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황족(2)
저벅, 저벅, 저벅.
성 내부는 고요했다.
그곳에서, 오직 루나의 발걸음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눈앞에서 쫓던 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가까이 붙으면 대번에 발각될 테니까.
“국왕 전하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
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루나의 감각이, 일반인의 범주를 까마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문득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의 호수에서 마주쳤던 괴물의 실체는, 무려 스노비 2황자라고 했다.
한데, 마침내 그 괴물을 쓰러뜨리고도 세타는 호수 안으로 몸을 던졌고.
종래에는 그곳이 아닌 허공의 새까만 아가리에서 빠져나왔다.
사라진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표정은 한없이 굳어진 채로.
짐작컨대, 분명 호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겠지.
“…대체 2황자와 무슨 대화를 나눈 거지?”
생각해 보자.
황자와 국왕 사이의 상관관계.
거기에 집중하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만에 하나, 정말로 혹시나지만.
누가 봐도 추켜 세울 만한 어마어마한 공적을 세웠으니 상을 달라.
가령 ‘공주’라던가…
…이런 청을 하려는 건 아닐까?
밑바닥에서 정점까지.
아무런 뒷배가 없는 어중이 귀족이, 공주와의 혼약으로 차기 왕좌(王座)를 노린다.
수컷이 지닌 본연의 욕심과 야망.
기실, 이건 역사에도 으레 남아 있는 흔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런 속물은 아니니까.”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애써 지워냈다.
물론 그럼에도 마음은 여전히 심란했지만.
“루나!”
“……!”
순간, 루나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올랐다.
지금 막 성 출입구에서 주홍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유리나가 후다닥 뛰어오고 있었다.
“세타와 실비아는?”
“…그걸 왜 나한테…….”
“시치미 떼지 마. 그 둘을 쫓고 있었잖아.”
“…….”
루나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의문을 가득 담아 상대를 바라봤다.
마치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는 듯이.
“나도 마찬가지니까.”
“…어?”
“나도 그 둘이 신경 쓰인다고. 혹시 또 모르잖아?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무슨 사고라도 칠지 말이야.”
“사고…?”
“명색이 총사령관으로 오른 기쁜 날이잖아. 그 분위기에 심취해서 남녀 둘이 불이라도 붙어 봐. 그것도 보스와 부하가 말이야. 뒷일은 뻔하지.”
“그게 무슨…….”
무어라 말하려던 루나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어전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적어도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걸 모르는 유리나는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그 착각이 이런 종류의 것인지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도 이런 모습이었겠지?’
순간적으로 머쓱한 표정을 지은 루나가 이내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고. 남녀가 유별한데, 친구로서 방관해서야 되겠어?”
“잠깐…….”
그대로 루나를 쌩하니 지나친 유리나가 곧장 앞장서 갔다.
“…….”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나도 곧 그녀를 뒤따라 움직였다.
오해야 가서 풀면 되니까.
…다만, 평정심은 결국 그녀가 3층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이리스 쿤 이그니스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습니까?”
“……!”
두 여인에게도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복도 끝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몇몇 인영들이 시야로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기사들은 꾸벅,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딱히 비밀스러운 방문은 아니라는 건데…
“…뭐야, 폐하를 알현하려는 거였어?”
이윽고 루나와 같은 표정이 된 유리나가 코밑을 훔쳤다.
한차례 한숨을 내쉰 루나가 말한다.
“당연한 거다.”
“뭐가 당연한데?”
“둘이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않나?”
“…….”
순간, 유리나의 얼굴 위로 장난기가 떠올랐다.
“그 ‘그런’ 일이라는 건 또 뭔데?”
“…….”
루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반응할 가치도 없는 짓궂은 장난이었으며.
그보다는, 어전의 대화가 더 신경 쓰였으니까.
듣는 귀가 많았음에도 방 내부의 당사자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자못 심각한 분위기 속,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어느 순간부터 유리나마저 입을 다물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여인이 들려오는 대화에 청각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이 기막힌 이야기가 종점에 달했을 때는…
“제가 바로 그의 친아들이란 말입니다.”
“히끅!”
유리나는 참지 못하고 딸꾹질까지 해대고 말았다.
“그, 그러니까 방금 쟤가 황자라고…?”
유리나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건 루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하여, 그녀는 또 하나의 묘한 감정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면 나는… 결국 돌고 돌아 제국의 기사가 되는 건가?”
순간, 루나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국의 기사라면, 수년 전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때에는 제안자가 무려 황제였지만…
“이, 이제 어쩌지?”
“……?”
“뭘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어? 만에 하나 쟤가 제국의 황자라는 사실이 연합군의 귀에라도 들어가 봐. 당장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냐?”
“…….”
그 말대로였다.
이후의 상황이야 불을 뻔했다.
무려 적대국의 황족이니까.
연합군은 그런 이를 총사령관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뛸 테고.
아예 인질로 삼자고 고함치는 이들도 더러 생길 테지.
