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또 다른 전생자
울컥.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방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입 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감도는가 싶더니, 곧 시뻘건 핏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건…?”
급격한 조각의 해방으로 인한 부작용일까?
기실, 이러한 현상은 아이젝이 이미 경고했던 것이기도 했다.
문득 아까 있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마기에 대해서는 더 캐묻지 않겠다. 중간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 인간사에 너무 관여하는 것도 규칙 위반이니까.
“…만약 제가 마왕과 결탁하여 중간계를 위협한다면요?”
- 나를 시험하려 들지 마라. 그랬다면 네가 이토록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한마디도 그냥 도와주신다는 말씀은 안 하시네요.”
- 말했다시피, 내가 개입하는 건 진짜 마왕이 현현했을 때뿐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선악이 공존하는 인간이라 한들, 힘을 그런 식으로 다루면 네 명줄을 단축시킬 것이다.
“걱정 감사드립니다.”
-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죄악’의 힘은, 마왕이나 마족이 아닌 생명체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기운이다. 애당초 네가 받아들인 것이 일부 파편에 불과하기에 망정이지… 한계를 넘어서면, 결국 육신은 터져 나가고 말 것이다.
“주의하겠습니다. 아무튼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정이 빡빡해서요.”
- …잠깐.
“네?”
- 아이리스는…….
순간, 무어라 말하려던 아이젝이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아니. 아무것도.
“……?”
- 나 그린 드레곤 아이젝은, 이제 너를 완전히 인정하겠다, 인간이여.
그리 말하는 아이젝의 눈빛은 무어라 콕 집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애틋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듯한.
그런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그는 마침내 우리를 강제 귀환시켰다.
똑, 똑, 똑.
“……!”
그때, 상념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즉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웬 호출이지?”
예상대로, 방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제노스였다.
피곤한 상태였기에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로드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야.”
“로드…?”
멍하니 중얼거리던 제노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일루니스를 말하는 것인가?”
“…그래. 다 알고 있는 듯하니, 이참에 확실하게 물어볼게.”
“……?”
“네 전생은 바람의 일족 ‘라그하일’이 맞는 거겠지?”
“…….”
제노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한참이나 내 얼굴을 빤히 바라만 봤다.
“…글쎄. 그건 또 어떨지.”
“또, 또, 지랄한다. 또.”
“네가 믿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으니까.”
“뭔 헛소리야?”
“기억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가령 9써클 마법 중에는 사자(死者)의 기억을 읽어내는 리드 계열 마법도 존재하니까.”
갈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해대는 제노스였다.
여기서 실랑이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일루니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이 이상의 의문은 의미도 없었으니까.
“됐고. 네가 나와 같은 부류라면, 꼭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뭘 도와달라는 거지?”
“마왕이 중간계를 노리고 있다.”
“그런데?”
“그 전면에는 황제가 있지.”
“…….”
그제야 제노스가 입을 다물었다.
“네 나라, 네 가문. 네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제국. 그리고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주도하는 악의 근원.”
“…….”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잖아?”
“…손을 잡고 공공의 적부터 처리하자, 이 뜻이냐?”
“그런 거지.”
“하면, 나도 부탁이 있다.”
“…엥?”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이 다 있어?
이럴 거면 공공의 적이니 하는 말은 하지나 말던가.
“결국 기브 앤 테이크를 원하신다?”
“싫다면 나는 빠지겠다.”
“…일단 들어나 보자.”
듣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하여, 나는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지금 당장, 나랑 같이 어디를 좀 가줬으면 한다.”
“어딜?”
“가보면 안다.”
제 할 말만 마친 제노스가 이내 방문을 나섰다.
“…일단은 따라가 준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곧바로 녀석의 뒤를 따랐다.
***
리비아 왕국의 수도 인근, 제국 제1군 진영.
결론적으로, 페일은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기다리던 님이 예정보다 하루 빠른 지금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폐, 폐하.”
아직 새벽조차 찾아오지 않은 한밤중이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리비아 각지에는 페일이 심어둔 정찰병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으니까.
