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폐허가 된 리비아(2)
폐허가 된 리비아의 성도.
“흠…….”
주변을 둘러보던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군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와중이었다.
물론 생존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리비아의 백성들은 대부분 무사했다.
제국군이 침략한 남문의 반대편, 북문(北問).
그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군대가 완전히 퇴각한 사실을 확인한 뒤,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남은 것은 전무(全無).
기실 이 또한 모두 황제가 의도한 바였다.
생로(生路)를 열어두고 더 큰 절망을 선사한다.
모조리 죽여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 큰 대륙 땅을 제 국민들로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하물며, 저들의 영광된 삶을 위해.
제국을 받들 ‘노예’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황제였다.
“빌어먹을 자식…….”
곧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어미를 잃은 아이가 홀로 울고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짓뭉개진 제 집을 세상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저들의 가족이, 터전이, 살아온 모든 인생(人生)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잿더미로 스러지고 만 것이다.
우웅! 우우우웅!
직후, 주변으로 마나가 들끓어 올랐다.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무력함, 후회와 좌절.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그따위 감정들을 지금 이 순간 한 번에 경험하고 있음이다.
“사람들이 놀랍니다, 초월의 마탑주 님.”
“…….”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은발의 곱등이.
예의 실비아인가 하는 계집애가 말을 걸어왔다.
“…생존자는?”
“백성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다만, 왕국 군에 소속된 이들의 경우에는…….”
은발 곱등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뒷말은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테지.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평생을 장애를 안은 채 삶을 연명해야 할 테고.
“이제 저희에게도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세타와 루나가 그토록 빠르게 성도를 떠나갔는지도요.”
“…….”
그제야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고개를 들었다.
관심 없는 척, 귀를 기울이고 있는 또 다른 두 곱등이가 시야로 들어왔다.
모두 녀석의 친구들이었다.
“…칠악이 나타났다.”
“네? 칠악!?”
“그리고, 나는 그 하나조차 제대로 감당하기 벅찼다.”
“……!”
대번에 은발 곱등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칠악.
음지에 숨은 일곱 죄악이라는 밥버러지들을, 평소 그는 우습게 생각해 왔다.
실제로 대륙인들의 평가도 그랬다.
제아무리 100년 가까이 살아온 노괴들이라 한들, 제국의 마스터들에게는 어림도 없다고.
그게 아니었다면, 황제에 빌붙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는 방법을 택했겠지.
허나, 그들은 자존심을 굽히고 고개를 조아렸다.
“…결국 그 모든 행동이 오늘을 위해서였다는 말인가?”
일순,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얼굴 위로 아찔함이 번져 갔다.
그래.
그것은 한낱 연극에 불과했다.
그가 직접 맞붙어본 칠악은 여느 마스터들보다도 강했다.
즉, 황제와 그들은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공통된 목적을 위한, 완벽한 평등의 관계라면 또 모를까.
“방금 그 말씀,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멈칫.
이번에는 금발의 곱등이가 접근해 왔다.
볼 때마다 기묘한 위화감이 드는 놈.
‘그’ 녀석과 마찬가지로, 상식으로는 도무지 불가해한 영역의 천재 애송이.
혹, 이 녀석이라면…
“…일단, 너는 나랑 어디를 좀 같이 가자.”
“……?”
“에반젤린이 아직 싸우고 있다. 아마 지금쯤이면 곧 모습을 드러낼 게야.”
“그게 무슨…?”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말없이 하늘 위를 가리켰다.
묘하게 대기가 어그러진 공간.
전투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생존자 구출에 합류하지 않고, 줄곧 이 주변을 맴돈 이유였다.
“환상의 마법 중에는, ‘무한의 굴레’라 불리는 7써클 마법이 존재한다.”
“……!”
“대상의 경지와 상관없이, 시전자와 목표물을 한 공간에 가두는… 에반젤린에게는 일종의 필살기 같은 마법이지.”
“하면…?”
“원래였다면 간다르 테이들러, 그 노망난 할방구 하나를 상대하기도 벅찼을 거야. 두 마탑주가 적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말을 마친 그의 시선이 주변을 향했다.
성도 곳곳에 마물들의 시체가 즐비해 있었다.
예의 하피와 괴물 비둘기들의 부산물이었다.
다만, 그 숫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두 마탑주와 마물들. 그 모두를, 에반젤린은 스스로와 함께 무한의 굴레에 가두었다. 그게 곧 해제될 것이라는 뜻이야.”
“……!”
금발 곱등이의 전신이 흠칫 굳어졌다.
옆의 은발 곱등이나, 왈가닥 곱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두 마탑주의 조력 없이도 이 나라 리비아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는 뜻입니까?”
