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대격전(2)
천지가 뒤바뀐 공간.
“진짜 끈질기네.”
분홍빛 머리칼 사이로 한줄기 광기마저 느껴지는 여인.
소환의 마탑주, 레이나 더글린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곁의 노인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끌끌끌. 그 에반젤린이다. 애당초 쉽게 쓰러뜨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정도껏 해야지. 저게 뭐야? 만신창이가 되어서, 끝까지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쟤는 체면도 없나?”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명체도, 인간만큼 생존 욕구가 뛰어난 종(種)은 없음이니…….”
그리 말하는 둘의 앞에, 한 금발의 여인이 오롯이 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달리 환상의 마탑주라 불리는 에반젤린이었다.
예상대로, 지금 그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체력은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였고, 마나는 90퍼센트 이상이 소모되었다.
그마저도 일찍이 시전한 ‘무한의 굴레’ 덕분에 이 정도나 버틸 수 있었던 거지.
만약 굴레가 아니었다면…
“거슬려. 아주, 아주 거슬린다고.”
“……!”
찰나, 에반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레 레이나 더글린의 주변으로 아공간이 생성되었기에.
- 크워어어어어어어!
그 사이로, 척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우우웅!
에반젤린이 지체없이 마나를 일으켰다.
굴레 내부는 그녀의 지배하에 있는 공간.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에반젤린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마나를 일으키는 것도.
마물을 소환해 내는 일도.
하물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사소한 동작까지.
콰드드드드드드득!
직후, 생성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로 아공간이 빠르게 닫혀갔다.
“아니이! 저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쾅! 쾅! 쾅!
레이나가 연신 발로 지면을 내리찧으며 짜증을 부렸다.
그에 비해, 간다르 테이들러는 허허로이 웃음만을 터뜨릴 뿐이었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인 게야.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인 것을…….”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대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건데?”
“그녀를 봐라.”
“…응?”
“짐작컨대, 최대로 잡아도 한 시간. 그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에반젤린이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정답이었다.
한 시간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쓰러져 쉬고 싶을 정도로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일전의 부상조차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흐응~”
그제야 레이나도 여유를 되찾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에 내 손으로 저년을 찢어 죽일 거야.”
“그건 안 되지. 저 육신은 내 것이야. 특히나 심장은 생채기 하나 나서는 안 돼. 미리 경고하지.”
“또 그 역겨운 연구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끌끌끌.”
대화 소리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그럴수록 시야도 거칠게 흔들렸다.
한계다.
이 이상은 도무지 무리였다.
“포기하지 마시지요.”
“……!”
순간, 요동치던 그녀의 초점이 다시금 맞춰졌다.
웬 금발의 인영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직후, 에반젤린의 얼굴 위로 점차 경악이 떠올랐다.
이곳은 그녀가 캐스팅한 굴레 내부였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사전 허가 없이는 어떤 외부의 개입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걘 재주가 무척 뛰어난 애벌레거든.”
“페, 페르?”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군.”
재차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에반젤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허나, 그 표정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녀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제아무리 페르라도 마탑주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벅찰 테니까.
“도, 도망…….”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에?”
“내가 보기에, 저 애벌레 혼자서도 둘 중 하나는 충분히 찜 쪄 먹을 수 있을 듯하니까.”
“……!”
어느새 한 자루의 마력 창을 생성해 낸 예의 인영이 전방을 향해 쇄도해 간다.
곁에서 그녀를 부축한 페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단언하건대, 저놈의 재능은 최소 블레어 마탑주 급 이상이야.”
***
중앙 천막 내부.
얼핏 보면 도무지 천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이 공간에, 황제는 홀로 앉아 있었다.
“왔는가?”
“…예. 한데, 왜 혼자십니까?”
“거추장스러운 건 질색이거든. 더욱이, 그대와 내가 만나는 데 호위라니, 웃기지도 않은 얘기지.”
“…….”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황제는 그 나름대로 상념에 잠겨 있었고.
디자이어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기에.
“…슬프지는 않으십니까?”
“뜬금없이 그게 무슨 물음이지?”
“폐하는 인간이시지 않습니까. 인간만큼 희노애락의 감정을 명확하게 느끼는 존재는 또 없구요.”
“빙빙 에둘러 말하지 마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라는 것, 그대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자식을 잃으셨지 않습니까.”
멈칫.
잠시 움직임을 멈춘 황제가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스노비 얘기였군. 크크크크.”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감정을, 저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허나, 최근에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경험은 있지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레이지의 얼굴을 지워내며 디자이어가 정면을 바라봤다.
“진정 슬픔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으시는 겁니까?”
“슬프다기보다, 아쉽기는 하지. 재능이 있는 놈이었고, 그간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으니.”
“그 외에는…….”
“오늘따라 쓸데없는 의문이 많군.”
“…….”
디자이어가 입을 다물었다.
오랜 경험상, 이는 일종의 경고였기에.
“애당초 부정(父情)이라는 것이 내게 있었다면, 처음부터 녀석을 내어주지도 않았을 게야. 이름도 스노비가 아니라, 원래의 페리스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게 했을 테지.”
