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대격돌(1)
차원의 틈새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직후.
예의, 열두 마탑 중앙에 자리한 초거대 호수.
“몸은 좀 어때요?”
나는 눈앞의 상대에게 물었다.
그때까지도 제 목을 우둑, 우둑 꺾어대던 잭 디스페로우가 짤막하게 대꾸한다.
“가뿐하다.”
“다행이네요.”
“신체의 힘은 넘치고, 써클도 완전히 회복되었어. 더욱이 마나의 농도조차 이전보다 훨씬 짙어진 것 같아.”
마지막 말이 핵심이었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졌다.
이 말인즉, 마법의 위력 또한 상승했다는 뜻이니까.
“대략 얼마나요?”
“…지금의 느낌이라면, 초월의 마탑주를 상대로는 확실한 우세. 염화의 마탑주와 붙는다면… 힘들지만 호각.”
“그, 그 정도씩이나?”
“모두 네 덕분이다.”
순간, 잭 디스페로우의 뜨거운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구태여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금세 여기까지 전해졌다.
“크흠…….”
가볍게 헛기침을 한 내가 이내 그 시선을 피했다.
뜨거워서 데이겠네.
의식을 회복한 이후 부쩍 저런 반응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권속의 계약에 따른 ‘부작용(?)’인 듯했다.
결코 그냥은 생길 수 없는 특별한 유대관계.
그런 보이지 않는 끈이, 뜬금없이 나와 잭 디스페로우 사이에 생긴 기분이랄까.
당장 나만 해도 그를 볼 때면 전에 없던 묘한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타. 이제부터는 계획이 뭐지?”
그때, 전투의 마탑주 로마르니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소곳이 앉아 쉬고 있던 스실라 씨도 눈을 치뜨며 나를 올려다봤다.
“…마탑주가 셋, 그리고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천. 이 정도라면 분명 일전도 불사해 볼 만한 전력이겠죠.”
“일전이라면… 역시 제국이겠지?”
“네. 집 나간 마탑주들도 있지만, 결국 그들도 제국과 한 몸으로 봐야 할 테니까요.”
“만반의 준비를 하지. 외부로 나가 있는 마법사들도 속속 불러들이겠다.”
“그거 좋은데요? 그 다음은…….”
움찔.
찰나, 말끝을 흐리던 내 신형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때마침 한 광경이 시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세 마탑주들은 물론이고.
다른 마법사들조차 내게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겠지? 나름 괄목할 만한 결과물이기는 한데…….’
잠시 후, 내 손이 품 안으로 향했다.
예의 세계수가 건넨 구체는 틈새를 빠져나오는 즉시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원주인인 ‘이그드라실’에게로 돌아간 것이겠지.
그것이 없으면 차원의 경계 자체가 희미해질 테니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칠악의 1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즉,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역시 열두 마탑을 하나로 통합하는 편이 낫겠어.’
직후, 내 얼굴 위로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신뢰를 쌓은 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니까.
한 조직의 문제에, 외부인인 내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는 없는 법이다.
허나, 동시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기도 했다.
칠악이 버젓이 존재하는 이상, 방치하면 언제든 이그드라실은 다시 위협받을 테니까.
그나마 희망인 부분은, 이번 일로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호수 아래에 자리한 세계수.
그런 호수를 둘러싼 열두 개의 마탑.
적어도 최초의 마탑은 세상을 지키는 수호자를 자처했다.
태생부터 뼛속까지 썩은 조직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회생의 가능성도 충분하지 않을까?
우두머리인 수장만 제대로 된 사람을 뽑는다면.
“나는 싫다.”
“…예?”
“통합 마탑주 말이다. 아마 초월의 마탑주도 나와 같은 대답일 거다. 그는 귀찮은 자리는 질색하는 성격이니까.”
“아니, 잠깐만… 제 생각까지 읽을 수 있다고요?”
“…표정에서 다 드러나던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잭 디스페로우의 능청에 내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건 좀 심각하잖아.
제아무리 권속으로 이어진 관계라지만, 속마음까지 훤히 꿰뚫어 보는 건 아니지.
