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연합군 총사령관(1)
레이브 성의 전(前) 영주 집무실.
허나, 지금은 국왕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의 임시 거처로 쓰이는 곳.
“폐하. 부르셨사옵니까?”
한바탕 폭풍우가 스쳐 지나간 뒤.
그곳을 방문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외형은 일견 쥐를 연상케 하는 사내이나.
적어도 테라 내에서는, 국왕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3대 공작가의 수장.
“왔소? 갑작스레 이리 호출하여 미안하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을. 언제든지 불러주시지요. 저야 이그니스 백작이 밤낮으로 노력해 주는 덕분에, 지금은 무척이나 한가하답니다.”
“그런가?”
이어지는 인버스 공작의 말에 우르고스 국왕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거론해 준 덕분에 구태여 돌려 얘기할 필요도 없어졌으니까.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공작을 불렀소.”
“예?”
“방금 말한 이그니스 백작 말이요.”
“그게 무슨…?”
“내가 지금 막, 대륙 전체가 뒤집힐 만한 얘기를 들었거든.”
“……?”
직후 우르고스 국왕은 아주 천천히, 아까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나갔다.
먼저 온 손님의 목적은 물론이고,
그가 실은 무려 제국의 황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당연하게도, 그 모든 얘기를 다 들었을 때 인버스 공작의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저, 정말이십니까?”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소.”
“허, 설마 그럴 수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그 아이가 황족이라니…….”
말은 그리하면서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인버스 공작의 얼굴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물론, 화자가 국왕이었기에 표정은 금세 수습되었다.
그런 사소한 반응조차 왕족에 대한 불경죄로 취급되었기에.
왕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게 설령 거짓일지라도.
정치에 닳고 닳은 인버스 공작이 이만한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만약 말씀이 사실이라면… 실로 예상치 못한 수확이로군요.”
“공작도 그리 생각하시오?”
“예. 그도 그럴 것이…….”
찰나, 말끝을 흐리던 인버스 공작이 주변을 둘러봤다.
“괜찮소. 이들은 모두 확실한 내 사람들이니.”
“…하면,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이그니스 백작의 위상이 너무나 높아졌습니다. 자국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물론이고, 연합군 내에서의 영향력까지도요.”
“그거야 나도 귀가 있으니 잘 알고 있지. 국왕으로서 참 좋으면서도 기분이 묘하오. 이대로라면, 전쟁이 끝나더라도 왕권은 상당 부분 약해질 수밖에 없음이니.”
“그렇지요. 나이는 어리지만, 그 아이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잘생기고 능력도 좋고, 그야말로 영웅으로서의 풍모를 모두 갖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
테레이라 국왕이 비틀린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기실, 그는 무척이나 질투와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으니까.
“이거 원, 3대 공작가가 아니라, 이그니스 백작 독주 체제의 테라가 되겠군.”
“그런 일이 일어나서야 안 되겠지요. 왕국에 태양은 하나로 족하니까요. 폐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시기 때문에 저를 호출하신 것 아니십니까?”
“훗. 역시 공작은 눈치가 빨라서 좋소.”
“과찬이십니다.”
“다만 아까도 말했지만, 이 부분은 전혀 예정에 없던 뜻밖의 수확이오. 애당초 우리의 계획은 조금도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나중에 잘 이용해 먹도록 하지요. 아직은 그 아이의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니까요.”
“정말로 재미있군. 카이클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한 말이, 실은 제국의 잊혀진 황자라…….”
일순, 말끝을 흐리는 테레이라 국왕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알아서 잘 견제해 줄 테지.”
***
1층 로비.
어느새 그곳까지 강제로 끌려 온 유리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이제 손 좀 놔봐. 숨, 숨 좀 쉬자!”
“남의 대화를 엿듣다니, 너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너도 거부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우리가 대체 왜 도망쳐야 하는 건데?”
“그건…….”
