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드래곤(1)
“……?”
내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포탈을 통해 특정 장소로 이동해 온 직후였다.
응당 인식이 그러하듯.
드래곤 레어라고 하면, 어느 거대한 동굴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한데 지금의 이 장소는…
“표정만 봐도 알겠네. 왜 동굴이 아니라 이런 ‘서재’일까… 하고 의구심이 드는 거겠지?”
“티 났어요?”
“척 보면 척이지.”
이리나의 말대로, 내가 발을 딛고 선 곳은 끝없는 책들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일견 보기에도 고풍스러운 나무 책장이 어림잡아 수백 개는 더 있었으니까.
워낙 공간이 거대하여 어디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장소였다.
지붕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외부는 아닌 듯한데…
“로드 일루니스.”
“……!”
순간, 내 몸이 움찔 떨렸다.
이리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
거기에 웬 금발의 인영이 앉아 있었다.
일견 보기에도 무척이나 지적인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세논 스승님의 동생인 세실리아 씨와 꼭 비슷한 느낌이랄까.
“언제부터…?”
그녀는 무릎 위에 책 하나만 올려 둔 채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기 가득한 두 금안마저 반짝이면서.
“역시 오셨군요, 이리나.”
“오랜만이에요.”
“그렇네요. 한 오백 년만인가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전임 로드의 승계식 때 이후 처음 뵙는 것 같은데.”
“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가네요.”
“…….”
이리나의 반응에, 예의 드래곤 로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짐작하고 계셨군요. 제가 이곳을 방문할 것이라는걸.”
“네. 이그드라실이 의지를 전해왔거든요.”
“이그드라실이!?”
순간적으로 이리나가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로드의 금안은 내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옆에 계신 이레귤러 분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였죠.”
“이, 이레귤러요?”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말 그대로, 현재의 개념으로는 무어라 콕 집어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분이기에, 그리 칭한 것일 뿐이니까요.”
“…저를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조금은요? 그야, 저희가 만나는 건 처음이 아니니까요.”
“…네?”
고작 오 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다.
한데, 눈앞의 상대는 내가 지금껏 경험한 그 어떤 존재보다 신비로웠다.
그녀의 앞에 있으면, 마치 온몸이 발가벗겨진 기분이랄까?
‘한데, 진짜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내 내게서 시선을 거둔 로드가 분위기를 환기한다.
“다들 바쁘신 분들이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네?”
“두 분이 저를 찾은 이유는, 아마 ‘마왕의 태동’. 그것 때문일 테지요?”
“……!”
역시 로드라는 것일까?
그녀는 단번에 현안을 꿰뚫어 봤다.
기실, 작금의 대륙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상급 마족이 무려 일국(一國)의 지배자인 공왕의 육신을 차지했고.
칠악의 진정한 목적이 대륙의 생명수인 이그드라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그 야욕은 현재에도 진행형이었으니까.
현실이 이러하니, 중간계의 수호자인 드래곤의 조력은 필수적이었다.
고작 인간의 힘만으로 그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까.
다만, 이어지는 로드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희 일족이 돕는다고 해도 악의 태동은 막기 힘들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망조가 깃든 일족의 누구 덕분에, 지금 용계(龍界) 전체가 말이 아니거든요. 당장 오늘내일하는 저를 제외하면, 고작 셋?”
“……!”
“그것도 옆의 이리나를 포함해서예요. 현재 악을 막을 수 있는 일족의 최대치죠.”
“…….”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의문은 옆의 이리나가 대신 풀어줬다.
“…로드의 수명은 이제 백 년도 채 남지 않았거든. 빌릴 수 있는 건 지식뿐, 육신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야.”
“그, 그런…!”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여, 일곱 마왕이 모두 중간계에 현신한다고 가정했을 시… 로드의 말씀대로, 드래곤 하나가 최소 마왕 둘은 상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힘든 게 맞지. 그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고룡과 맞먹으니까.”
“…….”
이리나가 설명을 끝마쳤음에도,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리 심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그 책임을 한번 물어볼까요?”
그때, 로드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울 이스케이프.”
“……!”
“신이 금기시한 영역. 당대의 일족이 이리된 원흉. 시전 시, 문자 그대로 혼은 육신을 탈출하게 되죠. 본래의 육신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탈피하는 생(生)의 변환점.”
“…….”
“다만, 바뀌는 건 껍데기뿐. 그 알맹이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지요.”
나는 로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 없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니게 되니까.
더 이상 세타 쿤 이그니스가 아니라, 드래곤 아이리스가 되는 거니까.
“저는… 인간입니다.”
“네. 저도 그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찰나, 말끝을 흐리는 로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와 같은 드래곤이기도 하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겁니다. 당신은 현재 존재하는 그 어떤 개념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명백한 이레귤러라고요.”
“…….”
“하니, 만약 제게 조언을 구하러 오신 거라면… 저는 한 가지 답밖에 드리지 못하겠네요.”
예의 현기로 가득한 금안이 다시금 반짝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녀는, 이미 우리가 무슨 질문을 준비한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악(惡)에 대항할 머릿수를 맞출 생각이시라면… 나머지 두 드래곤을 설득해야 함은 물론이고, 당신을 포함한 또 다른 이레귤러.”
“……!”
