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연합군 총사령관(3)
늦은 밤.
출진을 하루 앞두고, 나는 레이브 성의 지붕 위를 올랐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
휘영청하게 떠오른 보름달이 그곳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 가만히 앉아 있는 어느 절세의 미녀.
“왔니?”
새하얀 백발.
눈꼬리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속눈썹.
허나, 아름다운 외모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녀의 알맹이는 세상 그 무엇보다 흉포한 생명체.
‘압도적’이라는 표현으로도 수식이 부족한, 드래곤이니까.
“자, 여기 목걸이.”
나를 발견하는 즉시, 화이트 드래곤 이리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일전에 내가 잠시 맡겼던 아이리스의 목걸이였다.
내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생각보다 빨리 돌려주시네요?”
“이미 연구가 끝난 물건인데, 오래 붙들고 있어봤자 짐만 될 뿐이니까.”
“즉, 목걸이의 비밀은 모두 알아내셨다?”
“어느 정도는? 근데, 진짜 실체는 오직 사용자의 마나에만 반응하게 되어 있더라. 같은 드래곤이 만든 물건이라 그런지, 언령의 힘으로도 강제 개방할 수는 없었어.”
“강제? 그건 안 되죠! 혹시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얘, 방금 못 들었니? 그래서 시도도 안 했다니깐.”
“…진짜죠?”
나는 의심스러운 낯빛으로 목걸이를 내려다봤다.
당연하겠지만 외관상으로는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애당초 내가 원했던 건 아이리스의 기억이지, 지식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덕분에 좋은 연구가 됐다?”
“…….”
그때까지도 하늘 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이리나가 고개를 내렸다.
곧 희미한 광채로 빛나는 두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째 분위기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느낌이다.
“…저한테 따로 궁금한 건 없고요?”
“딱히?”
“그럼, 이번에는 제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게 진짜 목적이었구만.”
피식 웃음을 터뜨린 이리나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용심(龍心) 썼다. 물어봐.”
“…뭔가 저한테 되게 관대해지신 것 같은데?”
“싫음 말던가.”
“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직후, 나는 잽싸게 그녀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공짜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이리 허무하게 날려 먹을 수는 없으니까.
“제법 골치 아픈 문제인 모양이지?”
“그럴지도요?”
“뭐길래.”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혹, 남은 드래곤 중에 배신자가 있는가 해서요.”
“배신자…?”
내 질문이 무척이나 의외였는지, 이리나가 잠시간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꿍꿍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나?”
“아,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저, ‘마왕의 권속’에게서 얻은 정보가 드래곤과 관련되어 있다 보니…….”
“뭣!?”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리나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엿본 오만의 기억.
거기에는 분명 칠악을 돕는 드래곤이 있었다.
허나, 오만도 단지 존재만 알고 있을 뿐.
그에 대한 건 전적으로 ‘대공’이라는 자가 일임해 왔다.
“뭔가 집히는 구석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먼젓번에도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생존해 있는 드래곤은 나를 포함해 총 다섯이야.”
“정말로 그것밖에 안 된다고요?”
“그래. 두 망룡이 어지간히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야지. 나머지는 각기 레드, 블랙, 골드, 블루였던가?”
“음…….”
절로 내 잇새로 침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리스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아니, 어쩌면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나였기에 이유 있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그중에 배신자가 있다면…….”
찰나, 턱을 괸 채 고민하던 이리나가 이내 말을 잇는다.
“흑룡(黑龍) 라크제.”
“……!”
“그 녀석이 가장 유력하겠네.”
“흑룡 라크제…?”
“뭘 모르는 척이야. 그에 대한 정보라면, 이미 네 머릿속에도 들어 있는 것 아닌가?”
“그게… 다른 드래곤과 관련된 정보는,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없어서요.”
“뭐?”
이어지는 내 말에 이리나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으로는 ‘그럴 수도 있나…?’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하면서.
