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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215화 (216/251)

215화. 연합군 총사령관(4)

“…….”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인의 한마디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네년…! 지금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것이냐?”

인버스 공작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기실, 그는 수치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외부 인사들이 보는 앞에서 하극상이라는 치욕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기사들은 뭣들 하고 있는 게냐!?”

촤촤촤촤촹!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어디까지나 테라의 앞마당이었으니까.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난 연합 측 귀족들이 그 즉시 뒤로 물러섰다.

“이런, 남의 집안싸움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노르망의 몇 없는 마스터, 클레오 백작이 말했다.

한데 그런 그의 눈빛에는 이상하게 이채마저 흐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단번에 꿰뚫어 봤으니까.

저기 있는 흑발 여인의 소문은 클레오 백작도 익히 들어왔다.

루나 틴 론지에.

극상의 미모와 더불어, 테라 제일의 재능을 지닌 검사.

더하여 테라 내에서 가장 빨리 ‘마스터’에 도달할 것이라 거론되는 1순위의 천재.

허나, 결론적으로 그 소문은 틀렸다.

그가 보기에 이미 저 여인은…

우우웅!

“……!”

직후, 한줄기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여인의 검에서 파생된 검명(劍鳴)이었다.

농도 짙은 마나에, 주위를 둘러싼 십 수 명의 기사들이 대번에 움찔 몸을 떨었다.

“부하들을 물리시지요.”

“이 무엄한…!”

“사태 파악이 덜되신 모양입니다만, 목이 아니더라도 팔 하나쯤은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서걱!

목덜미에 드리워져 있던 검이 어깨로 옮겨갔다.

그 즉시, 인버스 공작의 상의 일부가 예리하게 잘려 나갔다.

“…큭!”

상황이 이리되자, 한참이나 끙끙 앓던 인버스 공작은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물러서라!”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이러고도 네년이 무사할 줄 아느냐?”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물론 전시 상황이니만큼, 새로이 취임하는 ‘신임 사령관’님에게요.”

“핫! 그 녀석을 믿고 있는 모양인데, 한 가지 네년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

순간, 고개를 갸웃하는 여인을 향해 인버스 공작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국(一國)도 아니고, 최소 오 개국이 한데 모인 연합의 사령관 자리다. 역사를 되짚어 봐도 이런 막중한 자리에, 백작은커녕 후작조차 오른 전례가 없었지.”

“…….”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최소 일국의 공작 정도는 되어줘야 누가 보더라도 납득할 만한 그림이 그려진다는 뜻이다.”

여인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황당함이 떠올랐다.

일견 듣기에, 논리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장난에 불과했으니까.

허나, 최소한 클레오 백작만큼은 저 말에 공감했다.

“그따위 지위가 무에 중요하다고…….”

“아니. 일리는 있소.”

“……!”

직후, 여인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클로에 백작이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인간 같지 않은 외모를 정면에서 마주하자, 이성 따위에 초월했다고 생각한 그마저 흔들리는 것이다.

더욱이 저토록 강한 검사라니…

곧 그의 얼굴 위로 절로 느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인버스 공작님의 말씀이 맞소. 여기 있는 모두가 인정하더라도, 각국의 귀족 분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 테니까. 자국의 고위 귀족도 아니고 타국의, 그것도 자기보다도 지위가 낮은 귀족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그따위 지위가 무에 중요하다고…….”

“그런 게 ‘인간’이니까.”

“……!”

“자리를 만들고, 같은 인간을 급으로 나누지. 그렇게 탄생한 것이 국가(國家)이고, 크게는 신분과 계급 사회요.”

“…….”

“한데, 그 와중에 소위 지체 높으신 분들이, 고작 나와 같은 백작의 명을 따른다… 없던 반발심마저 생기지 않겠소? 더욱이, 능력과는 별개로 이그니스 백작은 이제 고작 스물의 나이에 불과하니, 더 말할 것도 없겠군. 당장 우리만 해도 그에 대한 첫인상이 그랬으니까.”

“…….”

“즉, 지금 인버스 공작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건, 최소한의 필수 불가결한 ‘요건’이라는 거요.”

이윽고 말을 마친 클레오 백작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시점에서, 인버스 공작의 얼굴은 완전히 되살아나 있었다.

반대로, 루나는 슬며시 미간마저 좁히고 있었고.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

“이만 이 검부터 치우시지. 아까 뭐라고 했더라? 신임 사령관에게 죄는 달게 받는다고 했던가?”

말을 마친 인버스 공작이 슬며시 검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럼에도 루나는 이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딱히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신임 사령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을 기대하지.”

이내 완전히 기사들의 뒤로 몸을 숨긴 인버스 공작이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죠.”

“……!”

한쪽 구석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루나의 입장에서는 전혀 뜻밖의 지원군이었다.

여태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실비아 스필 세드릭.

그녀였으니까.

한데, 다음으로 이어진 그녀의 발언이 실로 상상 초월이었다.

“제가 그와 약… 으흠, 약혼(約婚)할 예정이거든요.”

“뭐, 뭣…!”

인버스 공작의 두 눈이 당장에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왕국에 셋밖에 없는 공작가.

가주 대리로서, 임시로나마 이미 그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니…

“어디서 개수작을,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

“어머. 이런 부끄러운 얘기를, 제 입으로 떠벌리고 다닐 리가 없잖아요?”

“……!”

무수히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속, 실비아가 생긋하고 미소 지었다.

“하니, 말씀하신 요건이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이그니스 백작은 우리 세드릭 ‘공작가’의 대표로서 여러분들과 함께할 예정이니까요.”

***

성의 지붕 위.

“…후회할 것이오.”

대공, 디자이어가 말했다.