이쪽도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근심이나 두려움, 공포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들만 공감할 수 있는 듯하니까.”
“…전혀 위안이 안 되거든요?”
그때, 로마르니가 다시금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통합 마탑주라니. 혹, 열두 마탑을 몇 개로 줄여 나갈 생각인가?”
“…몇 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로 통합하려 생각하고 있는데요.”
“……!”
직후, 로마르니가 두 눈을 부릅떴다.
다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켜보던 마법사들조차 웅성거리기 바빴으니까.
“…괜찮은 생각이에요. 솔직히, 쓸데없이 많기는 했잖아요?”
스실라 씨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예의 자애로운 미소로 사방을 둘러봤다.
“또, 같은 식구끼리 이런 끔찍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조직 자체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치유의 마탑주 님…….”
“여러분은 아닌가요?”
“…….”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럴수록 분위기도 급격하게 차분해졌다.
끔찍한 역사.
그 말로, 다시금 죽은 동료들이 떠오르는 것이겠지.
“…나는 찬성이야.”
순간, 로마르니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을 잃은 제1마탑을 먹고, 무용(無用)한 열두 마탑을 하나로 통합한다.”
“…….”
“그리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조직이니, 수장도 전혀 새로운 인물이면 좋겠지?”
“……?”
“나는 그 자리에 세타 쿤 이그니스를 추천한다.”
“……!”
그 말과 동시였다.
“저도 세타 군을 추천해요.”
“이하동문이다.”
차례로 스실라 씨와 잭 디스페로우가 답했다.
순식간에 세 마탑주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된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뭘. 어차피 마탑주는 그간 제일 강한 놈이 차지해 왔어. 장장 수백 년 동안이나. 특별히 문제랄 것도 없을 듯한데?”
“하지만…….”
“꼬우면 네 녀석을 꺾으라고 해. 실력으로. 그럼 그놈도 인정해 줄 테니까.”
스실라 씨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피식, 실소를 터뜨린 잭 디스페로우도 팔짱을 낀 채 오직 나만 바라본다.
그 순간,
“새, 새로운 마탑주 님 만세!”
“……?”
어딜 가나 눈치 빠른 사람들이 존재하는 법.
한 마법사의 만세 삼창이 시작이었다.
“마탑주 님을 환영합니다!”
“암, 자고로 저 정도 인물이 안 되면 나는 인정 못 하지.”
“전임자가 7써클 마스터였으니, 못해도 그와 비슷한 경지는 되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수천의 사람들이,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시선들이 내게로 집중됐다.
이러면 나는…
“자, 이제 어쩔 거지? 예비 초대 마탑주 님.”
이들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전무했다.
애당초 이미 작정하고 벌인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비극은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잘 알겠습니다.”
“……!”
“여러분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우선, 제1마탑부터 먹죠. 그곳에 보관된 마법 서적들과 아티팩트들을 아낌없이 분배하겠습니다.”
“헉?”
“다른 마탑들에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모두 빼앗길 물건들 아닙니까? 차라리 전쟁에서 적극 이용해 먹는 게 낫겠지요. 이게 초대 마탑주로서의 첫 번째 명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번에 우렁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지식과 힘에 대한 갈망은 하위 마법사로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나는 그들의 진심을 사기 위해, 줄 건 확실하게 주기로 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뭐.
“잘하는군. 도와줄 필요도 없겠어.”
커다란 함성 속, 내게 다가선 잭 디스페로우가 속삭였다.
“이 정도야 기본이죠.”
“볼수록 기대되는군. 다음 계획은?”
“이왕 열두 마탑을 하나로 만들었으니, 대륙인들이 알 수 있도록 확실하게 선포식을 해야겠지요. 돌아가는 즉시 준비해 주세요.”
“…선포식?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다만, 이런 전쟁통에 굳이 필요한 일인가?”
“네.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잭 디스페로우의 물음에, 내 입가로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건 선포식이라는 이름의 선전포고니까요.”
“…그 말은 설마?”