이번만큼은 루나도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직후, 손목에서 느껴지는 느슨한 악력에 유리나가 잽싸게 팔을 빼냈다.
“아오, 진짜 아파 죽겠네.”
연신 제 손목을 문지르던 유리나가 홱, 정면을 노려봤다.
“보여? 멍들었잖아!”
“…그러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실비아가 세타에게 꼬리를 친다느니…….”
“네가 몰라서 그래. 걔가 얼마나 영악한 앤데? 무려 제국의 황자라고. 정체를 알자마자 ‘단둘이서’ ‘한 방’에 들어간다니. 그림이 뻔히 그려지지 않아?”
“아니. 역시 너는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이씨. 누굴 실없는 망상가로 아냐!?”
순간, 유리나가 ‘쿵!’ 하고 발로 바닥을 찍었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현재 자신의 감정을 잘 알지는 못했다.
이건, ‘질투’의 또 다른 표출임을.
다만, 그건 비단 그녀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근데 넌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냐?”
잠시 후, 유리나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무슨…….”
“내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거던? 지금 묘하게 안심하고 있잖아. 가만, 혹시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다 엿들은 것 아니야?”
“……!”
정답이었다.
이미 언급되었듯, 루나의 감각은 일반인을 까마득히 초월했으니까.
“뭐야, 진짜야? 이런 앙큼한 계집애를 봤나!”
“계, 계집애?”
“됐고, 걔들이 뭐라고 하던데? 나도 좀 알려주라!”
“…안 된다.”
“왜!”
“그런 건 진짜 예의가 아니니까. 남의 대화를 함부로 흘리는 취미 따위는 없다.”
“하? 그런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듣지를 말았어야지!”
“…먼저 가지.”
루나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비단 유리나의 추궁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못 들었다면 모를까.
정보를 접한 이상, 그녀도 발 빠르게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으니까.
“어디 가려고?”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
“내 예상이 정확하다면… 세타가 황자라는 소문이 연합군 내에 퍼지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니까.”
“뭐? 그건 또 무슨 뜻인데?”
유리나의 반문에, 루나의 표정이 한없이 굳어졌다.
“…그 편이 테라의 고위층들에게도 더 큰 이득이 되지 않겠나?”
“……!”
제아무리 둔한 유리나라도 이 정도 눈치쯤은 있었다.
기득권층의 정치 싸움.
그게 얼마나 더러운지는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경험해 왔으니까.
“국왕 전하가… 세타를 이용할 거라는 뜻이야?”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나 상대가 현 국왕 전하라면 더더욱…….”
직후, 유리나의 미간도 한껏 좁혀졌다.
“그럼 어쩌려고?”
“아까도 말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뭐?”
“내 개인적인 생각을 묻는 거라면… 대답은 하나다.”
일순, 루나가 차갑게 눈을 빛냈다.
그 서슬 퍼런 기세는 과연 마스터라 불리울 만했다.
유리나조차 순간적으로 움찔 몸을 떨 정도였으니까.
다만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비하면, 지금 그녀의 놀라움은 새 발의 피였다.
“만에 하나 세타에게 위해가 된다면, 국왕도 벤다.”
“뭐, 뭣…!?”
***
실비아가 떠나간 방.
“…….”
그 고요한 공간에서,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 것인 듯, 본래는 내 것이 아닌.
그런 기억들이 지금도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 세타, 꼭 살아야 한다. 엄마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기억의 형태는, 아기를 안아 들고 슬피 미소 짓는 한 여인이었다.
에메랄드빛 머리칼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누가 봐도 내 생모임이 분명한 그녀.
‘…잠깐만.’
순간, 내 몸이 움찔 떨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래에는 오스스, 팔뚝에 소름마저 돋아난다.
줄곧 신경을 건드리는 기묘한 이질감.
그게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시점이 뒤죽박죽이지?”
처음만 해도 철저한 제3자의 시점이었다.
