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광휘의 검사(1)
“개떼같이도 몰려왔네.”
지금 막 지상을 굽어본 나의 짤막한 감상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아래로 무수한 인의 파도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무려 30만 대군.
말이 30만이지, 성 인근에 자리한 수만 평의 평야가 가득 들어차 보일 정도였다.
“공포탄 개념으로, 일단 허풍선이 메테오 수십 개만 띄워놓고.”
우우웅!
직후, 나는 곧장 마나를 일으켰다.
지금 필요한 주력은 ‘환영’과 ‘증식’.
먼젓번과 같은 가짜에 불과하지만, 이걸 눈치챌 수 있는 이는 전무할 터였다.
마탑주들은 지금쯤 부랴부랴 탑으로 향하고 있을 테고.
설령 그들이 있더라도 써클의 벽을 깨부순 내 마법을 간파할 이는 몇 되지 않을 테니까.
“세타 님!”
“……!”
타이밍 좋게 웬 뾰족한 고성이 귀청을 때렸다.
저 멀리, 성벽 위에서 한 여인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백 미터가 떨어진 이곳까지 목소리가 닿는 걸 보니, 아티팩트라도 사용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반갑나?”
내 입가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누군가에게 의지가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럼에도 매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 이 또한 내가 저들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그보다…….”
순간, 한쪽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살기에 내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거리상으로는 레베카보다 훨씬 더 떨어져 있음에도, 그 기세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제국의 마스터.
대 십이월 중에서도 단연 세 손가락에 손꼽히는 최상위권 강자.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
그에 대한 위명이라면, 마법사인 나조차도 익히 접해왔다.
“듣기로, 혼자서 열 개 기사단 정도는 능히 찜 쪄 먹는다지?”
일당백도 아니고, 무려 일당천이다.
그마저도 천(千)은 하나하나가 병사 일백까지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다는 기사들이었고.
다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은…
“…근데 왜 얼굴이 익숙하지?”
일순, 내 동공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변했다.
거리를 격하고 풍경을 시야에 담는 호크 아이.
호감상의 얼굴이 내 눈에 가득 담긴다.
그 즉시, 나는 빠르게 지상으로 하강했다.
정확히는 라포르테 공작과 딱 오십여 미터를 남겨둔 지면 위로.
사박.
“…….”
그리되자, 순식간에 두 사내가 마주 보는 그림이 그려졌다.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홀로 질주한 라포르테 공작.
그리고 리비아의 수도를 등지고 원군으로 등장한 나.
드넓은 평야에서, 오직 우리 둘만이 서로를 향해 기세를 일으키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
거리가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레베카와는 또 달랐다.
그녀가 아티팩트의 힘을 빌린 것이라면, 눈앞의 사내는 제 능력으로 전언(傳言)을 사용한 것이니까.
물론 이런 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보시면 아시지 않나요? 리비아의 원군입니다.”
“…원군이라… 고작 너 혼자 말이냐?”
“저 하늘 위를 보시면, 고작이라는 말씀은 안 나오실 텐데.”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내가 하늘 위를 가리켰다.
대번에 상대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느냐?”
“그럼요.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님이시잖아요.”
“내 정체를 알면서도 이만한 행동이라…….”
일순, 라포르테 공작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이런 반응은 이전에도 많이 겪어봤는데, 나중에는 다들 한결같으시더라고요.”
“……?”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나는 짐짓 중년 사내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라던가, ‘그 나이에 어찌…!’ 혹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같은?”
“…….”
“그러니까, 한번 붙어보고 나서 말씀하셔도 늦지 않는다는 거죠.”
화르르륵!
직후, 내 주변으로 거대한 불꽃이 번져 갔다.
주변의 대기마저 이글이글 불사르는 홍염(紅炎)이었다.
“이만 돌아가시죠? 저 메테오가 아군 진영 한복판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요.”
“…설마 네가 소문의 블레어 마탑주를 꺾었다는 그 어린 마법사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 정체는 딱히 중요치 않습니다. 만약 이대로 진군을 택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이 눈앞에서 지옥도를 목격하게 되실 거라는 사실. 그것 하나만 알고 계시면 될 뿐이죠.”
“그 전에 내가 네 목을 벨 수도 있다.”
“마법을 너무 모르시네. 이미 캐스팅이 완성된 이상, 혹여 제가 잘못되더라도 메테오는 목표물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할 겁니다.”
“…….”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한데도, 그는 한참이나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말의 진위를 넘어, 마치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종래에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한다.
“…그 전에 하나만 묻지.”
“예?”
“과거에… 너와 내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가?”
“…….”
…아무래도 그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이건 좀 이상한데?
“…아니. 그럴 리가 없지.”
“…….”
“네 말대로,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애당초 겁만 줄 생각이었으니까.”
“…진심이세요?”
“곧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실 거다. 타국의 심장을 점령하는 가장 영광된 순간은, 오직 그분만의 것이어야 하니까.”
말을 마친 라포르테 공작이 이내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그때는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네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도, 하늘 위의 저 메테오가 ‘진짜’인지 아닌지도.”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래서 초인의 직감은 무시할 수 없는 거다.
물론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법.
“이 자리에서 시험해 보고 가시겠다고 해도, 딱히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훗. 또 보지.”
허나, 내 도발에도 그는 조용히 몸을 돌릴 뿐이었다.
