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드래곤(4)
아이리스의 다섯 번째 조각.
이건, 원래라면 최소 8써클 마스터에는 완벽하게 올라서야 해방할 계획이었다.
본능이 경고해 왔으니까.
최소 그 경지가 아니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고.
우웅! 우우우웅!
“…큭.”
허나, 지금의 내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마나와 마기가 한데 뒤섞여 미쳐 날뛰고 있음이다.
- …마기?
그린 드래곤, 아이젝의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는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팽창하는 근육.
가열되는 뇌 내.
심장의 박동 소리가 빨라진다.
순식간에 온몸의 핏줄이 우둘투둘 불거졌다.
콰직!
“……!”
그 순간, 내 눈이 ‘흡’ 하고 치켜 떠졌다.
마치 내부에서 무언가가 부수어지는 듯한 감각.
그게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아주 소중한 다른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할 수 있어.”
그와 동시에 전신으로 들끓어 오르는 미증유의 힘이 있었으니.
지금의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너는 내게 해명을 해야 한다. 그 마기. 설마하니, 마족과 계약이라도 한 것인가?
“…시끄러.”
- 뭐라…?
“시끄럽다고, 이 노망난 노인네야.”
- ……!
대호(大虎)의 모습을 한 아이젝이 살기를 드러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흉성은 가히 실제 범 못지않았다.
- …생각이 바뀌었다. 만약 네가 이 자리에서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쾅!
직후, 아이젝이 앞발로 땅을 후려쳤다.
캐스팅 따위는 없었다.
그 즉시, 바람의 칼날이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며 내게로 쏘아져 왔으니까.
마스터 위의 마스터.
소위, 그랜드 마스터라 불리는 초강자의 검강이 이러할까?
문자 그대로,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힘.
콰콰콰콰콰콰콰콰!
“…흡!”
일순, 나는 호흡을 정지시켰다.
저런 건 하나만 스쳐도 죽음이다.
피하기에도 늦었다.
하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쯔어어어엉!
- …별 웃기지도 않은…….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만 보던 아이젝이 어처구니없음을 드러냈다.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나는 그저 검 하나만을 생성해 냈을 뿐이니까.
허나, ‘바람’이라면 이만한 대응도 또 없었다.
지난 수년.
내가 매일같이 상대해 온 이는, 그 어떤 존재보다 바람을 잘 다루는 강자이자 검의 달인이었으니까.
‘…스승님.’
손안의 마력 검을 있는 힘껏 말아 쥐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나는 폭풍우 속으로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그 즉시, 아이젝의 눈빛 사이로 살기가 폭발한다.
- …기회는 이만하면 충분히 줬다. 하니, 너는 이대로 소멸해라. 그 알량한 자존심을 가지고, 바람에 갈가리 찢겨 나가라.
콰우우우우우우!
바람이 살의를 품는다.
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이다.
오직 드래곤만이 선보일 수 있는 신위였다.
제 의지에 따라, 한낱 산들바람처럼 만들 수도.
때로는, 일국(一國)을 뒤집어놓을 폭풍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는.
서걱! 서거거거거거걱!
서늘한 칼바람에 옷 곳곳이 베여 나가기 시작했다.
살까지 도달한 풍압에 주르륵 핏물마저 터져 나간다.
그럼에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다시 또 한 걸음.
- 건방지다!
꽈아아앙!
순간, 아이젝이 양 두 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본능이 경고한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다르다고.
최소 8써클.
어그러진 주변의 대기는 그 위력을 여실히 짐작케 만들었다.
한순간 바람을 압축하여 포탄처럼 적을 향해 쏘아내는 가공할 힘.
“윈드 버스터(Wind buster)…….”
머릿속으로 새로운 지식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이리스의 다섯 번째 조각.
그 안에는 저것을 막을 방법이 있었다.
꾸득, 꾸드드득.
검을 쥔 팔의 근육이 크게 꿈틀거렸다.
