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공작의 위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폐하! 대체 어쩌자고 그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방 내부에 분기탱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버스 공작의 것이었다.
그는 감히 일국의 왕을 상대로 목에 핏대마저 세우고 있었다.
“공작입니다, 공작! 일개 남작이나 자작이 아니라, 무려 최고위 귀족이란 말입니다. 이건 뛰는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만 진정하시오, 공작.”
“저는 절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감히, 감히 천출 따위가…!”
“천출은 무슨. 이제 잘 알지 않소? 이그니스 백작은 제국의 황족 출신이오. 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비운의 황자라고 하더라도…….”
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인버스 공작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래 봐야 타국인일 뿐입니다. 최소한 테라 내에서라면, 놈은 평민이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어디 이그니스 백작에게 직접 가서 그리 말해보시지 그러시오?”
“정녕 이리 나오실 것입니까? 4대 공작가라니, 살다 살다 이런 치욕을 당할 줄이야…!”
“아까부터 공작이니 4대 공작가니 하는데, 혹 증거라도 있소?”
“……!”
그제야 인버스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테레이라 국왕은 제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있었다.
“폐하…?”
“나는 단지 ‘그리하겠다’라고 대답했을 뿐, 실질적인 무언가를 내어준 게 아무것도 없소. 뭇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식 작위 수여식을 거행한 것도 아니고 말이오.”
“……!”
인버스 공작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잠시 후, 그의 입가로 음흉한 미소가 번져갔다.
“그런 거였습니까?”
“그런 거요.”
“역시 폐하의 혜안에는 제가 발끝도 미치질 못하겠군요.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괜찮소. 그리고, 공작의 작위를 내려준다 한들 또 어떻소?”
“예?”
다시금 인버스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나가다가 이게 또 무슨…
허나,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무늬뿐인 이그니스 공작. 현재의 위세에 심취해 있는 카이클 공작가. 그들 모두가 결국은 내 신하인 것을.”
“무, 물론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이 나라의 왕은 나요. 그 부분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지.”
“하지만 폐하. 카이클 공작가는…….”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듯, 테레이라 국왕이 가볍게 손사래 쳤다.
“장장 3년이요. 그 오랜 기간 끝에 겨우 내전이 끝났는데, 제 사리사욕을 위해 또다시 전쟁을 벌인다? 그리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민심은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설 것이오. 카이클 공작이 그 정도 생각도 하지 못할까?”
“……!”
한두 수 앞을 내다보는 상대의 모습에 인버스 공작은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과연, 왕은 왕이라는 것일까?
더욱이 그리 말하는 테레이라 국왕의 얼굴에는, 어느덧 한 폭의 거대한 욕망마저 자리해 있었으니.
출입문에 시선을 고정한 왕이 이내 비릿하게 미소 짓는다.
“그렇지. 내가 어떻게 키워온 나라인데, 한낱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
한편.
“이거 진짜 미친놈이었네.”
나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옆을 돌아봤다.
허나, 쌍욕을 듣고도 제노스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내 덕분에 공작이 됐군. 너는 이제 내게 빚을 진 거다.”
“하? 아니, 물어나 보자. 상황이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저지른 미친 짓이냐?”
“물론.”
제노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이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는데?”
“애당초 이건 조언이 아니라, 협박이었으니까.”
“협박…?”
“너라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끝났을 왕조다. 이 나라 왕족의 성은, 테레이라가 아니라 카이클로 뒤바뀌었겠지. 내전은 거의 끝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직후, 제노스가 나와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타오르는 듯한 두 눈이 찌르르, 이쪽을 향한다.
“동의하나?”
“…뭘 또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냐. 나도 다른 애들이 아니었다면 그럴 생각도 없었거든? 내가 무슨 이 나라에 특별한 애국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면, 여기서 묻지.”
“……?”
“전쟁이 끝나면, 우리 가문은 다시 테라를 집어삼킬 계획이다.”
“……!”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것도 모자라 주변을 홱홱 둘러보기까지 했다.
“야이 미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테레이라 왕조가 우리 3대 공작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다.”
“…….”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나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국의 뭇 귀족들에게.
특히 3대 공작가 출신의 여인들에게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짓을 저질렀으니까.
하물며, 제노스는 그 비사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내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다.”
“…뭐?”
이건 처음 듣는 얘기다.
“너한테 누나가 있다고…?”
“지금은 없다. 죽었으니까.”
“…무슨 몹쓸 병이라도 걸렸던 거야?”
“아니. 자결했다.”
“……!”
“왕국은 해마다 수십 회의 연회를 열어왔다. 특히, 왕족의 생일에는 무척이나 성대하게 치러지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누이도 초대장을 받았었다. 현재의 테레이라 국왕에게 직접 말이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녀석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제로 범해졌지.”
“뭐!?”
“흔한 일이다. 연회 중에 약을 타는 건. 물론 그 대상자가 왕족이라면 얘기는 조금 달라지지만…….”
“너…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나?”