“네. 배신자들을 직접 이쪽으로 끌어들일 겁니다. 분명 자존심이 강한 인간들이니, 숨어서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겠지요.”
무시할 수 없는 덫.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
내가 그들을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
제국의 웅장한 황성.
“폐하. 제2군이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
“이대로 지켜만 보실 생각이십니까?”
황좌 앞에서, 백발의 노인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레오나르도 대공.
명실상부 제국의 2인자인 그였다.
“2군이면 스노비 쪽이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폐하.”
“대공. 그대는 스노비 쪽의 사람이었고.”
“…설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언제나 폐하의 사람입니다.”
“크크크, 말이 그렇다는 게지.”
직후, 피식 웃음을 터뜨린 황제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보다, 재미있군. 스노비 그 녀석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아이는 아닌데 말이지.”
“…어제부터 연락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 걱정은 됩니다.”
“설마 당한 건가?”
“그조차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제야 황제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갈수록 흥미가 생기는군. 그 스노비가 당했다라.”
“말씀드렸지만 아직 확인된 사실은…….”
“그게 아니지. 사령관이, 그것도 황자쯤 되는 인물이 홀로 사라졌어. 한데도 제2군 중 누구도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결국 한 가지 경우의 수밖에 없지 않겠나?”
“…….”
그제야 레오나르도 대공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피식 웃음을 터뜨린 황제가 이내 손을 휘휘 젓는다.
“그리 걱정되면 자네가 직접 가보지 그러나?”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안 간다고는 얘기하지 않는군. 언제는 내 사람이라더니.”
“황자 전하는 폐하의 핏줄이지 않습니까.”
“하면, 이것도 알고 있지 않나? 나는 그 괴물을 친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조금도.”
“…….”
곧장 입을 다무는 그를 보며, 황제가 한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가보게. 가서 그대가 직접 상황을 확인하고, 우려가 현실이 된다면 2군을 이끌도록.”
“명 잡겠나이다.”
“실로 오래간만에 무료함이 조금은 가시는군. 그 스노비가 죽었다라…….”
제 아들이 죽었다는 보고에도,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 황제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진심으로 궁금해지는군.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그 ‘세타 쿤 이그니스’라는 아이의 낯짝이.”
***
우리는 레이브 성으로 돌아왔다.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대회의실로 호출된 나는, 쉬지도 못하고 그쪽으로 불려갔는데.
“……?”
곧 내가 들어서자 무수한 시선들이 이쪽으로 쏟아졌다.
모두 테라 쪽 사람들이었다.
“세타.”
“이게 무슨 일이야?”
“중요한 얘기가 있어.”
그건 듣지 않아도 잘 알겠다.
당장 말을 건네는 실비아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으니까.
“네가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줘야겠어.”
“…뭐?”
“방금 카이클 공작님에게도 답변이 왔어. 연합군에서 온 분들만 허락한다면, 응당 그리하라고.”
“그게 갑자기 뭔…….”
내가 채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귀청을 때렸다.
“부탁하네, 이그니스 백작.”
“그 나이에 7써클에 올랐다지? 진심으로 축하하네. 우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이.”
“같은 나라 사람으로서 진정 자랑스럽다네. 자고로 범국가적인 조직의 수장은 초국가적인 인물이 되어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이그니스 백작이라면 우리는 환영이라네.”
모두 입에 발린 소리다.
그게 아니겠지.
지닌바 능력은 뛰어나면서, 세력은 전무한 인물.
그런 내가 딱 이 자리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을 테지.
선례라면 이미 무수히도 많았으니.
‘뭐, 생각들이 그러시다면 따라줘야지.’
물론,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모두 다 먹으려고 했으니까.
더욱이, 아직 통합 마탑의 선포식을 거행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기회인즉.
“하면, 이제부터 제가 대장이군요.”
직후,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곧이어 순간적으로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귀족들을 향해,
“그리들 마음먹으셨다면, 각오 단단히 하시지요. 지위가 얼마나 높든 어떤 뒷배를 가졌든, 아주 제대로 부려 먹어 드릴 테니까요.”
나는 강하게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