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210화 (211/251)

210화. 황족(1)

레이브 성의 널따란 정원.

대략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면면은 가히 대륙 최상위 거물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빛의 마녀 세논 벤자민.

8월의 검사 에이스 디 파르마.

전(前) 전투, 초월, 파괴, 치유, 환상의 다섯 마탑주는 물론이고.

엑스톤 폴 다우니스를 포함한 각국의 여섯 마스터까지.

마지막으로…

“…….”

곧 내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얼마간 떨어져 있었으나, 녀석에 대한 소문은 내 귀에도 들려왔다.

나조차 진정한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던 놈.

그 속내조차 짐작 가지 않는 아카데미 동기.

“제노스 델 카이클.”

“……?”

내 부름에, 녀석이 고개를 돌린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같은 남자가 봐도 상당히 잘생겼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생이 많았다며?”

“…….”

제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두 투명한 눈을 들어 내 쪽을 돌아볼 뿐.

머쓱해진 내가 다시금 물었다.

“…나랑 얘기하기 싫냐?”

“아니.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참고로 이건 향후 전략을 짜는 데 매우,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될 테니, 정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일단 들어는 보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너, 7써클에 오른 거냐?”

물론 듣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얘기도 이미 들었으니까.

허나, 녀석의 입으로 직접 확인받고 싶었다.

만약 내 물음에 긍정한다면…

내면의 의심은 조금 더 확신에 가까워질 테니까.

잠시 후, 제노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높은 사람이 되면 다 똑같아진다더니, 자리를 빌려 내 밑천까지 털어먹으시겠다?”

“크흠. 뭘 또 말을 그렇게까지야…….”

“네 말대로, 나는 7써클에 올랐다.”

“……!”

“네가 하면 나도 한다. 이제 잘 알겠지?”

“…솔직히 말해 봐. 너 라그하일 맞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확실했다.

이 녀석은 분명히 나와 같은 ‘소울 이스케이프’를 시전한 일족.

그것도, 나보다 앞서 그 미친 짓을 벌인 최초의 드래곤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실력은 절대로 설명이 불가능했으니까.

“그런 것보다, 총사령관이 이리 여유 부려도 되나?”

“뭐가?”

“고급 인력이야 이만하면 엇비슷해졌다지만, 연합군과 테라를 다 합쳐도 전체 병력은 20만이 채 되지 않아. 그에 비해 제국은 ‘백만 대군’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지.”

확실히 이 부분은 큰 문제였다.

쪽수에는 장사 없는 법이니까.

머릿수만 최소 다섯 배 차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물며 기사단의 수준도 제국은 대륙 최강이다. 아마 이쪽의 기사단쯤은… 짐작컨대, 10개 사단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한 개 사단을 이겨내지 못할 듯싶다만…….”

“야, 야. 잠깐만 멈춰 봐.”

아무리 팩트라지만, 말에 거침이 없었다.

목소리라도 낮추지 않으면 큰 사달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거, 듣자듣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지 않나!?”

“……!”

어째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적중하는지.

직후, 한 사내가 콧김을 뿜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안 듣는 척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양이다.

반쯤 머리가 벗겨진 저 사내는 분명 리비아의 에인세 후작이었던가.

다른 이들에 비해 그는 가장 뒤늦게 테라에 도착했다.

같은 나라 출신인 몽클레어 후작과는 둘도 없는 친우였기에, 소식을 접하고 곧장 합류한 것이다.

“세타 쿤 이그니스야… 흠흠, 실례. 통합 마탑주야 얘기는 들었으니 그렇다 쳐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어딜 함부로 지껄이느냐!? 네놈이 뭘 안다고?”

“…….”

어딜 가나 꼭 있다.

꼭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의 인간들이.

더군다나, 그게 한가닥 하는 ‘마스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우우웅! 휘리릭!

“불만이면 한번 붙어보던지.”

