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대격전(4)
습기만이 가득한 폐가의 지하.
고오오오오오!
농도 짙은 마기가 일대를 잠식한다.
지금까지 경험해 온 기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기의 주인은 ‘탐욕’의 디자이어.
명실상부, 그는 칠악(七惡)의 수장이었다.
“여기서 최종 보스라고…?”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감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다시 말하지만, 황제와 칠악은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수평한 협력의 관계.
즉, 동맹 관계라면 모를까.
황제는 중간계의 지배자로서.
탐욕은 현 마계의 일인자로서.
하니, 여기서 눈앞의 사내를 잡는다 함은…
“…적의 전력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윽고 내 손아귀에 ‘콰득’ 힘이 들어갔다.
“…레이지.”
다만, 그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허탈함’이라는 감정을 한가득 떠올린 채,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다가설 뿐.
기실, 이건 상당히 어색한 광경이었다.
“…설마 슬퍼하는 건가?”
지금의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으니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철저한 ‘악(惡)’이었다.
감정선이라면 인간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오히려 저밖에 모르는 드래곤에 가깝다면 또 모를까.
저들 외에 다른 생(生)은 한낱 벌레처럼 취급하는 존재가 칠악이었으니까.
“왜 이러고 있느냐?”
“…….”
“일어나라. 나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
“레이지, 너는…….”
일순, 내 동공이 흔들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서글퍼 보여서?
천만에!
그저 역겨웠기 때문이다.
남의 희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제 동료는 마치 귀히 여기는 모습이.
“…이건 네놈 짓이겠지? 세타 쿤 이그니스.”
“그렇다면?”
“후회할 짓을 했구나. 너는 결코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넜다.”
“글쎄, 그건 도리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스승님은 여전히 한쪽 구석에서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분명 상태는 갈수록 심각해질 것인즉.
다만, 먼저 움직인 이는 내가 아닌 상대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내 모든 것을 걸고.”
주변을 잠식한 마기가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넘실대는 살기 속에서, 어느새 디자이어의 양손에 묵 빛 검 한 쌍이 쥐어져 있었다.
“방금 말, 이번에도 그대로 되돌려주지.”
쯔어어어어어엉!
직후, 나는 순식간에 마력 검 하나를 생성해 냈다.
그와 동시에,
번-쩍!
“……!”
디자이어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내 근육이 급격히 수축했다.
호흡은 가볍게.
눈이 아닌 감각으로.
스팟!
스승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전신을 후방으로 휘돌렸다.
흑색 실선은 정확히 내 뒷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스걱! 쩌어어어어어엉!
“음…….”
잇새를 비집고 절로 침음이 새어 나왔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
허나, 상대 또한 내 반응에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믿는 구석이 드래곤만은 아니라는 뜻인가?”
“잊었어? 내 손에 동료를 벌써 셋이나 잃었다는걸.”
“…….”
디자이어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주변의 마기는 더욱 들끓어 올랐다.
곧이어…
푸욱!
“……?”
내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디자이어가 제 검들을 땅에 박아 넣은 직후였다.
“무슨…?”
“일대일. 하물며,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쩌정! 쩌저저저저정!
말과 동시였다.
일순, 공간을 떠돌던 마기가 형상을 이루어 갔다.
“검…?”
안 그래도 칙칙했던 벽면은 곧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시야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상대의 존재감만큼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극에 달한 살기도.
“…탐욕의 칼날비.”
“……!”
곧 어둠을 비집고 수십, 수백의 무언가가 내게로 솟구쳤다.
나는 망설임 없이 구석을 향해 몸을 던졌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정!
“…쿨럭!”
곧 수천의 칼날들이 내가 생성해 낸 보호막 위를 두들겼다.
한순간 일대에 휘몰아치는 칼날의 비.
더욱이 그 범위에는 스승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습구나. 언제까지 네 스승을 지키면서 내 공격을 버텨내는지 두고 보마.”
