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대격전(5)
와장창!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음과 동시였다.
어둠이 물러간다.
정확히는, ‘더 짙은 어둠’이 흑막을 걷어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직후, 사방에서 조여오던 압박감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자 곧, 눈을 치뜬 디자이어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
상대가 대번에 방어 자세를 취했다.
탐욕의 어둠은 붉은빛이 감도는 흑색이었고.
반대로 내 것은, 빛 한 점 투과되지 않는 완연한 칠흑이었다.
그 사이로 오직 내게만 보이는 갖가지 병장기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창, 검, 할버드, 레이피어 등.
대륙에 존재하는 온갖 무구들의 끝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켜 가고 있음이다.
“아까 그게 탐욕의 칼날비라고 했으니까… 이건 ‘죄악의 무구비’ 정도로 이름을 붙이면 되려나?”
“어떻게…?”
“애당초 당신이 ‘탐욕’이라는 마계 제일의 힘에 너무 심취해 있었던 거지. 나는 무려 3개의 죄악을 동시에 품고 있는데도 말이야.”
“3개의 죄악… 그렇군. 오만의 능력인가.”
역시나 그는 단번에 내 이능을 꿰뚫어 봤다.
오만의 또 다른 권능, 카피.
문자 그대로, 상대의 비기를 오감으로 확인한 뒤 복사해 내는 능력이었다.
물론 그 위력까지 백 퍼센트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도 시전자가 하기 나름이었다.
마기의 질.
그리고 비기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
이런 갖가지 요인들에 따라, 본연의 위력은 오리지널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도무지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지. 설령 마왕이 직접 중간계에 현현한다면 또 모를까, 그 권속쯤이야.”
“…….”
핵심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제아무리 직계 권속이니 뭐니 해도, 그래봐야 ‘가짜’에 불과했다.
진짜가 마계에 있는 이상…
아니, 그 진짜조차 드래곤들의 눈치를 봐왔던 선례를 생각하면,
‘이미 드래곤의 힘을 대부분 각성한 지금의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인즉.’
지금 내 머릿속에는 무한에 가까운 용의 지식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악을 어떻게 부수어놓아야 하는지도 다수 존재했다.
힐끗.
“…….”
한데, 그 순간 내 미간이 좁혀졌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디자이어의 시선이 특정 방향을 가리킨 직후였다.
“…어이가 없네.”
그의 눈은 예의 레이지의 육신을 향하고 있었다.
스승님의 목숨은 아무렇지도 않게 취하려 했으면서.
제 동료의 시신은 그리도 중요한 모양이다.
순간, 다시금 속에서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다.
“…이대로 소멸시켜 주마.”
휙!
하여, 나는 허공으로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즉시,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이윽고, 무수한 병장기들이 디자이어를 노리고 폭사했다.
***
레이브의 성도.
어느새 예의 천지가 뒤바뀐 공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섯의 인영이 성도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세 남녀와 두 명의 포로가.
“초, 초월의 마탑주 님?”
“여어.”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한 유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곁의 실비아도 ‘우뚝’ 하고 하던 일을 멈췄다.
“세상에…….”
“저, 저거 마탑주들 맞지?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지?”
경악으로 가득한 유리나의 목소리에, 실비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물론 전력상으로 딱히 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최악의 경우, 초월의 마탑주 혼자서 다른 두 마탑주를 상대해야 하는 최악까지 예상했다.
“참고로 난 아무것도 한 거 없다!”
“네?”
“이 괴물 같은 놈 혼자서, 마탑주 둘을 동시에 발라먹었다고.”
“…….”
재차 귓속으로 파고드는 페르의 목소리에, 두 여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거짓은 아닌 듯했으니까.
초췌한 몰골의 에반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기까지 했다.
“허, 허허허허허허…….”
곧, 마치 노인네와도 같은 웃음을 터뜨린 유리나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실비아야.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
“…무슨 뜻이야?”
“너네 아버지가 카이클 가문과 혼사를 추진하려고 했다며. 너한테는 썩 괜찮은 비즈니스 아니야? 늙은 왕한테 팔려 가지 않아서 좋고, 일전의 그런 낯부끄러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
순간, 실비아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뭐, 뭐, 뭣!? 무, 무슨 거짓말?”
“뭘 다 알면서 되묻고 있다냐. 그 왜, 세타랑 혼인한 사이라느니 하던…….”
“다, 닥쳐!”
“하긴, 그렇다고 그 카이클 공작이 저 녀석을 데릴사위로 줄 리도 없을 테지만.”
“……?”
일순,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말하는 유리나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기에.
‘아…….’
곧 실비아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은 거야?”
“뭐가?”
“카이클 공작은 네게 원수잖아.”
“…….”
내전 초기, 아리에나 자작가는 반란군의 공세에 철저하게 짓밟혔다.
그 과정에서 유리나의 아버지 또한 목숨을 잃었다.
한때 막역한 친우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클 공작에게 적을 살려둘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게 전쟁이니까.”
“어?”
“어디 가족을 잃은 게 나 하나여야 말이지. 지금은 사사로운 복수보다, 나라를 더 우선시해야 할 때잖아?”
“…….”
실비아는 감히 그녀의 감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유리나에 비하면, 자신은 무척이나 상황이 나은 편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상당 부분 건강을 회복하셨고, 가문마저 건재했다.
이번 전쟁만 끝나면 금세 원래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만약 승전만 한다면 과거보다 훨씬 더 대단한 권세를 누리게 될 터였다.
허나, 유리나의 가문은 아니었다.
가주의 죽음과 동시에, 가문 자체가 철저하게 무너졌으니까.
지금의 아리에나 자작가는 이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실비아 그 자신이었다면, 반쯤 미쳐 버렸을 테지.
“…다만…….”