다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마력 창 하나를 생성해 낸 제노스가 도발적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덤벼보라고. 상대해 줄 테니까.”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예상대로의 흐름인가.

뭐, 이게 꼭 그리 부정적인 상황만은 아니었다.

향후 있을 전쟁에서 지휘 계통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내부 서열은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막말로, 나 혼자 이들을 다 제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네 친구, 싸우려나 본데?”

직후, 세논 스승님이 장난스레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냅두죠, 뭐. 지가 나서서 대신 군기를 잡아주겠다는데.”

“아무리 배틀 메이지라도 상대는 마스터야. 괜찮겠냐?”

대답은 내가 아닌 곁의 에이스 스승님이 대신하셨다.

“괜찮을걸? 쟤, 마탑주 둘을 혼자서 찜 쪄 먹은 놈이거든.”

“엥? 그게 뭔 소리냐?”

“아, 내가 얘기하는 걸 깜빡했네. 빙결의 마탑주와 뇌전의 마탑주였나? 그 둘을 저놈 혼자서 잡았어. 지하 감옥에 구금시켜 뒀으니, 시간 날 때 한번 구경 가봐.”

“뭐, 뭐라고? 그걸 왜 이제 말하냐!?”

순간, 세논 스승님이 버럭 고성을 내질렀다.

화들짝 놀란 에이스 스승님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화, 화를 낼 것까지는…….”

“내가 마탑주들과 어떤 악연이 있는지 잘 알면서 그딴 소리가 나와?”

“…미안. 상황이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서 깜빡했어.”

바로 그때,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제노스와 에인세 후작이 한편의 연무장으로 올랐다.

결국 끝까지 해보겠다는 거겠지.

대번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와아아!’ 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일단 저쪽은 잠시 신경 꺼두고,

“실비아.”

나는 구석에서 정신없이 부대를 편성하는 그녀를 돌아봤다.

정원에 마련된 기다란 테이블.

그곳에서 실비아는 여전히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실비아!”

하여,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나 불렀어?”

“뭘 그리 집중하고 있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인원을 구성해야 하니까. 그리고, 애당초 이건 네 일이거든?”

“…크흠.”

사실이었다.

귀찮은 일을 실비아에게 떠넘긴 것도 나였으니까.

잠시 이쪽을 노려보던 그녀가 다시금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다들 도끼눈 뜨고 지켜보는 거 보이지? 선봉부터 후군까지. 온종일 고민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으니까, 얘기할 거 있으면 나중에 해.”

“그럼, 국왕 전하에게 연통만 좀 넣어주라. 불쑥 찾아가기도 뭣하고, 원래 그쪽은 네 일이잖아? 일일 보고는 네가 도맡아왔으니까.”

멈칫.

이어지는 내 말에 실비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국왕 전하? 갑자기 왜?”

곧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사뭇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냥,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이 좀 있어서.”

***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대연무장.

쾅! 콰아아아앙!

그곳에서 연이어 폭음이 울려 퍼진다.

두 사내의 전투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정확히는, 한 젊은이와 중년 사내의 싸움.

겉모습만 보면 후자가 전자에게 가르침이라도 내리는 모양새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압도하는 쪽은, 오히려 젊은 사내 쪽이었으니까.

“와, 제노스 저놈은 이제 완전히 규격 외의 괴물이 되었잖아?”

어느새 그곳 코앞까지 다가선 유리나가 연방 감탄을 터뜨렸다.

마스터와 일대일 대결에서.

더욱이 근접전으로 우위를 점하는 마법사.

이 정도라면, 전투의 마탑주 자리도 당장 저 녀석이 꿰차도 이상하지 않을 듯싶었다.

“솔직히 직접 보기 전까진 두 마탑주를 무릎 꿇렸다는 것도 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광경을 보자, 문득 때 아닌 호기심이 들었다.

그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아카데미 역사상 다시없을 역대급 두 천재.