한데, 중간 즈음부터는 예의 이리스라는 사내의 시야로 뒤바뀌더니.
이제는 내 모친이 바라보는 세상이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왜일까?
지금의 내 기억은 분명 오만의 것인데.
“…아니겠지?”
순식간에 불길한 상상이 온몸을 잠식한다.
지금의 나처럼, 칠악과 기억을 공유하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감히 인간의 육신으로 악의 근원을 잡아먹었거나.
혹은, 악의 근원에게 육신을 잡아먹혔거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만은 이미 내게 완전히 흡수되었으니까.
그 증거로…
우드득. 우드드드드득.
일순, 뼈가 뒤틀리는 섬뜩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내 육신의 변화로 인한 소음이었다.
오만의 첫 번째 권능.
신체의 악마화.
“…….”
나는 가만히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검게 물들고, 흉측한 손톱마저 돋아난 우수(右手)가 그곳에 있었다.
그 상태로 가볍게 손을 떨치자,
파스스스!
접촉조차 하지 않은 테이블이 통째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마기의 이격.
문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을 멸하는 힘.
“…이 개 같은…….”
순간,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신체의 일부가 악마화하자 인성마저 변하는 느낌이었다.
하여, 황급히 날뛰는 마기를 가라앉히던 그때,
우웅! 우우우웅!
“…….”
낮은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한쪽 구석에 던져 놓은 통신용 수정구였다.
곧바로 그쪽으로 뻗어가던 내 손이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절대적인만큼, 제어 또한 쉽지 않다는 건가?”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목 아래로는 웬 우둘투둘한 검은 핏줄마저 돋아난 상태였다.
알맹이는 드래곤이며.
이제는 마왕의 힘마저 3가지나 흡수한 지금.
이런 나를,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드득!
“후우우…….”
가벼운 심호흡과 동시에, 악마화한 우수가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즉시, 나는 통신용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잠시 후,
- …어머? 이제야 받으셨군요! 지금 막 끊으려던 참이었는데…….
“레베카?”
수정구 위로, 내 가장 큰 물주 중 하나인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 오랜만에 뵈어요. 어지간하면 연락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조금 급박해져서…….
“무슨 일인데?”
- 핵심만 빠르게 말씀드릴게요. 1황자가 이끄는 제국 제1군에게 리비아의 북부를 점령당했어요. 이대로라면 수도도 위험하구요.
“벌써? 내 생각보다 움직임이 훨씬 빠른데… 그보다, 연합군은 미리 대비를 안 하고 있었던 건가?”
- 대비야 했죠. 이번 전투로 확실해졌어요. 연합군은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에요. 제1선이 무너지자, 저희 리비아를 제외한 군 전체가 전선을 물렸으니까요.
“그것도 이상한데. 사령관의 명령도 없이 말이야?”
- …안타깝게도 그 사령관이 교전 중 전사하셨거든요. 제국이 자랑하는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에게요.
움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에 내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라포르테라면 분명…
“…지금 바로 연합군을 이끌고 갈게. 이곳에서 리비아의 북부는, 1주일이면 충분하니까. 그때까지만 버티고 있어.”
- 1주 정도는 가능할 것도 같은데… 정말로 괜찮겠어요? 이미 만나봐서 아시겠지만, 아마 그쪽의 연합군 귀에도 패전 소식이 들어갔을 거예요.
“이들은 그리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리비아 다음은 자신들이라는 건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단지, 선두의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 …하면, 또 직접 전면에 나서시려는 건가요?
레베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허나, 나는 부정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명색이 총사령관인데, 매번 나만 개고생할 수는 없지.”
- 그 말씀은…?
“뭐,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봐. 말 안 들으면, 두드려 패서라도 싸우게 만들 테니까.”
직후, 내 입가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때마침 좋은 방안이 생각났으니까.
- …….
그런 나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만 보던 레베카는,
- …그거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말인데요? 연합군 총사령관님.
이내 나를 향해 마주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