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연합군 총사령관(2)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나는 대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내가 방문을 나서는 즉시…
“…루나?”
뒤를 조용히 따라붙는 한 여인이 있었다.
새벽부터 무언가를 열심히 하였는지 젖은 머릿결이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루나였다.
“혹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건 아니지?”
“물론. 마침 나도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훈련?”
루나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장난기가 들었다.
“근데, 루나는 이제 내 기사지?”
“……?”
“나이와는 별개로, 나는 루나의 주군이다, 이 말이지.”
“…….”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는지, 그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줄곧 생각만 했던 건데. 나한테 말투가 너무 딱딱한 거 아니야?”
“…불편하다면 시정하겠다.”
“또, 또. 지금도.”
“시정하겠습니다, 주군.”
“아니, 존댓말을 쓰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모시겠습니다.”
직후, 루나가 한쪽 주먹을 가슴에 가져다 댄 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주군에게 표하는 전형적인 기사의 예였다.
장난 한번 치려다, 괜히 관계만 더 불편해지게 생겼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해주라, 제발.”
내 애원에 그제야 루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데, 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다.
이거 설마…
“가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루나가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당했다.
저만한 포커페이스로 어찌 이런 능청을…….
“그보다 세타.”
“엉?”
“본의 아니게 어전에서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그랬어?”
“물론 네가 제국의 황자이든 천민이든, 내 행동은 조금도 변함이 없을 거다. 다만…….”
힐끗, 고개만 돌린 루나가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외적으로, 앞으로는 꽤나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그거야 뭐, 이미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니까.”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말이다.”
“…….”
절로 내 입이 다물어졌다.
어느새 우리 둘은 회의실의 웅장한 출입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마 저 너머에서 테라와 연합군의 고위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마음의 준비는 됐나?”
“뭘 또 마음의 준비까지야.”
“그럼…….”
루나가 망설임 없이 문고리로 손을 가져갔다.
끼이이이익.
전쟁 통에 관리되지 않은 경첩 소리가 유독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내 드러나는 내부의 광경.
“…….”
무수한 시선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거기에는 명백한 호의도 있었고, 확고한 적의도 존재했다.
다른 무엇보다…
스르릉.
순간, 루나가 슬며시 검을 뽑아갔다.
일각에서 느껴지는 살기(殺氣).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그것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는 것인즉.
“방금 얘기했던 우려할 만한 상황이 바로 이런 거겠지?”
“…….”
루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전방으로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호구(虎口).
문자 그대로, 지금 우리는 범의 아가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리비아 왕국의 수도가 한눈에 보이는 높다란 언덕.
“황자 전하.”
그곳에서 금발의 기사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수려한 외모를 지닌 그는 외견상 고작해야 30대 초반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이미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이었다.
“라포르테 공작?”
제국의 1황자, 페일 폰 트쉬베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
대륙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초강자.
허나, 그런 위명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또 다른 별명,
골든 뱃(Golden Bat).
“혹,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얘기요?”
“출처는 황궁 쪽입니다만… 2황자 전하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스노비가 말입니까?”
그제야 페일이 흥미를 보였다.
무료한 표정으로 리비아 왕국을 굽어보던 그가, 그 즉시 고개를 돌렸으니까.
“또 무슨 꿍꿍이라도 꾸미는 건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하면?”
“정말로 믿기 힘든 정보입니다만… 행방뿐만이 아니라, 생사조차 불분명하다는 전언도 함께였습니다.”
“……!”
찰나, 페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 정보 자체가 모두 녀석의 꿍꿍이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디 보통 놈이어야 말이지. 내 동생이지만, 속에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는 들어앉아 있는 녀석이 아닙니까?”
“…….”
“무려 20년 동안이나 등 뒤에 칼을 숨겨온 놈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모두 속여왔지요. 그런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생사가 불분명하다?”
말을 잇는 페일의 얼굴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그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페일이 막 10살이 되었을 무렵.
그날은 궁의 빡빡한 일정으로 유독 피곤했던 하루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교육이 끝나는 밤 9시가 되자 곧장 침대로 몸을 던졌던 그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직 동도 트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소변만 아니었다면, 한참 뒤에야 눈을 떴겠지.
물론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두 눈을 꿈뻑이자, 웬 섬뜩한 무언가가 시야를 스쳤다.
너무나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는…
“너, 너…!”
하나뿐인 제 동생이,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고작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제 손보다 더 큰 과도를 꼬나 쥐고.
페일이 호통을 지르는 즉시,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달려왔으나…
결론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악몽을 꾸신 거라고.
고작 다섯 살에 불과한 황자 전하께서 어찌 그러시겠느냐고.
유일한 증거였던 과도도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날의 기억은 현재까지도 페일에게 짙은 트라우마로 자리해 있었다.
“그놈이… 그리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지. 절대로.”
이윽고 회상을 떨쳐 낸 페일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그 부분은 경이 확실하게 알아봐 주세요.”
“명 받들겠습니다.”