과연 세타와 제노스가 전심전력으로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물론 이제는 아군이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지만…

“…진짜 궁금하다는 말이지.”

그때, 유리나의 시야에 한 장면이 잡혔다.

둘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나머지 하나를 찾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녀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주변의 상황과 관계없다는 듯, 실비아와 세타가 연방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었으니까.

“…저 둘은 언제 저렇게 친해지셨대?”

유리나의 입이 불만스레 툭 튀어나왔다.

한데, 그 둘은 거기에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곧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둘은 비어 있는 성 내부로 발길을 옮겨갔으니까.

이미 제노스와 에인세 후작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둘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쟤들 뭐야?”

그 순간, 유리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언젠가 봤던 소설의 내용이 번개처럼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려한 연회.

춤과 음악이 가득한 파티.

그리고, 그 사이에서 파트너와 눈이 맞는 한 쌍의 남녀.

감미로운 선율 속 춤사위를 마치고, 마침내 2층의 밀실로 향하는 둘…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유리나는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요망한 상상을 홱홱 떨쳐 냈다.

허나, 그럴수록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에잇. 내가 뭐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발로 내가 가겠다는데 안 될 건 또 뭐야?”

하여, 자기 합리화와 동시에 곧바로 둘을 따라나서려는 순간,

“……?”

또 다른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이번에는 정말로 우연이었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둘의 뒤를 밟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루나?”

세타와 제노스에 버금가는, 테라의 또 다른 천재였다.

***

쉰 평은 훌쩍 넘는 널찍한 방.

레이브 성 내에서도 가장 화려한 그곳에, 한 사내가 자리해 있었다.

방 곳곳에는 눈을 부라리는 무수한 기사들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범인이 봐도 사뭇 범상치 않은 인물.

“이그니스 백작!”

허나, 내가 방 안에 들어서는 즉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입가에는 활짝 미소까지 지은 채, 어느새 다가와 연신 내 어깨를 토닥인다.

“고생 많았네. 아주 장해! 비록 몸은 이곳에 있지만, 자네가 우리 테라를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보고는 내 익히 듣고 있다네.”

“…….”

그 즉시 나는 옆으로 눈을 돌렸다.

마치 네 솜씨냐는 듯.

허나, 정작 시선을 받은 실비아는 다소곳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국왕 전하.”

“그래. 한창 바쁠 백작이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을꼬?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만 하게. 내 모두 들어줄 테니…….”

“다름이 아니라, 혹 ‘이그니스’라는 이름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이그니스?”

순간, 내 앞의 테레이라 국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전에도 분명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더욱이 연배도 얼추 비슷하지 않은가?

당시의 테라는, 제국과의 교류도 상당했다고 들었으니…

“그리 진지하게 물으니,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한데, 뭐 때문에 그러는 게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다만 이 이상 시간을 끌기는 싫었기에, 나는 직설적으로 물음을 던졌다.

“하면, 이리스 쿤 이그니스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습니까?”

“이리스 쿤 이그니스…?”

찰나, 멍하니 중얼거리던 테레이라 국왕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설마…?”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테레이라 국왕의 표정이 한없이 굳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실비아는 어느새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지 않나?”

“그의 생사를 여쭙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저와 폐하가 생각하는 이가 동일인이라면, 저는 이대로 테라의 작위를 반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제 이름은 세타 쿤 ‘이그니스’입니다. 폐하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리스 쿤 이그니스와는 성이 같지요.”

“……!”

테레이라 국왕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쐐기를 박았다.

“아무래도 그와 저는 같은 피가 흐르는 듯합니다.”

“그, 그 말은…?”

“비운의 황자 이리스 폰 이그니스. 현 황제의 동생이며, 동시에 그로 인해 본래의 성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빼앗긴 인물.”

“흐어어억!”

얼마나 놀랐던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국왕이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바로 제가, 그의 친아들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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