그러니까, 루나는 그런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얼굴만 봐도 알겠네. 이게 그리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니까? 당장 너부터 문제라고.”
“……?”
“너는 세타의 기사잖냐. 당연히 그 불똥이 너한테도 튀겠지.”
“…….”
“방법은 있어. 일단 네가 세타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는 사실은 숨기자. 어차피 최근에 국내로 유입된 연합군들은 잘 모를 테니, 적당히 내부 입단속만 잘하면…….”
“상관없다.”
“응?”
“만약 그걸로 세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내가 직접 베어버릴 생각이니까.”
이어지는 루나의 대답에, 유리나가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앞뒤 꽉 막힌 아가씨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소나기도 피해 가는 법이라고 했어. 일단 적당히 시간을 끌면서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지!”
“딱히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아니, 그럼 론지에 가문은 어쩔 건데? 너는 그곳의 가주 대리이기도 하잖아. 비단 너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에도 피해가 갈 거라고.”
그럼에도 루나의 동공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가문이든, 가족이든. 기사에게 그 어떤 것도 모시는 주군보다 앞서 있을 수는 없다.”
***
같은 시각.
“보고하세요.”
리비아의 공작 영애이자, 대륙 5대 상단인 골든 버드의 대행수 레베카는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부 지역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면… 제르커 공작님은요?”
“…전투 중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보고에 레베카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리비아의 철벽, 제르커 공작.
무려 왕국 전체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마스터가 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제국 제1군.
1황자가 이끄는 30만 대군이 국토를 침범한 지,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진 참사였다.
“이대로라면… 우리도 자이툰처럼 되겠군요.”
“이번 전투로 확실해졌습니다. 연합군은 오합지졸입니다.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이런 분위기로는… 절대로 제국군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의 부재(不在)겠지요?”
“…분하지만, 그렇습니다.”
“수도까지 저희에게 남은 시간은요?”
“길게 잡아도 이주일.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
레베카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한참이나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는, 이윽고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한 사람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느낌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밖에 없었다.
“당장 테라 쪽에 연락해 봐야겠어요.”
***
왕을 알현한 이후.
나는 정원으로 향하지 않고 곧장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은 좀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자, 잠깐만 기다려.”
닫혀 가던 문틈으로, ‘덥썩!’ 새하얀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윽.”
“실비아?”
결국 살이 집혔는지, 살포시 미간을 찌푸린 실비아가 곧 방 안으로 들어왔다.
쿵!
잠시 후, 출입문은 소음을 내며 완전히 닫혔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네가 정말로 황자야?”
그녀는 곧바로 잽이 아닌 훅으로 치고 들어왔다.
“아마도?”
“확실하게 대답해 줘야 해. 당장 어전에 있던 기사들만 스무 명은 됐어. 정원으로 나가는 즉시 연합군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아마 그럴 일은 없을걸?”
“뭐?”
“아쉬운 건 그쪽이니까.”
“…….”
내 자신만만한 태도에 실비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이미 마탑과 자유연합을 등에 업은 나야. 고급 전력은 태반이 내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설령 내가 황자라도, 그분들이 나를 내치시려 할까?”
“…혹여 일이 잘 풀리더라도, 이전과는 분명히 다를 거야. 명분을 줬으니까. 하는 결정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지도 몰라. 아니,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지. 종래에는 결국, 사령관의 지위를 박탈하려 들지도 모르고.”
“그까짓 귀찮은 자리, 원한다면 가지고 가라지.”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아. 실력으로 모조리 찍어 누르면 그만이니까. 반발하는 이들은 모조리 꺾는다. 이게 내 방식이잖아?”
“……!”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해 보니, 하는 모양새가 제국의 황제 그 자체인데? 나 나름 그쪽으로 재능 있어 보이지 않냐?”
“하? 지금 폭군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그건 아니고. 수틀리면 황제의 목이라도 따와서 증명해 보이지, 뭐. 설마 그렇게까지 하는데, 또 황자라고 이러니저러니 하겠어?”
이어지는 내 말에 실비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종래에는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녀였다.
“…네가 어련하시려고.”
“근데, 다른 사람들도 데리고 왔냐?”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그것도 두 개씩이나.”
“……?”
정말로 모르는 일인지 실비아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즉시, 두 개의 인기척이 후다닥 멀어졌다.
분명 내게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짐작이 맞다면…
‘맞다니까? 저거 분명 황자님한테 꼬리치는 거라고.’
‘그러니까, 네 착각이라고 했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서 그따위 질 떨어지는 농이라니.’
‘농이 아니라 현실이라니까? 진짜 답답하네. 모든 소설은 실제 상황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청각을 확장하자, 정체를 짐작케 만드는 목소리가 귓속에 쏙쏙 틀어박혔으니까.
“너네 둘, 문밖에서 뭐 하냐!?”
하여, 나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쿵!
“……?”
허나, 무언가 부딪히는 소음과 함께, 곧 빠르게 사라지는 두 인기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