“……!”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 연유는 물어보고 싶어. 이미 승리한 상황에서, 굳이 목숨까지 취했어야 했는지 말이야.”
“…만약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허나, 시선은 명확하게 한곳을 가리켰다.
어느새 연합군에게 둘러싸인 인영들.
그중에서도 오직 제노스에게만 눈을 고정하고 있는 유리나였으니까.
“…이 참에 내가 한번 꼬셔볼까?”
“으응?”
순간, 실비아가 동그랗게 토끼눈을 떴다.
방금 들은 말이 곧장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쟤 말고, 네가 약혼자라 공언했던 그 녀석 말이야.”
“그 얘기 그만하라고 했지!?”
“나 참, 내가 없던 말을 지어내는 것도 아닌데 웬 발작이람?”
“아,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곳!”
“크크크크. 알았다, 안 할게. 안 한다고.”
“그, 그래서, 세타를 꼬셔서 카이클 공작가에 복수하겠다, 뭐 그런 뜻이야?”
“글쎄, 꼭 복수니 하는 거창한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찰나, 말끝을 흐리던 유리나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썩 대단한 사내를 대동한 채로 나타나면, 카이클 공작도 제대로 나를 한 가문의 대표로 봐주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어서.”
“……!”
“힘없는 자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세상이잖아?”
이내 몸을 빙글 휘돌린 유리나가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제노스 녀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나는 아직도 세타 놈이 대륙 제일의 괴물이라고 생각하니까.”
***
열두 마탑의 중심, 그 심층부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 앤그리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 인간이 이만한 존재감이라고?”
콰콰콰콰콰콰콰!
직후,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맹렬한 투기(鬪氣).
어느새 적발의 사내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오연하게 서 있었다.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육신의 능력이 극에 달한 존재라는 뜻이겠지. 인간으로 치자면, 최소 마스터 상급. 그 이상이다.”
앤그리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을 마쳤다.
작금의 대륙에서 대게 마스터부터 특별히 급을 나누지는 않았다.
딱히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제국의 기사들이 수준이 높았기에, 출신 성분만을 따져댔을 뿐.
허나, 일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앤그리는 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싸움이 성행하던 그 시절에는, 마스터들 사이에도 급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 대표적인 예가 눈앞의 광경이었다.
중급의 마스터는 풀 위를 넘나들고, 상급의 마스터는 물 위를 걸으며, 그마저도 뛰어넘으면 하늘을 밟는다.
소위 그랜드 마스터니 하는 경지가 개념상으로나마 존재하던 시대였으니까.
하물며…
“제법 강해 보이는군. 무투가인가?”
“…….”
앤그리는 내면에서 솟구치는 짙은 호승심을 느꼈다.
척 보기에도 검사는 아닌 듯한 상대는, 두 주먹이 숫제 바위를 보는 듯 커다랗고 단단했다.
그건 아마도,
“…같은 부류로군.”
저벅, 저벅, 저벅.
상념을 마친 앤그리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전투력만큼은 칠악에서도 최상위로 손꼽히는 그였으니까.
더욱이, 저 정도는 그도 할 수 있었다.
찰박.
“호오?”
순간, 적발의 사내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앤그리의 발이 꺼지지 않고 물 위를 걷는 것을 발견한 직후였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다니까?”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이라도 비켜서라. 목적에 방해되지 않는다면, 딱히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허나, 적발 사내는 도리어 뚜둑, 뚜둑 제 관절 마디를 꺾어댔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근데 어쩌냐? 나는 살아가는 목적 자체가 강자와의 싸움이라서 말이지.”
찰박, 찰박, 찰박.
앤그리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멈춰 서 있던 적발 사내도 마주 나아간다.
곧이어,
투-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윽고 두 사내의 주먹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
후둑, 후두두두두둑.
마치 때 아닌 소낙비라도 내리는 듯이.
사내의 전신으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고,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왜 피하지 않은 거지?”
“…….”
“…진심으로 역겹군. 한낱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제 육신까지 던지다니…….”
사내, 디자이어는 끝까지 나태의 시신을 감싸려고 했다.
그럴수록 제 몸의 상처는 늘어났고, 그 결과가 눈앞의 광경이었다.
아직 숨이라도 붙어 있는 상태였다면 또 모를까.
속된 말로, 저건 이제 한낱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혼은 나태의 마왕에게 돌아갔고, 죄악의 일부는 이미 내 안에 흡수된 지 오래였으니까.
“…기분 참 뭣 같네. 대체 누가 악당인지…….”
직후,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내가 이내 상대를 향해 다가섰다.
싸움은 이미 끝났다.
주변을 잠식한 마기조차 어느새 완전히 자취를 감춘 채였으니까.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우뚝.
순간, 귓가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내 걸음이 멈춰졌다.
“…뭐라고?”
“…인간이 아닌 너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힘에 집어삼켜지는 순간, 종래의 너는 반드시 자멸하고 말 것이다.”
“…….”
내 입가에 절로 조소가 맺혀졌다.
“그렇게는 안 봤는데, 지고 나니 이제는 저주라도 퍼붓는 건가?”
“…드래곤 아이리스.”
“……!”
“예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히 독선적이고 오만하다. 그 상태로는, 결국 이 중간계의 운명도 크게 뒤바뀌지는 않을 터.”
덥석!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디자이어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언젠가부터 그의 입가에도 나와 비슷한.
아니, 나보다 더 짙은 조소가 맺혀 있었다.
“방금 그 말, 다시 한번 지껄여 봐. 뭐라고?”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불룩!
“……!”
순간, 디자이어의 전신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 기현상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즉시,
“스승님!”
나는 방금의 그와 마찬가지로 잽싸게 스승님을 감싸 안았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곧이어, 우렁한 굉음이 순식간에 일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