“…….”
디자이어는 내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
하물며, 전투의 기본 또한 철저하게 지켰다.
스승님이 누차 강조한 가르침 중 하나.
상대를 쫓으려 들지 말고, 공간 자체를 지배하라.
‘…이렇게 된 이상, 놈을 내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허나, 마나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으니.
내면에 잠든 또 다른 기운을 이끌어 낸다.
뭉클!
“……!”
상대의 것과는 또 다른, 최상격의 기운.
전신의 마기를 아낌없이 사방으로 발산했다.
직후, 디자이어의 얼굴이 급변했다.
“인간의 몸으로 이만한 농도의 마기라고…?”
역시나 대경하는 디자이어를 향해,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 알아? 굳이 권속이 아니더라도, 마왕급의 마기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지금부터 지켜보면 알겠지. 참고로, 이게 가능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결국 이런 종류의 초월적인 힘은, 혼(魂)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 달려있으니…….”
“……!”
“…즉, 내 혼의 격을, 마왕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키워내면 될 뿐이니까.”
***
천지가 뒤바뀐 공간.
“꺄아아아아악!”
마탑주라는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레이나가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 막, 마력 창이 허벅지를 훑고 간 직후였다.
“놈!”
뭉클!
그 즉시, 불길한 녹색 운무가 제노스를 향해 뻗어갔다.
이번에는 간다르 테이들러의 한 수였다.
그런 그도 외형상 많은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스스로의 육신을 강화한 그는 노인답지 않은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서걱!
“허억…!”
예외는 없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창의 움직임.
고작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간다르 테이들러의 근육질 팔이 ‘댕겅!’ 베여졌으니까.
“드렉, 이리 나와!”
고통을 참아내며 레이나가 마지막 남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용의 아류.
현재 그녀가 소환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물.
우우우웅! 펄럭!
힘찬 날갯짓과 동시에 아공간을 비집고 초거대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스터의 검기조차 거뜬히 버텨내는, 무려 드레이크의 왕(王)이.
우뚝.
“드레이크 킹…?”
이 시점에서 제노스도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덧 두 눈빛에는 진한 흥미마저 감돌고 있었다.
일반 드레이크조차 인간이 길들일 수 없는 마물로 알려져 있었기에.
드레이크 킹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화르르르륵!
“크라라라라라라!”
순간, 흉포한 괴성과 동시에 드레이크 킹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잇새로, 붉은 기류가 넘실거린다.
곧이어,
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일직선의 화염이 제노스를 향해 쏘아져 갔다.
브레스였다.
비록 ‘진짜’ 브레스와 비교하면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브레스는 브레스지.”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지은 제노스가 손안의 창을 휘돌렸다.
훙, 훙, 훙, 훙, 훙.
마치 풍차처럼 휘도는 마력 창은, 빠르게 속도를 키워갔다.
놀라운 점은,
푸르르르르륵!
그 간단한 동작에, 브레스가 모조리 사방으로 비산한다는 사실이었다.
“저 미친 괴물 자식…!”
레이나가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허나, 제노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거거거걱!
“드, 드렉!”
“크뤄러러러러러러러!”
마물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고막을 찢어발겼다.
브레스를 모조리 떨쳐 낸 제노스는 순식간에 드레이크 킹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눈, 아랫배, 발목 등.
그것도, 약점만을 정확하게 골라서 말이다.
투-쾅!
“어, 어떻게…….”
이내 힘없이 추락하는 드레이크 킹을 발견한 레이나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덥석!
“……!”
제자리에 굳어 있는 레이나의 머리채를 제노스가 콰득 움켜쥐었다.
“윽…!?”
“포기해라.”
“어, 어느새…?”
“이대로 목숨을 잃고 싶은 건 아니겠지?”
“…….”
제노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레이나가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양팔이 베인 간다르 테이들러는 이미 지면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충격적인 것은, 그 과정에서 다른 두 마탑주는 조금도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페르. 아까 세타 쿤 이그니스와 저 녀석을 호각으로 생각한다고 했지?”