“맞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제’가 있었지.”
“……!”
이윽고 한껏 인상을 구긴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마지막 말을 마쳤다.
“놈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다.”
***
리비아의 성도 인근 숲.
“…….”
일대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스터를 목전에 둔, 엑스퍼트 최상급의 기사가 단 한 수에 쓰러졌다.
하물며, 왕국도 아닌 제국의 검사가.
“3석 기사라면, 여기서 3번째로 강하다는 뜻이겠지?”
“…….”
털복숭이가 내 손아귀에 깔린 채 연이어 꿈틀거렸다.
여전히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무리다.
이미 내 마나가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붙들어 놓고 있었으니까.
홱!
“…쿨럭!”
나는 가볍게 털복숭이를 집어 던졌다.
훨훨 날아가는 그가 입가로 검붉은 선혈을 흩뿌렸다.
그리곤 예의 선두 사내의 바로 코앞에 떨어져 내렸다.
쿵!
“…….”
둔탁한 소음과 함께 지면에 처박히는 털복숭이를 그는 가만히 바라만 봤다.
그냥 돌려준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 마나를 역류시켜 복부의 홀을 완전히 부수어놓았으니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그는 일개 병사보다 조금 더 강한 기사.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놀랍군. 그만한 움직임으로 마법사라고?”
“다시 묻겠다. 파이만 공작은 어디에 있지?”
지금 내 뇌리를 잠식한 것은 확고한 분노였다.
그만큼 내가 전해들은 사실이 충격적이었으니까.
황제에게 패한 스승님은, 곧바로 제국군의 손에 끌려갔다고 한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으신 채로.
“…빌어먹을.”
나는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이를 깨물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는데…
콰직!
“……!”
순간, 맞은편의 사내가 돌발행동을 했다.
눈앞에 자리한 제 수하를.
그 머리통을, 그대로 짓밟아 터트려 버린 것이다.
파르르르르르. 추욱.
목숨은 붙어 있던 털복숭이 기사가 그 한 수에 명을 달리했다.
실로 비정한 광경에, 나는 자연스레 상념에서 벗어났다.
“무슨…!”
“네게도 이편이 낫겠지, 엑스트라우. 마나를 잃은 채 평생을 폐인으로 보내는 삶보다야, 깔끔한 죽음이 훨씬 기꺼울 테니까.”
“이 미친!”
“8월의 검사 에이스 디 파르마. 듣기로 그가 네 스승이라지?”
“……!”
“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쾌’를 중시하는 검사가 ‘다리 한쪽’을 잃었으니… 이 이상 살아 무에 의미가 있을까?”
쾅!
그 즉시, 내 다리가 땅을 박찼다.
뇌 내를 벗어난 분노가 온몸으로 뻗어 나갔다.
직후, 사내의 입가로 조소가 맺혀졌다.
훙!
“……!”
어느새 생성된 마력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갑작스레 그 자리에서 사내의 신형이 사라진 것이다.
“흥분하지 마라. 같은 ‘쾌’를 추구하는 검사로서, 내 개인적인 견해를 얘기했을 뿐이니까.”
“……!”
곧 내 등 뒤로 돈 사내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후방을 점하는 엄청난 기회를 잡았음에도, 그는 지금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후회할 거다.”
“후회? 크크크크크.”
곧장 돌아서는 나를 일별하며, 사내가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그딴 건 약자들이나 하는 거지. 소개가 늦었군. 나는 제국의 십이월, 플래르쉬 후작이라고 한다.”
“하아…….”
침착하자.
직후 나는 가벼운 심호흡을 이어갔다.
한편에서는 따가운 시선마저 느껴졌다.
루나였다.
그녀는 여전히 요동 없는 눈빛으로, 오직 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진즉 나섰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아마 내 분노를 명확히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일 테지.
나는 그 점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모두 지켜보도록. 지금부터 마법사 나부랭이는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내가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까.”
“기대하겠습니다, 대장! 한데, 저 계집은 어떻게 할까요?”
“계집?”
그제야 플래르쉬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직후, 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호오?”
단지 짤막한 감탄사였을 뿐이다.
허나, 그거면 충분했다.
놈의 표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스팟!
다시금 내 발이 땅을 박찼다.
예의 플래르쉬 후작의 얼굴 위로 또 한 번 비웃음이 떠올랐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놈이군. 이대로 팔 하나만 베어주마.”
후웅!
“……?”
순간, 플래르쉬의 얼굴 위로 커다란 의문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의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기에.
속도?
제아무리 빠르다 한들, 마법사의 단거리 텔레포트는 이길 수 없다.
‘빠름’과 ‘전이’는 애당초 개념 자체가 달랐으니까.