마주 오는 바람에 맞서려 하지 마라.
함께 어우러지는 거다.
파괴가 아닌 조화.
적대가 아닌 상생.
< 너는 드래곤이 아닌 인간이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겠지? >
“……!”
일순,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명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예의 아이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아이리스?”
후웅!
그 순간, 바람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 광풍에 전신을 맡겼다.
놀라운 것은, 하나둘 늘어가던 상처들이 오히려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실제로 의지를 가진 바람이, 살기를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 어떻게…?
곧 경악해 마지않는 아이젝의 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리나조차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나는 그 가운데로 사뿐히 내려섰다.
상당 부분 힘을 흘려보냈다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 …대체 왜 그렇게까지 발버둥 치는 거지? 세상을 구하겠다는 그따위 정의는 네게 없을 텐데?
아이젝의 물음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세상을 구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 하면, 무엇이 너를 이토록 몰아붙이는 거냐?
“저는 그저, 제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 뭐라고…?
“드래곤인 아이젝 님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겠지요. 아니,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을 가장 우선시하는 드래곤들은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얘기일 겁니다.”
- 그게 무슨…….
저벅, 저벅, 저벅.
나는 천천히, 아이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때로는 자신보다 타인을 더 중시하는 생명체.”
- …….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누구보다 사회적인 존재.”
- …….
“특정 순간에는 남을 위해 기꺼이 제 한 몸을 희생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포식자.”
- ……!
마침내 아이젝의 코앞에 꼿꼿이 선 내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인간’이니까요.”
***
리비아 왕국령, 제국 제1군 임시 거점.
“모두 모이셨소?”
“예, 전하!”
제1군의 수뇌부들은 모든 회의를 마쳤다.
그 결과, 오늘 새벽 총공세를 벌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바로 내일이면, 위대한 태양께서 이곳에 당도하신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심장을 취하는 건 당연히 폐하시지만, 그렇다고 먼저 온 우리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깃발만 꽂으실 수 있도록, 잔당들은 확실하게 짓밟아 놓아야 할 것인즉!”
무수한 사람들 앞에서, 1황자 페일 폰 트쉬베르가 말을 이어나갔다.
천막 한가운데 자리한 너른 공터.
수뇌부를 포함한, 수백의 사람들이 모인 상황이었다.
“라포르테 공.”
“예, 전하.”
“그 마법사 놈을 잡을 방법은 찾았습니까?”
“이겁니다.”
순간, 라포르테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페일이 대번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고대 시대의 아티팩트입니다.”
“고대 시대의 아티팩트…? 그 귀한 걸 언제 또 준비하셨습니까?”
“항상 지니고 다녔습니다. 특히 이런 전시에는 언제나 거처에 잘 보관해 두었지요. 효과는, 대상이 된 이의 마나를 완전히 ‘동결’시키는 것.”
“……!”
직후, 페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곧 그의 시선이 라포르테의 손안으로 향했다.
웬 새하얀 막대기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 볼품없는 나무 짝대기가 말입니까…?”
“생긴 건 이렇지만, 개발자가 그 율리우스입니다.”
“유, 율리우스? 설마 내가 아는 그 율리우스 말입니까?”
이제는 페일의 얼굴 위로 경악마저 깃들었다.
드락 율리우스.
인류 역사상 두 번째 8써클 마스터.
비록 머나먼 고대 시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만한 거물에 대한 정보는 기본 소양이자 상식이었다.
“사실이라면… 이걸로 그 녀석도 끝이겠군요. 한데, 제가 듣기로 녀석이 블레어 마탑주와 동급이라고 하던데. 효과가 있겠습니까?”
“확신은 하지 못합니다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같은 경지라도, 고대 시대의 마법사들과 작금의 마법사들은 수준 차이가 어머 어마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럽니다만, 그 마법사들 사이에도 ‘유저’와 ‘마스터’의 격차는 크겠지요?”
