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드래곤(3)
일천 년.
자그마치 아이리스가 사라지고 흐른 세월이란다.
인간 세타 쿤 이그니스와 드래곤 아이리스 사이에 자리한 억겁의 공백.
그 괴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 당신. 꿈속의 그 드래곤 맞죠? 그 왜, 아이리스에게 ‘로드’의 뒤를 이어야 한다느니 말했던…….”
- …그 얘기를 들으니 오히려 내가 확신이 드는군. 역시 너는 아이리스의 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쿵!
직후, 녹색의 드래곤이 예의 거대한 거체를 일으켰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무려 수십여 미터.
어지간한 성체조차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크기는 한참이나 목을 꺾어도 쳐다보기 힘들었다.
- 이걸로 두 번째인가? 소울 이스케이프에 성공한 이레귤러를 만나는 것은.
“네? 그 말씀은…….”
- 그래. 나는 이미 ‘인간’으로 환생한 또 다른 이레귤러를 만났었다.
“……!”
로드 급 두 드래곤의 확언.
이걸로 확실해졌다.
역시 제노스 델 카이클은 나와 같은 부류의 전생자였다.
그렇다면 그 실체는…
- 라그하일. 우리와 같은 바람의 일족. 허나, 지금은 누구도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규격 외의 이레귤러.
“…….”
- 가장 가까이 지냈던 두 일족이 인간으로… 음. 실례했군.
우우우웅!
순간, 묵직한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말을 잇던 그가 새하얀 광채에 휩싸이고 있었다.
“……!”
곧 내 눈앞으로, 연녹의 털로 뒤덮인 대호(大虎)가 나타났다.
- 이러면 얘기하기 편하겠지?
“폴리모프 형태가… 좀 특이하시네요?”
- 나는 인간을 혐오한다.
“…….”
그 한마디로 나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 말하는 상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마저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가만 보면 절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풍채였다.
거대한 앞발은 바위마저 단숨에 으스러뜨릴 듯했고.
좌우로 살랑거리는 꼬리조차 무시 못할 힘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서늘하게 빛나는 두 호안(虎眼)은 세상만사를 꿰뚫어 보는 듯했으니.
- 방금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
- 나는 네놈 또한 혐오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싫음을 넘어, 살의(殺意)마저 일 정도지.
“……!”
직후, 내 몸이 움찔 떨렸다.
일견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세가 삽시간에 대기를 잠식했으니까.
그 즉시 이리나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요. 아이젝!”
- 너는 빠져라, 이리나. 이건 우리 일족의 문제다.
“하지만…!”
- 잊은 건 아니겠지? 이 녀석 덕분에 우리는 크나큰 위기에 처해 있다. 두 망룡의 망상으로, 무려 멸종을 걱정해야 할 처지지.
“그걸 라그하일과 아이리스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어요. 결국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요!”
- 허나, 만약 ‘소울 이스케이프’가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최초의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면, 지난 천 년 간 이토록 많은 드래곤들이 그 위험한 시도를 하였을까?
“그건…….”
우물쭈물하던 이리나가 이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하여, 내가 직접 앞으로 나섰다.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겠죠. 뭘 원하세요?”
- 특별히 네게 원하는 건 없다. 하니, 너는 이대로 돌아가라. 나는 인간 따위를 상대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음이니.
“…분명 제가 인간은 맞는데요. 그래도 중간계를 지켜보겠다고 찾아온 이를 너무 박대하시는 건 아닌가요?”
- 관심 없다. 당장 내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만사가 귀찮군.
“…….”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나는 힐끗 이리나를 돌아봤다.
눈치 빠른 그녀가 곧장 내 의문을 해소해 줬다.
“…맞아. 아이젝은 무려 전대 로드니까. 남은 수명은 기껏해야 당대 로드와 수백 년 차이지.”
“하지만, 로드 일루니스처럼 육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전력 외로 구분하지 않았겠죠.”
“그야, 그는…….”
바로 그때, 예의 아이젝의 전음이 들려왔다.
- 그 부분은 내가 대신 답해주지.
“……!”
- 세월이 흐를수록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종족이 드래곤이다. 특히 칠천 살 이상의 에이션트 드래곤은 어지간한 성룡 셋도 가뿐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지.
“…….”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울 지경이다.
당장 곁의 이리나만 해도 나 따위가 감히 가늠조차 가지 않는 힘이 느껴지는데.
아이젝은 그만한 존재 셋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잠깐. 무언가 이상한데?’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분명 아이젝은 전대 로드라고 했다.
한데도 당대 로드보다 나이가 적다.
그게 비록 수백 년 차이에 불과할지라도…
연공을 중시하는 드래곤의 생태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쿠구구구구구! 펑! 퍼퍼퍼퍼펑!
“……!”
순간, 상념을 깨뜨리는 공기 터지는 소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대호의 모습을 한 아이젝은 알만하다는 눈빛으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 정이 네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자격을 증명해 보여라.
“…….”
- 참고로, 이미 짐작했겠지만…….
곧 내 앞으로 접근한 그가 새하얀 어금니를 드러냈다.
- 수명과는 별개로, 현존하는 드래곤들 중 내가 가장 강하다.
***
한편, 리비아 왕국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제국 제1군의 임시 천막.
“세타 쿤 이그니스…….”
천막 사이를 거닐던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살아 있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그 아이는 이토록이나 훌륭하게 성장해 줬다.
특히 그 발상은, ‘과연 주군의 자식이구나…’ 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제국을 먹어 치운다라…….”