“…….”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 전대 오만은 다름 아닌 내 ‘아버지’였다. 실제로 그 추악한 노인네는, 내 자식보다 이 나를 더 원하고 갈망했지.”
옛 생각이 떠올랐는지, 황제가 연이어 피식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혼이 옮겨가는 개념이라고 했던가? 분명 내 아버지도 스노비와 한 몸이었을 텐데… 소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더군. 꼭 수십 년 묵은 때를 모조리 벗겨낸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습니까?”
“내가 왜 오만과의 계약을 거부했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런 종류의 계약은, 재능 없는 놈들이나 바라는 행운 따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
“이미 나는 완벽하다. 일신의 무력도, 권력도. 더욱이 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악(惡)’을 믿지 않아. 그저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이니 그러려니 했을 뿐.”
곧, 말을 마친 황제의 전신으로 강렬한 기세가 발산됐다.
“만약 선을 넘었다면, 제아무리 국가의 오랜 전통이라고 해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야.”
“…이해합니다.”
“자,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고.”
직후, 황제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름 3대 강국이라 불리는 리비아와 자이툰이 무너졌다. 게르힘도 국토의 절반을 잃었지. 남은 건 대륙의 남부. 허나, 그곳이야 어차피 덜떨어진 야만인들이나 다수 서식하는 곳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아. 해서, 그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곳을 노려볼까 하는데…….”
“……?”
“테라.”
“……!”
“그대 생각은 어떤가? 스노비 녀석이 정복에 실패해서 더 끌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테라를 공략한다 함은 곧 중부 대륙 모두가 내 손안에 들어온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겠나?”
“…….”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디자이어가 입을 열었다.
“…들리는 소문에, 테라가 드래곤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뭐, 드래곤?”
“제가 직접 확인도 했습니다. 하니, 만약 테라를 노릴 계획이시라면…….”
찰나, 말끝을 흐리던 디자이어가 눈을 빛냈다.
“광룡(狂龍)에게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크크크, 사실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는 선택이야. 드래곤이 인간사에 개입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황제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그 세타 쿤 이그니스인가 하는 놈은 내가 맡아주지.”
“아니요. 녀석은 제 몫입니다.”
“응?”
“빚이 있습니다. 하여, 녀석은 반드시 제 손으로 죽여 없애야 합니다.”
디자이어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레이지가 소멸당하던 ‘그날’이.
하물며, 근래에 전쟁으로 취한 이 막대한 힘이라면…
‘…이제 조만간이다. 제아무리 드래곤을 끌어 들였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네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세타 쿤 이그니스.’
***
한편.
누군가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쿨럭!”
순식간에 목덜미가 부여 잡힌 레이지가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연신 진동하는 대기.
이전과는 격 자체가 달라진 느낌.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벗어나려고 할수록 농도 짙은 마기는 더욱 강하게 전신을 옭아맨다.
“어, 어떻게…?”
쨍그랑!
곧 레이지의 손안에서 날 선 단도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곳을 찾아냈냐고?”
“…….”
레이지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곳은 제국군이 짓밟고 온 무수한 마을 중 어느 건물의 지하였다.
도시나 마을이 한두 곳도 아니고.
어찌 자신들을 이리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레이지는 그 점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보다는, 내가 단기간에 어떻게 이리 급성장할 수 있었는지가 더 궁금하지 않아?”
“…….”
그 말대로였다.
세타 쿤 이그니스.
마지막에 이 녀석을 봤을 때만 해도, 다음번에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레이지 스스로가 강해지기도 했고.
허나, 막상 다시 마주하니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마치 눈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진 기분.
더욱이 온몸을 내리누르는 이 마기는, 가히 마왕(魔王)급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대로 목을 분질러 주지.”
“…흡!”
순간, 레이지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급증한 직후였다.
척 보기에도 상대는 분노로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이 녀석의 시선은, 줄곧 쓰러진 8월의 검사에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허나, 이리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이제야 대공의 진심을 확인했는데, 이대로는…
“이전처럼 도망치지는 못할 거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대비해 뒀거든.”
“자, 잠깐…만…!”
우득, 우드드득.
“하악!”
뼈가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그 진원지는 레이지의 목이었다.
망설임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잔인한 손속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정… 보…! 귀중한… 정보를…!”
레이지의 열린 잇새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다만, 의외로 손아귀의 악력은 약해지고 있었다.
그 즉시,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흐읍! 하아, 하아, 하아!”
“개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목을 꺾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 1초면 충분하니까.”
자연스레 레이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녀석의 손은, 마치 어느 마물처럼 비늘이 우둘투둘 돋아나 있었다.
아니, 이건 숫제 마물이라기보다는…
“드, 드래곤…?”
“얘기해 봐. 그 귀중한 정보라는 게 무엇인지.”
“……!”
직후, 레이지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짓은 통하지 않을 터였다.
이미 대비를 하였는지, 놈의 눈이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뒤바뀌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진실을 뱉어낼 때였다.
“사트리노 백작이 살아 있어!”
“…뭐?”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져 갔다.
하여, 레이지는 다시금 필사적으로 외쳤다.
“네 스승, 아즈문 사트리노가 살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