“굳이 표현하자면…….”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라포르테가 곧 대답한다.
“기사로 따지자면 엑스퍼트 중급과 상급. 그 정도는 될 겁니다.”
“같은 써클인데도, 최소 벽 하나는 차이가 난다?”
“다만, 이것도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벽은 더 크고 높은 법이니까요. 만약 8써클 유저와 마스터라면… 최소 엑스퍼트와 마스터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어…….”
이윽고 페일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그지만.
검술이라면, 부친의 영향을 받아 꾸준히 단련해 왔으니까.
당장 페일은 황자이기 이전에, 엑스퍼트 중급에 이르는 실력자기도 했다.
“…확실히 가능성은 충분하겠군요. 거기에 이리 라포르테 공도 나를 돕고 있으니.”
이내 페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곧, 목청을 크게 높였다.
“자랑스러운 제국의 수뇌부들은 들으시오!”
“예, 전하!”
“오늘 새벽, 우리는 저 리비아 군을 완벽하게 굴종시킬 것입니다. 하니, 지금 이 순간은 리비아 대장정의 마지막 발걸음이 될 것인즉!”
“충!”
수뇌부들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갑시다! 적군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앞에서 축배를 듭시다. 자신들이 감히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 오늘에야말로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렁한 함성이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페일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무패의 제국군.
그 명성이, 오늘 밤에도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
다만, 그런 페일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이번에는 과연 어떨지.”
라포르테의 중얼거림은 금세 함성에 파묻혔다.
허나 그의 눈빛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
레이브 성의 지붕 위.
“감사합니다. 덕분에 설득이 수월했습니다.”
어느새 본거지로 돌아온 나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뭘. 그래 봐야 당장은 도와줄 수도 없을 텐데. 아이젝도 얘기했다시피, 그게 규칙이라서. 마왕이 진짜 중간계에 현현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간들의 전쟁에 개입할 수 없어.”
“어차피 이리나 님이나 다른 두 드래곤 님이 나서시는 건 최종전이 될 거예요. 물론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제 힘으로 모든 걸 마무리 짓는 거겠지만요.”
“그렇겠지?”
“네.”
“그럼, 이제는 어쩔 셈인데?”
이리나의 동공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밤하늘의 어둠조차 그녀의 미모는 감출 수 없었다.
다만, 드래곤인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특별히 감흥도 들지 않았지만.
“하던 일은 끝마쳐야겠죠. 우선은 제노스 델 카이클. 그 녀석부터 만나러 갈 겁니다.”
“…그 라그하일의 후예라는 아이 말이니?”
“네.”
“걔는 나도 궁금한데…….”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이리나의 관심을 차단했다.
녀석의 성격상, 어떤 돌발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갑자기 드래곤씩이나 되는 존재가 찾아오면 당황할 거예요. 하니, 제가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전생자 주제에, 뭘 또 당황할 것까지야…….”
“일단은 제게 맡겨주세요. 그러고 난 뒤에…….”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힐끗, 내 시선이 지붕 아래를 향했다.
저 멀리서, 웬 익숙한 인영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루나?”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실비아와 유리나, 상당히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세디스와 바이커 등…
모두가 발걸음을 바삐 놀리고 있었다.
내게는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 소중한 동료들이.
…대충 짐작은 간다.
아마 리비아 왕국의 침공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찾아온 것일 테지.
그도 아니면…
‘…내가 걱정됐다던가.’
어느새 바로 아래까지 당도한 루나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불안감으로 가득했으니까.
마찬가지로 나를 발견한 그녀의 표정에 곧 안도감이 깃들었다.
…나는 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저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최근 제가 마탑의 일인자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응?”
갑작스레 목청을 높이는 나를 보며 이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인간 제일이라 불렸던 마탑주를 꺾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이리나의 의문이 짙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니, 저는 탑이 아닌 대륙의 일인자가 될 겁니다.”
나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굳건히 선언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