***
리비아 왕국에서 대략 수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그곳에서 황제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보고가 아니라 오랜 거래이자 계약의 일환이었다.
“…확실한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세타 쿤 이그니스는… 이리스의 자식이 분명하다.”
“…….”
감히 황제에게 평대를 하고 있는 이.
흑발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서른 안팎의 사내였다.
허나, 그런 껍데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실체는, 대륙 전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칠악의 수좌였으니까.
“오만은… 스노비는 소멸하기 전, 내게 마지막 기억을 전했다. 거기에는 이리스에 대해 묻는 세타 쿤 이그니스의 모습이 똑똑히 담겨 있었다.”
“확실하군. 관계도 없는 이에 대해 캐묻고 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한데, 그 아이라면 이전에도 봤다고 하지 않았나?”
“…그땐 전혀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하긴…….”
그제야 황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칠악이 아니라, 그 마왕이라도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과거의 저주받은 아이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화려하게 성장해 줄 줄.
“큭큭큭. 결국 돌고 돌아 내게 칼을 겨누는 것인가? 이리스여.”
“…….”
“이 또한 나의 업보겠지. 아직도 녀석의 심장에 이 손을 박아 넣던 감각이 생생하니까.”
말을 마친 황제가 정면을 바라봤다.
그곳에 예의 무표정한 얼굴의 흑발 사내, 디자이어가 서 있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살아남은 모든 칠악을 동원하여 최우선적으로 세타 쿤 이그니스를 죽일 생각이다.”
“호오. 하면 나는 더 이상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그야 네 자유다만, 너무 마음 편히 생각하는 것 아닌가? 세타 쿤 이그니스가 정말로 이리스의 자식이라면, 그 녀석도 정통성을 가진 정식 ‘황위 계승권자’다.”
황제는 도리어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었다.
“이전부터 누누이 얘기해 왔지만, 후계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 아랫것들이 하도 귀찮게 해서 정해둔 것일 뿐, 내가 죽고 난 뒤의 세상이야 설령 망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믿지 않으면서도 네놈들과 계약을 한 것이다. 영생(永生). 내가 원하는 건 오직 그것 하나니까.”
말을 마친 황제가 다시금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기실, 그는 근래에 부쩍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음에도 세월의 한계는 넘어설 수 없었다.
설령 초인이라 한들, 어디까지나 그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데, 듣기로 그 녀석이 연합군의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고 하던데. 만에 하나 녀석이 원군을 이끌고 리비아로 향해 온다면, 뒷일은 볼만하겠군.”
“무슨 뜻이지?”
“그곳에는 라포르테가 있지 않나?”
“…….”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디자이어가 입을 다물었다.
곧 두 손을 깍지 낀 황제가 제 몸을 쑥하고 내밀었다.
“아마 녀석은 이리스의 아들을 단번에 알아볼 것이야. 그리되면, 이 나를 배신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군. 과거의 ‘그날’처럼 말이야.”
***
깊은 밤.
나는 리비아의 성도 내에서 성대한 환영회를 대접받고 있었다.
연합군마저 눈치를 살피고 있던 상황에서, 이들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세타 님. 한 잔 더! 한 잔만 더해요오오오…!”
드넓은 연회장 한복판에서 레베카가 흐느적흐느적 내게 엉겨 붙었다.
아직 전시임에도 이리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허나, 한편으로는 이해도 간다.
그간 이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도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겠지.
그런 와중에, 실로 오랜만에 안심할 만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고.
“세타 님이 즐겨주시지 않으시며언… 제가 폐하께 꾸지람을 들을 것이에요오오오… 그분이 직접 신신당부하신 일이니까아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잠깐 화장실만 좀 다녀오자.”
솔직히 내심 내 마음은 불편했다.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른 필수 병력들은 모두 성벽 경계를 나가 있는 상황이니까.
사적으로는, 이리나에게 금방 다녀오기로 약속까지 했고.
“하아…….”
계속해서 접근해 오는 사람들을 헤치며 가까스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정원까지 걸어 나오자, 차가운 밤바람이 열기를 식혀줬다.
이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내가 떠난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곤란했다.
하니, 이대로 소리 소문 없이 떠날 계획이었다.
길어야 2주면 연합군이 도착할 테니, 내가 떠난 이후에도 당분간은 문제없을 터였다.
“……?”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순간적으로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정원 구석에, 웬 사람의 인영이 언뜻 내비쳤기에.
문제는, 그가 내게 꽤나 익숙한 기운을 내흘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곧 내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비록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지만, 내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저자는…
“역시 바로 알아보는군.”
예의 사내가 곧장 내게 다가왔다.
어느새 일대에는 희미한 기막까지 둘러쳐진 상태였다.
“당신이 어떻게…?”
“그리 경계할 것 없다. 싸우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
“…적진 한복판에서 그리 말씀하셔 봐야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만…….”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지.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혹,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코지를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걱정되나? 보기보다 간이 작군. 아까의 그 패기는 어디로 갔지?”
“그땐 그냥 쌘 척 한 번 해본 거였고요.”
“…….”
내 말이 무척이나 의외였는지, 이내 사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로브 사이로 밝은 금발이 찰랑인다.
명성과 상당히 어울리는 외형을 가진 사내.
“하면,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마침내 그가 로브를 슬며시 벗어젖혔다.
예상대로 내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
“네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이지?”
그가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