그런 그의 멱살을, 순백의 미녀가 강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언령의 힘으로 디자이어는 이미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니?”

“…대세는 이미 완전히 넘어왔소. 제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누가 그러더라.”

“……?”

“개소리도 자꾸 들어주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

직후, 디자이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환하게 미소 지은 이리나가 ‘와직!’ 손아귀에 힘을 줬다.

곧이어,

파스스스스!

외부의 충격에, 이내 디자이어의 분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다음에는 본체로 와. 건방지게 분신 따위로 인사하러 오지 말고.”

순식간에 고요한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달빛 아래.

아름답게 흩날리는 흑색의 가루는, 이리나의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

그제야 내가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렇게 끝내도 괜찮을까요?”

“뭘?”

“차라리 언령으로 정보를 불게 만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방금 못 봤니? 실체가 없는 존재에게는, 언령도 통하지 않아. 아마 자의로 분신을 소멸시키고 말겠지.”

“…그래도 이대로는 영 찝찝한데…….”

“됐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이전에는 선택이었지만, 이제는 필수가 된 듯하니 거부할 생각은 하지 말고.”

멈칫.

내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이리나는 예의 투명한 동공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네 찝찝함도 해소할 겸, 이제 슬슬 다른 드래곤들을 만나 봐야 하지 않겠니?”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다른 드래곤.

아마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존재를 말하는 것이리라.

“물론, 라크제는 빼고. 그놈은 나도 께름칙하거든.”

“그 흑룡이라는…?”

“맞아.”

“…….”

고민된다.

그것도 상당히.

이리나야 전생의 연으로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다른 드래곤이라고 그럴 것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더하여, 지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저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그럼, 한 가지 일만 처리해 놓고 가죠.”

“한 가지 일…?”

웨에에엥!

대번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리나를 일별하며, 나는 곧장 색욕의 이능을 발동시켰다.

“또 어디 가게?”

“시간을 좀 벌어둬야 할 것 같아서요. 아군의 사기도 진작시킬 겸.”

“뭔 소리래?”

“딱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말을 마친 나는 지체 없이 이능 안으로 몸을 집어 던졌다.

***

보름달이 떠오른 밤.

리비아 왕국의 수도 전역으로 동시다발적인 야습이 시작되었다.

적군은 예정보다 훨씬 더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견고한 성벽 위.

어느새 그곳에는 국왕을 포함한 권력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물론, 골든 버드 상단의 대행수를 맡고 있는 레베카도.

“…오늘이 고비겠군.”

세간에는 달리 황금왕이라고 불리는 골드런 공작이 침음을 삼켰다.

도합 30만 대군.

저만한 군사를, 지금의 리비아로서는 막을 여력이 없었다.

“제국군…….”

이제 왕국에 둘밖에 남지 않은 마스터, 테르말리온 후작이 돌연 눈을 부릅떴다.

“…전령?”

초인의 범주에 오른 그는 볼 수 있었으니까.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는 군대 속에서, 한 인영이 빠르게 뛰쳐나오고 있다.

그는 순식간에 성벽 밖 200미터 부근까지 이르렀다.

마법과 화살도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

허나,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나는 스왈로우 제국의 기사, 라포르테 카일 무허다!”

“……!”

사람들의 얼굴 위로 점차 경악이 떠오른다.

사태를 관망하던 그 골드런 공작조차 이제는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과, 광휘의 검사!”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던가?”

홀로 나섰음에도, 그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여기 그대들의 자랑이 이런 볼품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직후, 라포르테 공작은 손안의 무언가를 휘돌렸다.

마치 포환이라도 던지는 듯한 자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쐐애애애애액!

둥그런 무언가가 빠르게 밤하늘을 갈랐다.

철퍽! 데구르르르르.

그것은 성벽 위, 정확하게 고위 인사들이 모인 인근으로 떨어졌다.

“음…….”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흘렸다.

수급(首級).

본래 리비아의 위대한 마스터였던 그가, 머리만 덩그러니 귀환한 것이다.

“그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항복하라. 지금이라면 내 직접 황제 폐하께 특별히 간언드려, 리비아의 자치를 인정해 줄 테니!”

“리, 리비아의 자치?”

팔랑 귀로 유명한 현 리비아의 국왕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아니 될 말입니다. 저건 스스로 속국이 되라는 뜻입니다. 예전의 공국처럼요.”

“맞습니다. 이제야 한 걸음 나아간 스란인데, 반대로 우리가 일보후퇴할 수는 없지요.”

차례로 골드런 공작과 테르말리온 후작이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모두 죽게 될 겁니다. 경들도 보셨지 않습니까?”

국왕이 잘린 수급에서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베카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기실, 강대국인 리비아가 이토록 허망하게 밀린 대는 저 국왕의 유약한 성격도 크게 한몫했으니까.

‘이대로는…….’

레베카는 혹시나 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 순간 생긴 일종의 버릇이었다.

일전에 검은 마물의 숲에서 구명(求命)의 은혜를 입은 ‘그날’부터.

자연스럽게 한 사내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럴 때 그라도 있었으면…….”

…무척이나 든든할 텐데.

라고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화르르르르르르륵!

“……?”

그 순간, 레베카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하늘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광경에 그녀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불꽃.

허나, 그 실체는 마법사들에게 전설이라 불리는 메테오.

“서, 설마…?”

곧 레베카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됐다.

빠르게 번져 가는 적색의 하늘 아래에, 한 사내가 오롯이 서 있었다.

물론 레베카는 그의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소설 속,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하는 사내.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한 이.

문자 그대로, 천군만마(千軍萬馬).

“세타 님!”

마침내 입이 귀까지 치솟은 레베카가 뾰족한 고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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