“그보다, 연합군 쪽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직까지 특별히 신경 쓸 만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큭… 동맹국이 이리 다 무너져 가는데도 말이지요?”
순간, 페일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이따위 자국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합지졸들은 굳이 폐하가 직접 나서시지 않더라도 쳐부술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연합군보다는, 예의 블레어 마탑주를 꺾었다는 ‘그’ 아이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야 할 듯합니다.”
“아하. 새로운 신성(新星)이라는, 그 세타 쿤 이그니스 말이지요?”
“예. 소문에 이미 8써클의 경지에 오른 역사상 유래 없는 괴물이라고 하니까요.”
“큭… 그래 봤자 세력이라고는 쥐똥도 없는, 태생 자체가 비루한 놈인 것을.”
“…실례를 무릅쓰고 조언을 드리자면, 방심은 금물입니다.”
“나도 압니다. 이미 블레어 마탑주라는 선례가 있으니까요. 다만, 집고 넘어갈 건 확실하게 집고 넘어가자는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순간 페일이 등 뒤를 돌아봤다.
언덕 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제국의 깃발과 인(人)의 파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증원된 군사들을 합쳐 무려 50만 대군.
“전쟁에서 머릿수의 우위는 절대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겠지요. 거기에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삼성(三星)에 빛나는 라포르테 공작까지 함께하고 있으니…….”
페일이 한층 짙어진 미소로 마지막 말을 마친다.
“세타 쿤 이그니스가 아니라, 그 할애비가 와도 무엇이 두려울까?”
***
레이브 성의 대회의실.
지금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여러분의 걱정과는 달리, 이그니스 백작이 제국의 황자라는 사실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실비아의 목소리였고,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면 무엇이 중요한 문제지? 혹시 또 모르지 않나. 사실은 이그니스 백작… 아니지. 대 제국의 황자 전하께서 직접 연합군의 간자를 자처하신 결과가 이것일지.”
“듣자 하니 오래전에 궁에서 쫓겨난 황자 전하시라지요? 하면, 이런 스토리도 떠올려 볼 수 있겠군요. 큰 공을 세워오면, 다시 원래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던가…….”
“그도 그렇지만, 애당초 우리의 주적이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제국입니다. 이 비극을 불러일으킨 황제는 물론이고, 그 핏줄들 또한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할 악(惡)이라는 뜻이지요.”
이쪽은 연합군 인사들의 발언이었다.
허나, 정작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이는 따로 있었다.
단언컨대, 이 모든 일을 주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내.
“…인버스 공작.”
그는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저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문 채,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제는 네가 어쩌겠느냐는 듯이.
“…….”
분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설마하니 이리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까.
평소의 방식대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이다.
내가 황제와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상.
저들은,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저항하려 들 테니까.
이래서 미리 신뢰를 쌓아두려고 했던 건데…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후, 나는 힐끗 한쪽을 돌아봤다.
- 그리 좋아하지 마세요. 뜻대로는 되지 않을 테니까.
“……!”
내 메시지 마법에, 인버스 공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다시금 다짐했다.
친우와의 우정이니, 의리니 하는 것들은 잠시 접어두고.
이번 일만 끝나면, 철저하게 인버스 가문을 무너뜨리기로.
“그만들 하시지요.”
잠시 후, 나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중얼거렸다.
허나, 무게를 잡아봤자 씨알도 안 먹혔다.
양쪽으로 갈린 두 세력은 이제 핏대까지 세우며 목청을 높이고 있었으니까.
두 스승님과 다른 마탑주들을 필두로 한 내 편은 좌측으로.
그리고 연합군과 테라의 고위급 인사들은 우측으로.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분위기는 점차 가열되고 있었다.
“그만!!!”
하여, 이번에는 마나까지 동원해 고함쳤다.
“……!”
대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된다.
곧 비틀린 미소를 입가에 매단 내가 말을 잇는다.
“이렇게 하시지요. 다들 얘기는 들으셨겠지만, 지금 리비아의 상황이 무척이나 위험합니다.”
“…….”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저들도 동감하는 얘기일 테니까.
특히, 리비아의 인사들은 자못 초조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연합군 분들도 계속 모르는 척하실 요량은 아니시겠지요? 다음은 또 어느 나라가 될지 모릅니다.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겠지. 큰 전쟁을 앞두고, 등 뒤가 이리 불안해서야 되겠는가?”
이번에도 인버스 공작의 태클이었다.
그는 내 속을 뒤집기로 작정을 한 듯, 능글능글 눈웃음까지 치고 있었다.
허나…
“제국 제1군을 이끄는 것은 대외적으로 차기 황제로 유력한 1황자, 페일 폰 트쉬베르였지요?”
나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내 할 말만 이어갔다.
그리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격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제 손으로 그의 목을 베겠습니다.”
“뭐, 뭣…!?”
“설마하니, 제 배다른 형의 목까지 무참히 베어버리는 후레자식을, 황제가 인정해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한 점의 의혹은 더 큰 신뢰로 뒤덮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겠다는데, 그 누가 이 이상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