“…그랬었지.”
“…하면, 이번만큼은 동의할 수 없겠는데. 나는 저 괴물 녀석이 누구에게 질 거라는 상상이 조금도 들지 않아서.”
“…….”
대답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제노스를 훔쳐보기 바빴으니까.
“…애초에 의미 없는 고민이다. 어차피 둘이 싸울 리는 절대로 없을 테니까.”
다만, 이번에도 페르의 말은 틀렸다.
작금의 대륙에, ‘절대’라는 말은 어디에서도 통용되지 않았으니까.
***
저 멀리, 하늘 위로 우뚝 솟은 열두 개의 마탑.
움찔.
순간, 그곳을 향해 나아가던 앤그리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대공…?”
“뭐야, 갑자기 왜 멈춰?”
“…잠시만.”
직후, 멈춰 선 앤그리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치 무언가를 느끼려는 듯이.
“음…….”
그리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자못 심각한 얼굴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대공이 위험하다.”
“뭐?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뭔 개소리야!?”
“지로시.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대공만큼은 아니지만, 같은 동료의 기운이라면 나 또한 제법 잘 느낀다고 자부한다.”
“그거야 뭐… 대공이나 너야 그쪽 방면으로 워낙 괴물들이니까. 아무튼 그게 대공이 위험한 거랑 무슨 상관인데?”
“대공의 마기가 폭주하고 있다.”
“뭣!?”
순간, 지로시가 눈을 크게 떴다.
“이만한 폭주라면, 근 20년 이내에 처음인 듯한데…….”
“뭔 그따위 말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냐!? 당장 돌아가야 하는 것 아냐?”
“…아니. 차라리 잘됐다.”
“엥? 이건 또 뭔 씹소리…!”
“아마도 열에 아홉의 확률로, 세타 쿤 이그니스를 맞닥뜨린 거겠지.”
“……!”
찰나, 크게 뜨여진 지로시의 눈이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벌써?”
“애당초 그 장소를 찾아낼 수 있는 존재가 대륙에 몇이나 되겠나? 하물며, 이만한 거리라면 색욕의 이능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아.”
“그건 그렇지.”
“대공이 세타 쿤 이그니스를 상대하고 있다 함은… 지금 우리를 막을 만한 존재는 전무하다는 뜻인즉.”
“없긴 왜 없어. 걔 말고도 또 있잖아.”
“……?”
“드래곤.”
지로시의 말에, 앤그리가 한 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미 중간계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스노비가 이곳을 노렸을 때 진즉 나섰겠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
“변화를 바라는 이들이니, 차라리 이편을 바랬는지도 모르겠군.”
“무슨 꿍꿍이인지는 이제 잘 알겠는데, 혹여나 대공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일단 중간계를 마계화시키는 데 성공만 한다면, 권속 정도가 아니라 본체가 이 땅에 현신할 테니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해 있었다.
곧 거대한 호수가 둘의 눈앞으로 펼쳐졌다.
불끈!
직후, 앤그리가 지체 없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곤,
퍼어어어어어엉!
한 그루 통나무를 연상케 하는 팔이 쭉 하고 일직선으로 뻗어갔다.
촤아아아아아아아!
그 한 방에, 호수의 물 태반이 증발했다.
“…이그드라실.”
이윽고 드러나는 새하얀 거목에 앤그리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저 이그드라실만 처리하면 된다.
열두 마탑주를 포함한 방해꾼들이 모두 사라진 현재.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흡.”
앤그리가 다시금 호흡을 멈췄다.
다음 한 방으로, 이그드라실을 송두리째 부수어놓기 위해서.
“멈춰라아아아아아아아아!”
“……!”
다만, 결론적으로 앤그리는 그 계획을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꽈아아아아아앙!
웬 새빨간 무언가가, 우렁한 굉음과 동시에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져 내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