“아마 제가 목걸이의 힘을 다 해방하지 못해서일 거예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이리스의 목걸이는 총 여섯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는 그중 네 번째까지가 한계였거든요.”
“아하, 그래서 그랬구만.”
그제야 이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곤 자못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거 다 해제하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볼만하겠는데?”
“…네?”
“아냐 뭐, 곧 알게 될 테니까. 이것까지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게 무슨…….”
“너, 벌써 7써클에 올랐지 않니?”
“…….”
역시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이라 그런지 내 경지를 단숨에 꿰뚫어 봤다.
“다섯 번째야 언제든 해제할 수 있을 거고, 마지막 여섯 번째는… 길어야 10년? 그 정도면 충분하겠구만.”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니에요?”
“객관적인 평가겠지. 내가 본 너라면, 인간의 몸으로 9써클도 가능…….”
흠칫.
그 순간, 내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이리나의 뒤쪽.
그곳, 지붕 바닥에서 무언가가 뭉클거리며 솟아나고 있었다.
“위험해요!”
“……!”
그걸 보는 즉시, 나는 이리나를 안고 땅을 굴렀다.
‘꺅!’ 하는 단말마 비명과 함께, 우리는 곧 한 몸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뭐, 뭐 하는 거야, 비켯!”
드래곤답지 않게 얼굴까지 빨개진 이리나가 나를 밀쳐 냈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게 조금 위험해 보여서…….”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니? 이미 알고 있었거든?”
곧 우리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어느새 완전히 형상을 갖춘 인형이 지붕 한편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당신은…….”
몇 번인가 봤던 사내였다.
오만의 기억을 흡수한 지금.
나는 그의 정체를 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칠악의 수좌.
일곱 죄악 중 가장 강력한 ‘탐욕’의 힘을 가진 존재.
동료들 사이에서는, 달리 대공이라고 불리는 그의 이름은…
“…디자이어.”
“내 이름까지… 역시 오만의 힘을 취한 건가?”
허나, 눈앞의 인영은 실체가 아니었다.
탐욕의 수많은 권능 중 하나.
분신화(分身化).
하니, 이곳을 방문한 그의 목적은 전투가 아닌 ‘대화’다.
“재미있군. 하나도 아닌, 세 마왕의 힘을 가진 인간… 역대 권속들 중 이런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 참, 대단히 영광이네요.”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네가 얻은 힘은 마왕이 가진 죄악의 일부일 뿐이니까. 저 하늘의 태양으로 따지면,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하지.”
“그래서요?”
“너무 많은 과욕은 네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이다.”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고작 그런 얘기나 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시죠?”
“…아직 이쪽의 전력을 알지 못하는 너로서는, 제국 하나만 상대하기에도 벅찰 것인즉.”
순간, 말을 마친 대공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건 진정으로 의외의 행동이었다.
“이쪽으로 붙어라.”
“엥?”
“비록 파편이라 할지라도… 색욕과 식탐, 오만의 힘까지. 세 가지 죄악을 품에 안은 존재. 드넓은 마계에서도 딱 하나뿐이었다.”
그런 건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가 마계에 갈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이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니까.
“무엇보다, 이제 중간계에 우리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 드래곤조차 이미 우리 편에…….”
흠칫.
순간, 대공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한없이 요동치는 동공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옆쪽으로.
“누구지? 당신은.”
“참 빨리도 알아봐 주시네.”
이윽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이리나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제법 재미있는 얘기를 하더라?”
“…설마 아니겠지?”
불신으로 가득한 대공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이리나의 눈꼬리는 완연하게 휘어졌다.
“중간계에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네마네…….”
더 나아가 제 손마디 관절을 ‘뚜둑, 뚜둑’ 꺾어대기까지.
“내가 함 막아줄까?”
“…….”
…저 대공이라는 자도 참 재수가 없었다.
많고 많은 시간 중에,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방문해서는.
***
대회의실.
아직 남아 있는 테라의 귀족들은 여태 연합의 인사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세타 쿤 이그니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게도 그 선두에는 인버스 공작이 있었다.