허나, 결론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보고조차 올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다름 아닌 황제의 엄명 때문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쿵!
순백의 말을 타고 접근하는 사내를 발견한 페일이 이내 땅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어, 어찌 이리 급하게 오셨습니까?”
“하면, 너 혼자 재미를 보려고 하였느냐?”
“무, 무슨 그런 말씀을…….”
고개를 숙인 채 페일이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같은 피가 흐르는 부자지간이지만.
그는 황제이자 아버지인 눈앞의 사내를 무서워했다.
단순히 두려움을 넘어, 이처럼 온몸이 절로 굳을 정도로.
“…쯧.”
그 모습을 발견한 황제가 가볍게 혀를 찼다.
“페일, 네놈은 여전하구나. 강단이 없어.”
“……!”
“스노비. 그 녀석은 그래도 보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런 걸 보면 괜히 아쉬워진다는 말이지.”
“…….”
페일이 모욕감에 온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이윽고 발딱 고개를 치켜 든 페일이 외쳤다.
“선봉은 제게 맡겨주시지요! 반드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겠나이다!”
“불가(不可)한다.”
“……!”
“방금도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설령 자식이라도, 재미있는 것을 양보하고 싶지 않느니라.”
“하, 하면 선봉은…?”
순간, 백마 위의 황제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선봉에는 내가 직접 선다.”
“헉!”
페일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대륙의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전쟁에서 왕이 직접 최전방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이후의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적군 모두가, 혈안이 되어 폐하를 노리고 달려들 테지.
“폐, 폐하! 아니 될 말씀을…!”
스르릉.
“……!”
일순, 페일이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바로 곁에, 조용히 서 있던 노년의 사내가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십이월, 파이만 공작.
그 이명은 폭발의 검사.
“…지금은 물러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전하.”
빠르게 다가선 라포르테가 속삭였다.
황제의 눈빛 사이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라포르테. 오랜만이군.”
“인사가 늦었습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라포르테가 신속히 예를 취했다.
그제야 파르만도 검을 집어넣었다.
“역시 기사답지 않게 눈치가 빠르군. 그대에게 내 우둔한 아들을 맡긴 것은 무척이나 잘한 일 같아.”
천천히 접근한 황제가 라포르테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순, 파르만의 눈빛 사이로 조소가 깃들었다.
“…….”
그럼에도 라포르테는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흠…….”
잠시 후, 황제가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재미없군. 이리스였다면, 당장에 비아냥거리지 말라며 노발대발했을 텐데 말이지.”
“……!”
“쯧, 역시 하나같이 강단이 있는 놈이 없어.”
라포르테의 이마 위로 희미한 십자 마크가 떠올랐다.
허나, 단지 그뿐이었다.
이윽고 몸을 돌린 황제가 뒤를 돌아본다.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음영.
일렁이는 횃불 사이로 족히 수십만에 이르는 제국군들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휴식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자, 모두 나를 따르라. 지금 당장 출진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직후 울려 퍼지는,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함성.
리비아를 점령하기 위해, 마침내 황제가 이 땅에 도착했다.
***
레이브 성 내부.
“…가자는 곳이 여기였어?”
제노스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방문 앞이었다.
물론 이곳이 어디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인가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고.
특히나 이 방의 주인은…
“멈추시지요.”
앞을 지키던 기사 둘이 당장에 제노스를 제지했다.
허나, 녀석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폐하를 만나러 왔다.”
“…제노스 님. 따로 약속은 하셨습니까?”
“전혀.”
“그렇다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
너무도 쉽게 기각당하는 제노스를 보고 있자니, 절로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폐하가 뭐, 만나고 싶으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인 줄 아나…….”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텐데.”
“엥?”
허나, 이어지는 제노스의 행동은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퍼퍽!
“컥!”
녀석은 단숨에 엑스퍼트 중상급에 이르는 기사 둘을 때려 눕혔으니까.
양 손날을 이용해 목덜미를 후려치는 간결한 동작.