순간, 제노스가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나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아무튼, 국왕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수치심에 3층에서 뛰어내려 목이 꺾인 내 누이의 일을, 단순 사고사로 탈바꿈시켰지.”
“미친…!”
“그 사실을 나는 뒤늦게서야 알게 됐다. 한데, 그날 이후 황제가 취한 조치가 무엇이었는지 아나?”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건 비고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얘기들이니까.
“사건이 파헤쳐지기 전에, 국왕은 내 아버지에게 혼처를 보냈다. 그것도 제 여동생을.”
“……!”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
정치의 기본이었다.
더군다나 사돈지간이 된다면…
“…혹여 들키더라도 섣불리 돌발행동을 벌이지는 않을 거다. 그리 생각했겠지, 개자식…!”
“다만, 그 시점에 내 아버지는 이미 유부남이었다. 그러니 나와 누이가 존재했던 거고.”
“그럼 설마…?”
“맞아. 정실이었던 내 어머니는 단숨에 후처로 밀려났다. 당연한 결과지. 왕족이 유부남에게 시집을 오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그 정도 양보야…….”
“하… 하하하하!”
어이가 없으면 도리어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허나, 제노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얼마 못 가 돌아가셨다. 원체 몸이 약하신 분이었으니까. 물론 이게 그녀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후 내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벌을 받았으니까.”
여기서 ‘그녀’는 예의 국왕의 여동생을 말하는 것이겠지.
한순간 제노스의 첫 번째 어미가 된 여인.
그녀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했다.
“이제 네게 제안을 하겠다.”
“…제안?”
“나는 마왕과의 싸움에서 너를 도와주기로 했고, 공작으로까지 만들어줬다.”
그제야 나는 제노스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즉, 진짜 기브 앤 테이크는 지금부터다?”
“그래.”
“…뭔데? 그 제안이라는 게.”
다만,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제노스의 말은 나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나를 이 나라의 왕으로 밀어다오.”
***
다음날, 레이브 성의 대회의실.
연이은 충격으로 날밤을 꼬박 센 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
그런 내 옆에 제노스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만 보면 참 특이한 놈이다.
행동은 종잡을 수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든든하기도 한.
“왜 그렇게 보는 거지?”
“…그냥, 갑자기 어제 네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서?”
“잊어라. 지금은 제국과의 전쟁이 우선이니까.”
말은 참 쉽게 한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내가 이내 다른 쪽을 돌아봤다.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연합의 인사들이 속속 착석하고 있었다.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
한데, 그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연합 측 사람들은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내게 깍듯하게 예를 취해왔으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당연한 반응이야.”
“응?”
곧 눈치 빠른 실비아가 다가와 빠르게 속삭였다.
“너, 그 잠깐 사이 리비아에 다녀왔다며?”
“그런데?”
“소문이 다 퍼졌어. 아직 리비아와 제국이 대치 중이라는 상황도 전해 들었고.”
“뒤늦게 정신들을 차리신 거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간밤에 변태 아저씨랑 초월의 마탑주 님이 병력을 이끌고 출발했고, 이들은 남은 수뇌부들이야. 병력은… 약 1만 정도?”
예비대로 1만.
대략 10만의 군이 리비아를 향해 이미 출발했다는 뜻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
물론 제국군에는 이제 내 편이나 다름없는 라포르테 공작이 있지만…
그 하나만 믿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황제가 직접 움직였다는 정보도 이미 접한 상황이니까.
“참고로, 이제 너는 연합의 희망이야. 마탑주를 꺾었을 때도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들 영웅이라며 떠받들고 있으니까.”
“…….”
“하니, 이들에게 명을 내려. 모두 따를 테니까.”
조금 민망하기는 한데.
아무튼 내게는 나쁠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다면,
“…필수 병력만 제외하고, 우리도 곧장 리비아를 지원하죠.”
내 중얼거림과 동시였다.
스르릉!
“……!”
갑작스레 조용히 관망하던 루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루, 루나? 갑자기 이게 무슨…….”
“사령관님께서 명하셨다!”
“……!”
“지금부터 우리는, 전력을 다해 리비아 왕국으로 향할 것인즉.”
루나의 우렁한 고성이 연이어 귀청을 때렸다.
“오로지 연합의 안위를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바!”
“…….”
“항명하는 자는 이 검으로 친히 벨 것이다!”
마침내 말을 마친 루나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님. 명을…….”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리나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아주 그냥 혼자서 멋있는 척은 다 해요. 우리 기사님은.”
“초 좀 치지 마. 진지한 순간이니까.”
“어쭈. 실비아, 너도 이제 권력의 하이에나가 되겠다 이거냐?”
“…전혀 아니거든?”
두 여인의 속닥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직후,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무수한 눈빛이 오직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나는 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것은 오직 나, 세타 쿤 이그니스로서의 의지.
“…출진합니다.”
곧 작지만 또렷한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즉시,
“출진!!!!!!!”
루나가 또 한 번 마나를 담아 있는 힘껏 고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