이미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이상.
사령관으로 부임한 세타가 어떤 돌발 명령을 내릴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고작 스물도 되지 않은 애송이입니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지만, 사령관이라니요.”
“그럼 어쩌겠소? 직접 황자의 목을 베겠노라 공언까지 했는데.”
“그거야 놈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에 내뱉는 말 아니겠습니까? 기존의 황자가 죽으면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겠습니까? 결국 차기 황권은 황자들 중 하나가 잇게 될 텐데, 모든 후계가 사라지면 뒷일은 뻔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오. 허나, 내부 권력 다툼으로 저 거대한 제국이 스스로 지리멸렬해 준다면, 우리야말로 가장 큰 이득이겠지.”
“허어… 얘기가 왜 또 그리 되는 것입니까? 요는 세타 쿤 이그니스가 제국의 황자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내리는 명들을 하나하나 의심부터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 불만이시면, 공작께서 직접 테라의 국왕께 간언하여 처리하지 그러시오?”
“……!”
연합 측 한 귀족의 말에, 이내 인버스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야 그렇다 쳐도, 대관절 공작께서는 왜 그렇게까지 이그니스 백작을 싫어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소. 같은 나라 귀족이 아니었소?”
“…….”
이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반발하면,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 추태를 부리는 퇴물.
딱 그 정도로 비춰질 테니까.
허나,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세타 쿤 이그니스가 황자를 베는 날이 온다면…
그의 위상은 이전과는 비할 바조차 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손쓸 새도 없이 이 나라에서 도태될 테니까.
하니, 반드시 그 전에 무너뜨려야 했다.
설령 살을 일부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의 짐작이 맞습니다. 저와 이그니스 백작의 사이. 말씀대로 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거야 보면 알 수 있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드리기 민망할 정도로 질긴 악연이지요.”
“……?”
여태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이들이 그제야 흥미를 보였다.
인버스 공작의 의도가 일부 먹혀든 것이다.
이제 연합 측 귀족들은 그 악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여기서 그는 모두의 예상을 또 한 번 뒤엎었다.
“이그니스 백작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제가 실각할 가능성은 훨씬 커질 겁니다. 아니, 반드시 그리되겠지요.”
“본론만 말씀하시오.”
“여러분이 제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대신! 전쟁이 끝나면 우리 테라는 사후의 이권을 모두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직후, 연합 측 인사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 그게 정말이오…?”
“아직은 명백한 열세지만… 이기기만 한다면 그 이권은 실로 어마어마할 터인데?”
“당장 제국만 해도 땅덩어리가 얼마나 넓습니까? 그 안에 있는 천혜의 자원들은요?”
사람이 이렇다.
승산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도, 아직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님에도, 훗날의 이익에 욕심부터 부린다.
사람 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니까.
그래서 귀족이라는 족속들은 입으로라도 함부로 약속을 내뱉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아시다시피 폐하와 국왕 파인 저는 한 몸입니다. 그리고, 자원이 풍부한 건 테라도 마찬가지지요. 대륙 중부는 옛날부터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으니까요. 금광, 마나석 동굴, 철광산 등등… 가장 큰 도움을 주시는 분께 이에 대한 독점적인 사업권 또한 드리겠습니다.”
“오오…!”
“이제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인버스 공작은 승부수를 띄웠다.
전쟁통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정치 싸움이나 해대는 이들은, 이 제안을 절대로 거부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르릉.
“……!”
하지만, 결론적으로 인버스 공작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 어느 샌가 소리 소문 없이 그의 뒤에 자리해 있었으니까.
꿀꺽.
일순, 인버스 공작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
이 차가운 느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무, 무슨…?”
“계속 말씀해 보시지요, 공작 각하.”
인버스 공작이 고개만 돌렸다.
그곳에 웬 흑발의 미녀가 차갑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그렇지 못한 살기(殺氣).
그가 참지 못하고 ‘딱, 딱’ 이를 부딪쳤다.
“전장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이 자리에서 베어버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