순간, 라포르테 공작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당대에는 포기했던 꿈이다.
작금의 황제는 규격 외의 괴물이니까.
하여, 다음을 노렸다.
계산은 빨랐다.
차기 황제 후보자는 단 두 사람.
1황자는 욕심만 많은 쓰레기였다.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프라이드만 높은.
하니, 만약 그가 다음 황제로 등극한다면 제국을 무너뜨리기 훨씬 수월해질 것인즉.
다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경쟁자가 예상보다 훨씬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황자는 가히 범 아래에 강아지 없다는 격언을 여실히 보여줬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그는 이미 무수한 강자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 상태였으니까.
의욕을 잃었다.
그간 해왔던 모든 노력이 무용해졌다.
이 비루한 삶의 의미마저 잃어가던 그때.
실로 믿기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다름 아닌 2황자가 실종되었다는 얘기였다.
“라포르테 공.”
멈칫.
순간, 상념을 이어가던 라포르테가 정면을 바라봤다.
외모만큼은 당대 황제와 판박이인 젊은 사내.
1황자, 페일 폰 트쉬베르가 기사들을 이끌고 접근하고 있었다.
화르륵!
일순 불어온 바람에, 곳곳에 설치해 둔 횃불이 크게 일렁였다.
마치 라포르테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소문은 들으셨겠지요? 스노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예. 이미 황궁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겁에 질려 도망이라도 친 겐지, 그도 아니면 엄한 곳에서 객사라도 한 것인지. 아무튼, 하늘이 내 편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군요.”
페일이 빙글빙글 미소 지었다.
기실,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허나, 라포르테는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은근히 배알이 뒤틀렸다.
하여…
“…전하. 주제넘지만, 저는 이럴 때일수록 특히 조심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멈칫.
그제야 1황자의 미소가 굳어졌다.
“흠… 공의 말씀이니 새겨들어야지요. 혹,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신지요?”
감히 흘려듣지 못하는 그를 보며, 이내 라포르테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속언도 있지 않습니까? 산 넘어 산이라고요.”
“…공은 옛날부터 속언을 너무 좋아하는군요.”
“무엇이든 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일개 뒷동산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다음은 굳건한 태산(太山)이 버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
자격.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결국 이번에도 싸워야 한다는 거지.”
우우웅!
써클이 요동친다.
의외로 나는 쉽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일이니까.
- 우습군.
대호의 외형을 한 전대 로드 아이젝.
직후, 그의 아가리가 쩌억 하니 벌어졌다.
콰우우우우우우!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맹렬히 쏟아지는 광풍.
뒤를 잇는 풍압.
절로 온몸이 저린다.
전신의 마나가 미쳐 들끓어 오른다.
드래곤 피어(Dragon fear).
고작 인간의 육신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인 힘의 결정체.
-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건가? 아이리스가 본체로 현신해도, 내게는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거늘.
“큭…….”
- 네가 자격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힘을 선보여라. 소울 이스케이프가 한낱 자살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네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거다.
순간, 아이젝의 두 호안 사이로 거친 기세가 넘실거렸다.
- 죽기 위해 행하는 마법 따위, 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음이니.
“…….”
난이도가 확 올라갔다.
단지 주먹 한 방만 막으라는 레드 드래곤 파이크와 달리.
눈앞의 망할 드래곤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을 내보이라 말하고 있었으니까.
조건이 추상적임은 차치하고서라도.
감히 드래곤을 만족시킬 만한 힘이 무엇이 있을까?
제아무리 내가 블레어 마탑주를 꺾고, 대륙 제일의 마법사라고 불린다 해도 결국은 인간일 뿐이다.
종족 자체가 다른.
달리 마법의 종주라고까지 불리는 드래곤에게, 내 마법은 소꿉장난에 불과할 터였다.
“…제길.”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내 머리로는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젝!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 너는 빠지라고 했을 텐데.
“중간계의 위기에요. 마왕이 현현할지도 모른다고요! 진정 그들이 이 땅에서 활개를 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들은 지난 일천 년간 숨죽여 왔고, 우리가 멸종의 위기에 처한 지금에서야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지.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뜻이다. 현재 인간들의 유래 없는 전쟁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랬던 건가.
역시 제국의 정복 전쟁 또한, 중간계를 집어삼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던 건가.
- 이그란트 대륙은 이미 명(命)을 다했다. 내가 사라지고 난 뒤의 세상 따위…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음이야.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을…!”
순간, 이리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를 뒤로 물린 내가 천천히 전방으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너… 뭐 하는 거야? 당장 뒤로 안 빠져?”
“이건 제 일이에요.”
“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 아이젝은 파이크와 달라. 진짜 소멸당하고 싶어!?”
“아뇨.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뭐…?”
찰나, 눈을 크게 뜨는 그녀를 보며 내가 미소 지었다.
“살기 위해서. 이 땅과 제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서는 거니까요.”
“너…!”
이리나는 채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내가 곧장 나아가기 시작했으니까.
- …멍청하기까지 한 건가?
아이젝의 비아냥거림은 한 귀로 흘렸다.
이미 나는 확실하게 마음먹었기에.
“조금 이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의 경지로는 무리일 수도 있다.
해결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
허나, 그럼에도 지금의 내 머리로는 답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답안지를 빌리는 수밖에. 여기서 다섯 번째 조각을 해제시킨다.’
상념을 마친 내가 이윽고 아이리스의 목걸이를 콰득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