“‘그’까지 합류한다면, 어느 정도 큰 그림은 그려질 것 같네요.”
***
동이 튼 레이브 성의 지붕 위.
“…….”
로드를 만나고 돌아온 뒤에도 나와 이리나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도 내게도.
이번 만남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조언이나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찾아간 건데,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네.”
“알고 계셨어요?”
“뭘?”
“마왕이 중간계에 현현할 거라는 사실요.”
“…….”
이리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 제국군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마왕이란다.
사실 칠악이 이그드라실을 노릴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마계와 중간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함은.
결국, 저쪽의 존재 또한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이럴 시간이 없네요. 당장 다른 두 드래곤부터 만나보죠.”
“…좋아. 그나마 유한 그린 일족부터 생각했는데, 이왕이면 매부터 먼저 맞는 편이 낫겠지?”
“네? 그게 무슨…….”
이번에도 이리나는 달리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흘려들을 수 없는 경고만 뇌리에 각인시킬 뿐.
“긴장해. 새빨간 놈들은 대대로 성질머리가 뭣 같으니까.”
***
화악!
“…윽.”
밝은 빛무리와 함께,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벌써 몇 번째 포탈의 이동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상상 속의 레어가 눈앞 한가득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공간.
그 한가운데 꼿꼿이 선 적발의 사내.
“파하하하하하하!”
웬 무투가를 연상케 하는 민소매 옷을 입은 그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이리나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 떠졌다.
“파이크. 너도 우리가 올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
그녀의 얼굴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이 꼭, 못 볼 꼴이라도 본 듯한 모양새였다.
“그야 로드에게 미리 연락받았으니까!”
“…아하. 그럼 그렇지.”
“그보다, 옆에 놈이 그 아이리스의 후예겠군?”
순간, 빙글빙글 미소 짓던 적발 사내가 성큼 내게로 발을 내딛었다.
“나와 싸우자.”
“…예?”
갑자기?
…라는 감정을 내가 얼굴 전체로 드러내 놓고 있자,
“자고로 남자는 주먹으로 대화를 나누는 법이지. 참고로, 나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다르다. 보다시피, 마법보다는 육신의 단련에 심취해 있거든.”
“엥?”
내 잇새로 절로 기괴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굳이?
그만한 신의 축복을 타고났으면서 왜?
“너도 궁금하지 않나?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상태로, 용력(龍力)을 얼마까지 끌어 쓸 수 있는지.”
“…딱히 궁금하지는 않은데요.”
“솔직히, 폴리모프는 드래곤의 전유물이면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해.”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본래 힘의 100분의 1도 발휘하지 못하는 이 허약한 육신으로는, 지나가던 잡졸들에게도 딱 맞아 죽기 좋을 테지. 드래곤은 생(生)의 절반 이상을 폴리모프한 상태로 보내는데도 말이야.”
“아, 저는 처음 듣는 얘기라…….”
“이런 혼란기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항상 본체 상태로 다니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고.”
순간, 적발 사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는 거대한 바위를 연상케 하는 두 주먹을 곧게 내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나와 싸우자.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육신으로 나와 맞설 수 있는 존재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거든. 물론, 그중 하나가 너다.”
“치, 칭찬이시죠?”
“물론.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퍼어어어엉!
“……!”
일순,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예의 솥뚜껑만 한 주먹이 내뺃어지는가 싶더니, 직후에는 공기 터지는 소리마저 울려 퍼졌으니까.
반응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저런 무식한 자식이…!”
이리나가 빠르게 내 앞을 막아섰다.
허나, 단지 그뿐이었다.
쩌어어어엉!
“꺅!”
그 즉시 이리나의 가녀린 몸이 훌훌 날아가 버렸으니까.
“이 미친…! 파이크, 이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놈아! 이게 뭐하는 짓이얏!?”
“허허. 방해하지 말고 비켜라, 이리나.”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눈을 치떴다.
무슨 놈의 힘이 저따위란 말인가.
같은 드래곤인 이리나마저 종잇장처럼 날려 버릴 풍압(風壓)이라니.
이 정도면, 가히 육신으로는 일족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드득.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리는 무지막지한 근육이 또 한 번 꿈틀거렸다.
저런 건 폴리모프로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오직 육신의 단련.
그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였다.
저런 괴물은, 아무리 나라도 지금은 무리다.
“자. 와라.”
“자, 잠깐만요.”
“내 주먹을 단 한 방만 막아도 너를 남자로서 인정해 주마.”
“…한 방?”
순간,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방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순식간에 내 얼굴에 평온이 찾아왔다.
거기서 더 나아가, 도발적으로 손가락까지 까딱였다.
“먼저 들어오세요.”
“……?”
내 태세 변환에, 파이크가 곧장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무식한 주먹질쯤, 가만히 서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이어지는 내 말에 그가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또 한 번 터지는 광소.
번쩍!
“……!”
곧 그가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금 뻗어오는 육중한 주먹.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쩌어어어어어엉!
잠시 후, 내가 생성해 낸 막과 주먹이 충돌한다.
사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제대로 먹혔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허나, 정작 나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
털푸덕!
도리어, 때린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우뚱 넘어지기까지 했으니까.
“……?”
그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편에서 지켜보던 이리나는 아예 입까지 멍하니 벌렸다.
“웬 모기가 물고 갔나.”
다만, 나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