그 즉시, 방문 앞을 지키던 두 기사가 모로 고꾸라졌다.
“이 미친…?”
벌컥!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제노스는 곧장 방문을 열어 젖혔다.
“……!”
내부에서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대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위를 이어가던 기사들조차 작금의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는 모양새였다.
꿈뻑, 꿈뻑, 꿈뻑.
삼 세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고 나서야, 기사들은 마침내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리곤,
촤촤촤촤촹!
열에 이르는 기사들이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제노스 델 카이클! 세타 쿤 이그니스! 대체 이게 뭣들 하는 짓이냐!?”
먼저 온 손님인 인버스 공작이 빼액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럼에도 제노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국왕 폐하.”
“이런 무엄한! 폐하가 네놈 따위가 만나고 싶다고 아무데나 만날 수 있는 분인 줄 아느냐!?”
“당연히 그리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뭐라?”
“이름뿐인 자리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
적나라한 녀석의 말에 인버스 공작이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다른 기사들조차 삽시간에 기세를 끌어 올린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
가히 줄초상이 날 만한 상황이었기에, 빠르게 다가선 내가 녀석에게 속삭였다.
“너는 두고나 보도록.”
“아니 뭔, 내 심장 떨어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이건 네 제안에 대한 내 대답이기도 하다.”
“…뭐?”
“잠시라도. 이왕 누군가의 명을 따라야 하는 거라면… 나는 최고가 아니면 싫으니까.”
“그게 무슨…….”
말을 마친 제노스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기사들이 빠르게 진을 갖추며, 녀석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 멈추시오, 제노스 공자! 이 이상의 거리는 허락하지 않겠소!”
“하면, 여기서 말씀드리지.”
“……?”
순간, 기사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당장 살인이라도 벌일 듯이 다가서던 제노스는, 어느새 거짓말처럼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폐하. 이미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연합군 인사들은 이그니스 백작을 사령관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테레이라 국왕의 딱딱한 육성이 울려 퍼졌다.
기사들에게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짐작이 가는 목소리였다.
“이미 상황을 알고 계시니, 직언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명색이 연합군의 사령관인데, ‘백작’은 지위가 너무 낮지 않습니까?”
“그 말은…?”
“공작의 작위를 내리시지요.”
“……!”
순간, 사람들의 눈이 부릅뜨여졌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 그게 무슨…….”
“영웅은 언제나 혼란기에 탄생하는 법. 지금까지 이그니스 백작의 공적을 생각하면, 이 정도 보상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인버스 공작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놈!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느냐? 지난 일백 년 동안 이어져 온 3대 공작가다. 그걸 근본도 없는 천출 따위를 위해 4대 공작가로 확장하라는 말이냐!?”
“그게 불만이라면, 기존의 공작가를 하나 줄이면 되겠군요.”
“뭐라?”
“저는 그게 인버스 공작가면 아주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공작 님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이노오오오오오오옴!”
직후, 인버스 공작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만 보면, 이 녀석도 남 복장 뒤집어 놓는 데는 선수였다.
“그만.”
“하, 하지만 폐하!”
“자네도 그만하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니까.”
“……!”
이어지는 테레이라 국왕의 말에, 그 인버스 공작조차 입을 다물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물으마. 제노스 델 카이클. 만약 내가 이그니스 백작을 공작으로 승격시킨다면,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두고 볼 것이라 생각하느냐?”
“…….”
역시 정치에 닳고 닳은 국왕인 것일까?
그는 곧바로 핵심을 찔렀다.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하면서, 이간질까지 시키는.
허나, 오히려 제노스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적어도 저희 ‘카이클 공작가’는, 이그니스 백작의 지위 상승을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 말에, 결국 국왕조차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려 귀족파의 수장 격인 카이클 공작가.
그들의 허락을 얻었다 함은, 테라의 70퍼센트 동의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만큼 지금의 카이클 공작가는 테라의 절대 권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곧 낮은 신음을 흘리는 두 권력자를 향해, 제노스가 쐐기를 박았다.
“어찌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