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제국군 본대(4)
한쪽 성벽이 완전히 허물어진 리비아의 성도, 남문(南門).
털썩!
“…쿨럭!”
그곳에서, 한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머릿결은 시뻘건 핏물로 점철된 지 오래였고.
‘앙’ 다문 잇새로는 왈칵 죽은 피마저 흘러내렸다.
“이런 빌어먹을…….”
사내, 에이스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앞에 오만하기 그지없는 표정의 황제가 서 있었다.
“나름, 재미는 있었다.”
턱을 추켜세운 황제가 검을 거두었다.
그 모습에 에이스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목숨을 구걸받고 싶은 생각 따위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동정하는 거냐? 그도 아니면, 네 뭣 같은 잣대로 판단한 배려냐?”
“짐은 인재를 사랑한다. 거기에는 적과 아군이 모두 포함되지.”
“갈수록 좆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네.”
“…뭐라고?”
“너, 그러다 언젠가는 밤중에 칼침 맞을 거다. 그러니까, 후회하기 전에 지금 내 목을 베라는 뜻이야.”
후우웅!
그 순간, 웬 바람이 불어왔다.
에이스의 전신이 움찔 떨렸다.
직후, 살을 에는 살기가 온몸을 잠식했기에.
“그만.”
“…예, 폐하.”
어느새 나타난 십이월의 일인(一人).
폭발의 검사, 파이만이 고개를 숙였다.
기실, 주변의 작품도 모두 그의 솜씨였다.
접근해 오는 이들은 파이만의 단 한 수를 막아낼 수 없었다.
어느새 황금주라 불리는 골드런 공작 또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 오래였다.
나머지는, 문자 그대로 시신의 산(山).
멀리서 희미한 병장기 소리만이 들려올 뿐, 일대에 서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이 네 뜻이 그러하다면, 벌을 내려주마.”
“……!”
황제의 목소리에 에이스가 다시금 정면을 바라봤다.
“파이만.”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저벅, 저벅, 저벅.
직후 파이만이 거침없이 이쪽으로 다가선다.
허나, 에이스는 그런 그를 똑바로 마주 바라봤다.
검을 들어 올릴 여력조차 없음에도 시선만큼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거슬렸을까?
쐐애애애액! 서걱!
파이만의 검이 지체 없이 허공을 갈랐다.
일직선의 은빛 실선은 곧바로 허공을 수놓았고.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고통으로 가득한 비명이 천지를 찢어발겼다.
***
대략 5일하고도 반나절 뒤.
“성도다! 리비아의 성도가 보인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선두의 몽클레어 후작이 마나를 담아 고함쳤다.
그 즉시, 대략 5천에 이르는 병사들이 힘찬 함성을 내질렀다.
3만의 예비대 중 리비아군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원래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도착했잖아?”
“좋네. 서두른 보람이 있구만.”
“아니. 이제 시작이야. 하니, 여기서 조금이라도 쉬는 편이 낫지 않겠어?”
실비아의 말에 나는 힐끗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 말대로, 3만에 이르는 병력들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물론 기껏 일찍 도착해서 휴식에 할애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응?”
“오늘을 위해서, 내가 스실라 씨를 보고 배워둔 마법이 있거든.”
“스실라 씨라면… 치유의 마탑주 님?”
실비아가 대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소리가 제법 컸기에 유리나도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선다.
“또 뭔 기막힌 광경을 보여주려고?”
“지켜나 보셔.”
우우웅!
직후, 나는 가볍게 써클을 진동시켰다.
사제들의 신성력이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치유의 주력은 ‘시간’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가 핵심이었다.
때로는 시간을 역행하여 치명상을 입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 입은 부위의 시간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자체 치유력을 빠르게 만들기도 한다.
하니, 지금 내가 캐스팅해야 할 마법은…
“맥시마이즈 마나(Maximize Mana), 엑셀러레이트 타임(Accelerate Time).”
화아아아아아악!
순간, 두 가지 빛이 내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각기 6써클에 해당하는 고위 마법이었다.
전자는 마나가 닿는 범위를 최대한 광범위하게 퍼뜨리는 역할을 했고.
후자는, 이름 그대로 특정 범위의 시간을 가속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수치로 따지자면, 원래 시간의 흐름보다 대략 4배 정도 빨라진다고나 할까.
“자,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한 시간만 쉬었다 갑니다.”
“……!”
갑작스레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빛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병력들이 진군을 멈췄다.
이미 유리나와 실비아는 숫제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나가 남아돌아? 이만한 범위의 마법을, 한 시간 동안이나 지속시킬 수 있다고?”
“그야, 나는 대륙 제일의 마법사니까?”
“…하여튼 겸손이라고는 조금도 없네.”
실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리나는 아예 대놓고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꼭, ‘나도 가르쳐 줘!’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듯이.
“나도…….”
“안 돼.”
유리나가 무어라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나는 단호하게 말꼬리를 잘랐다.
대번에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였지만, 어쩔 수가 있나?
내가 할 수 있으니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일반적인 마법사에게 주력의 한계는 명확하게 적용된다.
그 부분은 제아무리 나라도 어떻게 해줄 수 없었다.
“그럼, 나는 잠시 성도를 둘러보고 올게.”
“뭐야, 혼자 간다고?”
“가벼운 정찰이야. 또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말을 마친 내가 거침없이 성도 쪽으로 나아갔다.
직후, 루나가 곧장 내 뒤로 따라붙었다.
