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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219화 (220/251)

219화. 드래곤(2)

“…….”

한편, 방금의 허세와 달리 내 내심은 죽을 맛이었다.

오만의 또 다른 권능.

어떤 공격이라도 단 한 번은 무력화할 수 있는 절대 회피 능력.

이게 아니었다면, 방금의 주먹질로 나는 풍선처럼 터져 나갔을 테니까.

그만큼 상대의 공격에는 어마어마한 거력이 담겨 있었다.

“…호오? 즉, 내가 한낱 모기 새끼만도 못하다는 뜻이렷다?”

“……!”

직후,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자연스레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새로운 이능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불필요한 도발을 하고 말았다.

“아 저, 그게…….”

“아무튼 놀랍군. 방금 그건 뭐지? 잠시나마 전신의 힘이 쭈욱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제, 제 능력입니다.”

“원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기운을 일시적으로 흩어버리는… 그런 기술이죠.”

“호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분명 마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밑천을 다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나는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된 거죠?”

“글쎄. 이대로는 내가 아쉬워서 말이지.”

연이어 ‘뚜둑, 뚜둑’ 하는 관절 꺾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얼굴 위로 다급함이 떠올랐다.

“약속! 약속했잖아요! 명색이 드래곤 아닙니까? 내뱉은 말씀은 지키셔야죠.”

“쩝.”

그제야 파이크가 입맛을 다셨다.

얼굴까지 구겨진 것을 보니 진심으로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 뭐,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휴…….”

“기회가 되면 다시 붙어보자고. 그땐 모기 따윈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전력을 다해줄 테니.”

“아뇨. 허세였습니다. 사실 방금도 죽을 뻔했거든요.”

내가 정색을 하며 답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파이크가 이내 뒤로 물러선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뭘?”

“왜 파이크 님은 소울 이스케이프를 시전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따위 것이 왜 궁금하지?”

“이제 드래곤은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밖에 남지 않았잖습니까? 남은 이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어서요.”

그야말로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다.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 함은, 결국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뜻일 테니까.

나는 그 부분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말이 다섯이지, 이제 드래곤은 종족의 멸종을 걱정해야 할 처지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홀로 남게 된다면… 남은 생이 꽤나 외롭지 않겠습니까?”

“약해빠진 소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하긴, 너는 그 아이리스니까. 그런 게 궁금할 만도 하겠군.”

“…저는 세타 쿤 이그니스. 보시다시피 인간입니다.”

“그러시겠지. 이 얘기는 이만 됐다. 애당초 나는 다른 일족들이 무얼 하든 딱히 관심도 없으니까. 왜 소울 이스케이프를 시전하지 않았냐고 물었나?”

“네.”

내 대답에 파이크가 씨익, 하고 미소 짓는다.

“간단해. 내가 강하기 때문이다.”

“……?”

아니, 뭐 이런 황당한…

당최 이게 무슨 동문서답이란 말인가?

다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드래곤은 언제나 외로움을 느낀다.”

“……!”

“그럴 만도 하지. 수명이 무려 일만 년이다. 그 억겁의 세월을, 드래곤은 홀로 버텨내야 한다. 기실, 지성을 가진 존재들에게는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지. 한 100년만 살아도, 세상 모든 일이 재미없어지는 게 생(生)이라는 놈이니까.”

“…….”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용하다는 뜻이다. 당장 라크제 같은 미치광이 놈을 좀 보라지. 하다하다 이제는 마계의 쓰레기들 따위와 어울려대고 있으니…….”

어느새 파이크는 완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뒤로 접근한 이리나 또한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드래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지. 일만 년을 살면서, 7할을 수면으로 보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그리해도 삼천 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으니까.”

“…….”

“그러니, 이런 엿 같은 저주를 이겨내고 있는 나는 강하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신이라는 놈이 내려준 재능이 아닌,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일만 년이라는 저주를 이용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할 것이다.”

뭉클!

순간, 파이크의 주먹 위로 붉은 기류가 넘실넘실 솟아올랐다.

일견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힘이었다.

아까 내게 선사한 일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그 상태로 파이크는 단지 검지 하나만을 치켜세웠다.

“그리하여, 이 빌어먹을 저주를 내려준 신을 내 손으로 쳐부술 거다.”

팅!

곧 그가 예의 검지를 튕겨냈다.

직후의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퍼석! 투-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우렁한 굉음과 동시에.

동굴 한편으로, 최소 20여 미터에 육박하는 구멍이 뻥하니 뚫렸으니까.

휘오오오오오오오!

한 박자 늦게, 그곳으로 세찬 광풍마저 불어닥쳤다.

“…윽!”

나부끼는 바람에 흙먼지가 인다.

엉망이 되어가는 동굴 속에서, 재차 단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그게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

잠시 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만큼 내부가 엉망진창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파이크는 홀로 그곳에 남았다.

자신은 잡졸 따위는 취급하지 않는다며, 마왕을 상대할 때나 부르라나 뭐라나.

“이래도 되는 걸까요?”

“왜, 믿음이 안 가니?”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언제 마왕이 등장할지도 모르는데 조금 찝찝하달까…….”

“그렇다고, 저 단순무식한 놈을 데리고 다니기도 힘들걸? 나는 마왕이 나타나기도 전에 화병으로 죽는다에 한 표 걸게.”

“…그것도 그렇겠네요.”

나는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내가 본 파이크의 첫인상이 딱 그랬으니까.

“그보다, 먼젓번에 로드가 언급했던 예의 다른 이 말인데.”

“네?”

“왜, 너 말고 마왕을 상대할 또 다른 히든카드가 있다고 했잖아.”

“아하…….”

“혹, 짐작 가는 존재가 있니?”

이리나의 투명한 눈이 내 얼굴을 직시했다.