“크크크. 마나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내가 알기로, 그런 단거리 텔레포트는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다던데…….”
“입 닥쳐.”
“…언제까지 그리 건방을 떨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번쩍!
직후, 무수한 빛이 사방에서 점멸했다.
쾌속의 속도로 움직이는 상대와.
연이어 텔레포트를 펼치는 나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멸하는 빛의 수는 줄어들어 갔다.
최초 조소로만 가득하던 플래르쉬 후작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든 것도 그때부터였다.
“헉, 헉. 이게 무슨…?”
어느새 제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춘 플래르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쾌속한 움직임에 비례한, 막대한 체력의 소모.
내가 텔레포트에 마나만을 이용한다면 놈은 체력과 마나, 둘 모두를 낭비해야 했다.
“네 말대로, 내 마나는 ‘무한’에 가깝다.”
“……!”
상대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플래르쉬 후작의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번에 놈이 흠칫 몸을 굳혔다.
쐐애애애액!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지체 없이 마력 검을 뻗어갔다.
“하니 네 이름 앞에 붙은 ‘점멸’은, 네가 아니라 내게 어울리는 이명이다.”
***
어느 건물의 지하.
“흠…….”
그곳에, 웬 인영이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본래 반라나 다름없던 옷은 응고된 피딱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우측 다리는 무릎 아래부터 완전히 사라진 사내였다.
“일단 폐하의 명으로 이리 데려오기는 했다만… 대관절 너희들에게 이자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군.”
“파이만 공작. 궁금증이 많소.”
“…….”
사내를 데리고 온 이는, 달리 폭발의 검사라고도 불리는 파이만 공작이었다.
그런 그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입조심해라. 폐하의 명만 아니었다면, 네놈들 같은 버러지들과는 어울리는 일도 없었을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가 대신 하는군.”
“…탐욕의 디자이어. 폐하가 왜 네놈을 두둔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미리 경고하지.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다음은 네놈이다.”
“하면, 기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
파이만 공작의 날 선 반응에도, 디자이어는 도리어 미소 지었다.
허나, 곁의 지로시는 아니었다.
“뭘 자꾸 씨부리고 있어. 황제가 우리를 도와주라고 했다며? 일 다 봤으면 얼른 꺼져.”
“…….”
곧장 검으로 손을 뻗어가던 파이만이 이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폐하께서 저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에.
홱!
그제야 파이만이 몸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지.”
“응~ 살펴 가고. 멀리는 안 나간다.”
피식 미소 지은 지로시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일순, 파이만의 이마 위로 희미한 십자 마크가 떠올랐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조금씩 멀어지던 발걸음 소리가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 즉시,
“헹. 별것도 아닌 놈이.”
어깨를 으쓱인 지로시가 몸을 돌렸다.
“어땠어?”
“만약 맞붙었다면 네가 졌을 거다, 지로시.”
“엥? 그걸 어떻게 알아?”
“파이만 공작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도 전쟁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거든? 내가 초월의 꼬맹이와 싸우는 모습, 앤그리 너는 못 봤지?”
“저자는 그와도 격이 다르다. 제국이 왜 오늘날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건지를 잊지 말도록. 단 세 명의 존재로, 스왈로우는 대륙 유일의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걔 중에는 저기 파이만 공작도 포함되어 있지.”
“헹. 아무리 그래도, 이미 죄악의 힘을 50퍼센트 이상 수복한 이상 저 정도쯤은…….”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디자이어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앤그리 말이 맞다.”
“대공?”
“지금 여기서 파이만 공작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나나 앤그리 정도. 나머지는 아직 무리라고 생각한다.”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는데? 그냥 이대로 나가서 한판 붙어봐?”
순간, 나태의 레이지가 지로시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지로시. 대공에게 말투가 너무 건방져.”
“하, 아주 뜨겁네, 뜨거워. 뜨거워서 아주 데이겠어?”
“지로시.”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튼, 이자는 어쩌려고 이리 데리고 오라고 한 거래? 이미 다리 하나를 잃은 병신을 말이야.”
지로시가 툭,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인영을 발끝으로 건드렸다.
“내 죄악의 힘을 사용해 볼까 한다.”
“대공의 죄악…? 그거 설마…….”
“그래.”
디자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진 탐욕의 첫 번째 권능.
그것은 복속시킨 자와의 ‘고위 계약’.
대상이 된 이의 이지를 잃게 만들며, 종래에는 오직 자신만을 따르게 만드는 힘.
더욱이, 생전보다 더욱 강인한 육신을 부여하는 규격 외의 능력.
“사령 기사(Death Knight)라면, 이만한 상처쯤은 금세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