“루나도 쉬고 있지?”
“나는 괜찮다. 체력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으니까.”
“…그래?”
존재만으로도 든든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이내 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둘이서 얼마나 더 걸었을까?
“…응?”
갑작스레 내 몸이 움찔 떨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명명백백히 느껴졌으니까.
점점이 시야로 틀어박히는 리비아의 성도.
그 위로, 희뿌연 회색빛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거 설마…?”
“내가 가보지.”
스팟!
루나가 지체 없이 땅을 박찼다.
나 또한 마나를 운용해 걸음을 빨리 놀렸다.
“……!”
잠시 후, 마침내 어느 성문 앞에 도착한 우리는 제자리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고.
예의 성문은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리비아의 성도는, 완벽한 ‘폐허’였다.
충분히 버틸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고작 일주일을 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게 대체…….”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폐허 한복판에, 웬 인영이 얼핏 내비쳤기에.
그리고 그 인영은 내게도 상당히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페르…?”
곧 내 잇새로, 놀라움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현 테라 왕국령, 레이브 성.
“…진짜 어이가 없네.”
화이트 드래곤 이리나는 멍하니 아래를 굽어봤다.
무수한 인간의 무리가 성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수만은 훌쩍 넘는 머릿수였다.
“…설마 이 상황을 예상하고 그딴 말을 했던 건 아니겠지?”
이리나는 절로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그 녀석’은 드래곤보다 혜안이 뛰어난 셈이니까.
“테라의 국왕! 여기 숨어 있는 것 다 안다.”
“……!”
직후,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마나를 담아 고함쳤다.
일견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은 사내였다.
주변에 자리한 수천의 인간들보다, 그 하나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그대에게 제안을 하고 싶다! 그대가 세타 쿤 이그니스에게 공작의 위를 하사했다지?”
“…세타 쿤 이그니스?”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지? 놈은 고작 평민 출신이다. 제아무리 알량한 재주가 있다지만, 실로 웃기는 상황이 아니한가?”
예의 사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연이어 이리나의 귓가로 틀어박혔다.
그럴수록 그녀의 미간은 더욱 좁혀졌다.
“내 제안은 하나다. 지금 당장, 이곳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세타 쿤 이그니스의 작위를 박탈하라. 그리한다면, 도망칠 시간 정도는 배려해 주지.”
“…대체 저게 뭔 개소리야?”
이리나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투성이였으니까.
기껏 쳐들어와서 한다는 제안이, 고작 저딴 거라고?
그런 그녀의 의문은 전혀 의외의 인간들에게서 풀 수 있었다.
“저 새끼들, 지금 수작 부리는 거지?”
“그런가 보네. 여기서 세타의 작위가 박탈당하면, 누구보다 녀석의 입장이 난처해질 테니까.”
아래쪽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리나가 힐끗 시선을 내렸다.
지붕 바로 아래 테라스에 세 인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리나의 비상한 머리는 대번에 그들을 기억해 냈다.
분명 둘은 형제였고, 하나는 녀석의 친구라고 했던가…
“근데 뭐, 딱히 상관이 있으려나? 이미 연합군은 세타를 사령관으로 인정했잖아.”
“바이커, 그게 아니다. 애당초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간 이유는, 각국의 인사들에게 꿀리지 말라고 미리 조치해 둔 것이니까.”
“작위도 없는 평민 사령관 따위, 연합에서 인정하지 않을 거다? 그런 뜻이야, 형?”
“대놓고 그리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겠지. 한 명의 존재감이 너무 커지면, 타국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세디스. 네 생각도 그래?”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재차 성문 밖에서 우렁한 고성이 들려왔다.
“딱 10분만 기다리겠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기 바란다, 테라의 국왕이여.”
“…하아.”
결국, 이리나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드래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저들이 알든, 그렇지 못했든.
감히 그녀가 임시 안식처로 삼은 장소를 공격한다 함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으니까.
번쩍!
곧 이리나가 단거리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직후 그녀가 나타난 곳은 예의 우두머리 사내의 머리 위였다.
“시끄러워 죽겠네. 마나를 그딴 식으로 무식하게 운용하면, 듣는 내가 상당히 짜증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니?”
“무슨…?”
사내, 웨이브로 공작이 곧장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살아오면서 온갖 여인을 봐왔다고 자부하는 웨이브로조차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미녀였기에.
순간, 욕구에 초월한 그조차 눈빛 사이로 탐욕이 일렁일 정도였다.
“그대는 누구지? 테라의 마법사인가?”
“네까짓 게 알게 뭔데?”
“…입이 상당히 거칠군. 꼭 내가 힘을 쓰게 만들겠다는 건가?”
“힘을 써? 네가? 나를 상대로? 어떻게?”
순간, 이리나의 입가로 옅은 조소가 맺혀졌다.
그게 웨이브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역시 말로 해서는 알아듣지 못할 여인이었군.”
“야, 그딴 시건방진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냥 좋게 말할 때 꺼져라? 귀찮으니까.”
스팟!
웨이브로는 대꾸 없이 땅을 박찼다.
무려 수십 미터에 이르는 높이였다.
허나, 신체 능력이 극에 달한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다만…
투-쾅!
“……!”
그가 한 가지 크게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곧 웨이브로는 올라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무언으로 말하고 있었으니.
“하여튼 쳐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는 것들이 꼭 있다니까?”
한 박자 늦게,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웨이브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