물까지 몰래 넘겨주지 않으셨습니까? 무려 바람의 마나 연공법을 말입니다.”
“큭… 그때 폐하께 제법 혼줄이 났었지. 뭐, 나중에는 이미 준 물건이니 알아서 하라고 하시기야 했다만.”
직후, 레오나르도 대공이 ‘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워. 몰래 먹으려고 감춰둔 간식을 빼앗긴 기분이거든.”
“…….”
“재기불능의 부상을 당했다지?”
“예. 다리 한쪽을 잃었습니다.”
“끝이군.”
진심으로 아쉬운지,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리되면, 역시 내 마지막 꿈을 이룰 희망은 폐하밖에 없으신 건가?”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황실 모독죄입니다.”
“물론 농담이지. 짐작컨대, 지금의 폐하는 나조차 가늠되지 않는 괴물이야. 만약 상관만 아니었다면…….”
“그만. 거기까지만 하시지요.”
“크크크크. 아주 충직한 신하로구먼. 파이만. 한때는 네게도 기대를 했었는데 말이지.”
“사양하겠습니다. 애당초 저는 대공과 달리, 상관과 검을 맞댈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그럴 깜냥도 안 되고요.”
“흥, 싱거운 놈. 대체 이 녀석에게 어느 놈이 ‘폭발’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부여해줬는지.”
“아직 제 물음에는 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질문이 먼저네. 예의 바람의 애송이 놈. 그 녀석이 제자를 그리도 잘 키웠다지?”
“…….”
파이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대공은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었으니까.
“언젠가 나도 한 번 봤던 적이 있지, 크크크.”
핏덩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천둥벌거숭이가, 감히 제국의 황자를 상대로 목에 핏대까지 세웠었다.
그 인상이 너무나 강렬하여 레오나르도는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저 재능 있는 애송이 정도로만 생각했던 놈은 무려 염화의 마탑주까지 꺾었다고 한다.
고작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말이다.
“그놈… 묘하게 끌려. 얼굴도 내 취향이었고.”
“……!”
순간, 파이만이 흠칫 놀라며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대공의 남다른 취향을, 적어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니, 마법사 나부랭이라도 조금쯤은 기대해도 괜찮겠지? 끌끌끌.”
***
레이브의 성도.
웨에에에에에엥!
잠시 휴식을 취한 나는 곧장 성도로 귀환을 감행했다.
지금의 몸 상태로 셋이나 되는 이를 이동시키는 건 상당히 힘에 겨웠지만, 스승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제노스! 제노스! 제노스!”
“엥?”
한데, 성도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많이 뒤바뀌어 있었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한때는 내 이름을 부르짖던 연합군들이, 지금은 온통 제노스라는 세 글자로 목청을 높이고 있었으니까.
“왔냐?”
“……!”
그때,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유리나가 이쪽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봤다.
“혼자 홀라당 가버리길래 또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시나 했더니,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네?”
“뭐야, 친구 걱정도 안 됐냐?”
“걱정은 무슨. 보나 마나 또 혼자서 무쌍 찍고 왔을 텐데.”
“…그거 칭찬이지?”
“그럼, 칭찬이지. 왜, 이 누나가 엉덩이라도 두드려 주랴?”
씨익, 미소 지은 유리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에 가만히 관망하던 루나가 슬며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엥? 뭐야?”
“유리나.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지.”
“…흐응, 누가 보면 무슨 얘 보호자라도 되는 줄 알겠네?”
“의미는 비슷할 수도 있겠군. 하나밖에 없는 ‘주군’이니까.”
“……!”
“친구인 건 알고 있다만, 너무 과도한 무례는 삼가줬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사령관 직책의 위신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하아? 아주 충직한 기사님 납셨네. 그러는 루나는?”
“응…?”
“세상천지를 뒤져 봐도, 휘하 기사가 주군에게 평대를 사용하는 경우는 그쪽밖에 없을걸?”
“…….”
그제야 루나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부분은 내 신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처음 주종관계를 맺을 때만 하더라도, 루나는 후작가의 영애였고 나는 일개 평민에 불과했으니까.
“……?”
한데, 예상외로 사뭇 표정이 굳어지는 루나였다.
그것도 모자라, 이내 요동치는 두 동공이 이쪽을 향했다.
“…지금부터라도 존대를 해야 할까…?”
“…….”
“…요?”
…참나.
“됐어. 그보다, 여기 분위기는 왜 이런 거래?”
“네가 없는 사이, 제노스 저 괴물 놈도 혼자 무쌍을 찍고 왔거든.”
“핵심만 간단히.”
“일 대 이. 제노스 승. 두 마탑주 패.”
“와우.”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지만, 특별히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녀석의 정체를 생각하면 고작 마탑주쯤이야.
“하면, 마탑은 이제 완전히 끝이라고 봐도 되겠네.”
이제 십이지왕 중, 친 제국 성향의 마탑주들은 모두 죽었거나 포로가 되었다.
명실상부, 완전히 새로운 마탑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인즉.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허나, 아무래도 내 기사님은 그게 아닌 듯했다.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겠군.”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성도 중심가를 바라보던 루나가 이내 전방으로 나아갔다.
“루나…?”
“세타 사령관님이 돌아왔다아아아아아!”
“……!”
“세타 사령관님이 점멸의 검사를 무찔렀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대번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반대로, 내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에 숨고 싶은 기분이다.
한데, 루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계획에 없던 퍼포먼스까지 감행한다.
푸우욱!
직후, 마나를 한껏 머금은 검이 원래 분수대였던 건조물 위를 힘껏 파고들었다.
이번 전투로 얻은 전리품이었다.
척 보기에도 대단한 물건.
대륙 10대 무구, 아즈낙의 성검 말이다.
물론 그 원주인은 십이월로 위명이 자자한 플래르쉬 후작이었다.
“지, 진짜 아즈낙의 성검이다!”
“세타! 세타! 세타! 세타!”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제노스’가 ‘세타’로 바뀌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제야 루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쟤 은근히 유치한 것 같지 않냐?”
“…뭘, 귀엽기만 하구만.”
“뭐야!?”
대번에 도끼눈을 치뜬 유리나가 나를 노려봤다.
얜 또 왜 이런 다냐.
“너 저런 목석같은 여자가 취향이었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치유의 마탑주 님은?”
“…성 내부에 계실 거야. 이미 도착해서 실비아와 담소를 나누는 것까지는 확인하고 오는 길이니까.”
유리나의 말과 동시에, 나는 스승님을 고쳐 업었다.
“일단 거기부터 들러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