사실 짐작이랄 것도 없었다.

내심 이미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드래곤이 아니면서, 무려 마왕과 대적할 존재라면…

‘역시 그 녀석밖에 없지.’

생각을 정리한 내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노스 델 카이클.”

“제노스… 뭐?”

“제 아카데미 동기에요. 테라의 명문가 출신인, 소위 말하는 천재요.”

“그러니까 네 말은…….”

찰나, 말끝을 흐리는 이리나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하여, 내가 곧장 말을 대신 이어줬다.

“네. 저와 같은 인간 마법사에요.”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설마요.”

“아님 뇌의 일부가 고장났다던가. 그러고 보니 이상하기는 했어. 너, 로드를 만나고도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잖아?”

“뭔 기억요?”

“아까 봤던 당대 로드 말이야. 네 시절에도 같은 로드였는데, 네가 기억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요.”

내 대답에, 이리나의 예쁜 미간이 좁혀졌다.

“참 이상하다니까? 모르는 척하는 건지, 진짜로 모르는 건지.”

“남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조각을 해제하고 나면, 떠오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기억나지 않아요.”

“…곤란해.”

“네?”

“곤란하다고. 너도 알다시피 우린 일족의 개체 수 자체가 적어. 소울 이스케이프 사태 이전에도, 모든 일족을 통틀어 일백가량에 불과했으니까.”

이리나의 얼굴이 일순 심각하게 굳어갔다.

이번만큼은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을지언정, 모든 드래곤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어. 한 번 들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종족의 특성상,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런데요?”

“파이크야 원체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어 알고도 그랬다지만, 이번에는 아닐 거라고. 너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분명 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존재일 테니까.”

“그게 딱히 곤란할 일이 있을까요? 제가 뭐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잊었어? 이다음은 그린이야.”

“……!”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 알겠니? 너와 같은. 정확히는 아이리스와 같은 일족이지. 심지어, 그는 한때 그린 일족의 ‘로드’까지 맡았던 노룡. 다시 말해, 에이션트 드래곤이야.”

“…….”

“짐작하건대, 아이리스와도 달리 연이 있지 않겠니?”

이제야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만약 그게 좋은 연이라면 관계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악연이라면, 앞으로의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테니까.

***

이리나는 지체 없이 포탈을 생성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가 나타난 공간은 일견 보기에도 울창한 어느 숲속이었다.

그녀는 이곳이 대륙 최남단, 트루크 왕국보다 더 아래라고 했다.

이그란트 대륙의 끝.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천혜의 오지.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마지막 그린 일족은 이곳에 거처를 두고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드래곤은 총 다섯.

그중 셋은 이미 만났고, 하나는 마왕과 결탁한 것으로 의심되는 마룡이다.

하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성과를 얻어가야 했다.

“오랜만에 오는 곳이라 좌표 지정이 좀 우려스러웠는데, 다행히 잘 도착했네.”

휙, 휙 주변을 둘러본 이리나가 중얼거렸다.

문자 그대로, 자연의 대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최소 일백 년은 먹은 듯한 고목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뛰놀던 동물들은 분명 우리를 발견했을 텐데도 눈만 꿈뻑댔다.

마치 이런 생명체는 처음 본다는 듯이.

인간의 기준에서 이곳은 완벽한 미개척의 영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긴 드래고니아(Drogonia). 달리 용들의 서식지라 불리는 곳이니까.’

상념을 마친 내가 이내 정면을 바라봤다.

“이쪽이야.”

이리나는 거침없이 나를 이끌었다.

숲 사이에 난 길을 한참이나 지났다.

그렇게 얼마간 더 걸었을까?

“……!”

마침내 숲속의 길 끝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숲 한가운데 자리한 웅장한 공터.

그곳에 웬 거대한 생명체가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온몸을 뒤덮은 에메랄드빛 비늘.

끝을 모르고 뻗은 기다란 꼬리.

감긴 눈꺼풀조차 어지간한 집체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폴리모프를 해제한 드래곤을 만난 것이다.

“자, 자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럼 깨워야지.”

그리 말한 이리나가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 얼굴 위로 다급함이 떠올랐다.

“잠깐, 잠깐만요. 진짜 그래도 되는 거예요?”

“웬 호들갑이야? 아마 우리가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

“……!”

“그렇지 않아요? 아이젝.”

꿈틀.

그 순간, 에메랄드빛 드래곤의 눈꺼풀이 조용히 들어 올려졌다.

직후, 나른한 두 동공은 이내 내게로 고정됐다.

- 드디어 왔는가? 아이리스여.

“뭣…!”

마치 머릿속에 웅웅 울리는 듯한 소리.

그는 곧장 의지를 전해왔다.

그것도 내가 아닌 아이리스의 이름으로.

가장 큰 문제는, 눈앞의 드래곤이 내게도 상당히 익숙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사실이었다.

-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오랫동안.

“…….”

나는 다시금 그 거체를 훑어봤다.

무언가 다르다.

분명 어디선가 본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드래곤을 보는 것은 처음…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현실은 아니지만, 나는 분명 저 드래곤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매일 밤 꿈에 나왔던 그 드래곤!?”

- …꿈?

“아, 혼잣말입니다.”

일순 머쓱한 표정을 지은 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근데, 뜬금없지만 무척이나 오랫동안이라는 말씀은 좀 이해가 안 되는데요.”

- …?

“아이리스가 소울 이스케이프를 시전하고, 제 나이는 이제 고작 스물이 채 되지 않았는데, 드래곤에게 그 정돈 눈 깜짝할 사이나 다름없으시잖아요?”

직후, 그의 동공 위로 커다란 의문이 떠올랐다.

-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네?”

바로 다음으로 이어진 그의 대답, 나조차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 네가 사라지고, 이미 일천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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