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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208화 (208/251)

208화. 첫 번째 권속(3)

눈을 감자 오만의 기억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쪽으로! 빨리!”

그곳에서, 이리스라는 사내는 연신 숨을 헐떡이며 도망치고 있었다.

한쪽에는 에메랄드빛 머리칼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여인의 손을 쥐고서.

다른 한 손으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까지 안아 들곤.

…그 둘이 누구인지는 구태여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세트린. 여기서부터는 세타와 둘이서 가도록 해.”

순간,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이리스가 말했다.

“다, 당신은요?”

“알잖아. 추적자들이 있어.”

“그, 그런 거라면 저희끼리는 갈 수는 없어요. 절대로!”

“아니. 부탁이니까, 이대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줘. 제아무리 황실 기사들이라도, 검은 마물의 숲 내부까지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할 거야. 선발대만 처리하는 대로 나도 곧장 따라갈게.”

시야가 점차 확대되어 간다.

그러자 대략 오십의 기사들이 알알이 동공에 틀어박혔다.

다행인 점은, 적어도 그들이 추적자들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남아서 쫓아오는 놈들을 처리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꼭 살아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이리스가 몸을 돌렸다.

한데, 직후 그가 기사들을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다.”

“주, 주군. 이게 무슨…!”

“못난 주군을 따라서 팔자에도 없는 윗대가리들의 권력 다툼에 끼어 이런 꼴을 당하고 있지 않느냐? 진심으로 면목이 없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나쁜 건 알폰스 황제입니다! 저희는 주군을 따른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리스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때마침, 웬 ‘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울린다.

“…벌써 왔나?”

“주군도 세트린 님과 함께 가시지요. 저희가 막겠습니다!”

“아니. 나도 너희와 끝까지 간다.”

“……!”

기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 이리스는 한 사내를 불렀다.

“라포르테.”

“예, 주군!”

순간, 상당히 젊어 보이는 사내가 무리를 헤치며 나왔다.

이제 고작해야 20대나 되었을까?

척 보기에도 이곳에서 막내 같은 그에게,

“네게는 특별히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겠다.”

“예?”

“나이는 어리지만, 황실의 누구보다 재능이 뛰어난 놈. 그런 너에게, 내 소중한 가족들을 부탁해도 되겠느냐?”

“……!”

일순, 라포르테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주, 주군. 하지만 저는…….”

“너는 아직 젊지 않느냐? 그리고, 네 어머니와 약속했거든. 몸 건강히 너를 잘 돌려보내 주기로. 혹여나 네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내 면이 안 선다는 말이지.”

“…….”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그 즉시, 이리스는 라포르테를 밀어냈다.

“가라. 항명은 받지 않겠다.”

“…목숨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그제야 라포르테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이리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아, 안 돼요! 나는 이대로 갈 수 없어요. 제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를 건네받고.

버티는 여인을 잡아끌며, 라포르테는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기 있다! 반역자들을 잡아라!”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 황제의 개들을 모조리 처죽여라!”

두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맞부딪힌다.

누가 봐도 이리스 쪽의 명백한 열세였다.

양과 질, 어느 하나 우세한 부분이 없었으니까.

하나같이 지친 아군과 달리, 그간 잘 먹고 푹 잤는지 저쪽은 상태가 퍽이나 좋아 보였다.

더욱이 상대는 무려 황실의 기사단이었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두두두두두! 서걱! 서거거거걱!

“컥!”

“쿨럭!”

살을 가르는 파육음과 비명이 연이어 울려 퍼진다.

그 사이에서, 이리스는 마지막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져도.

심지어 다리가 잘려 나가도 검을 지지대 삼아 끝까지 자리를 사수했다.

그 처절한 방어전은 ‘한 사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장장 반나절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저벅.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순간, 거짓말처럼 이리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주변의 동료들은 모두 쓰러진 뒤였다.

그런 그 앞으로 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의 미남자가 다가선다.

‘저 사람은…….’

3자의 시점인 세타의 뇌리에도 또렷이 각인되어 있는 사내였다.

현 제국의 십이월이기도 한 그.

“…웨이브로 공작.”

“제가 가르친 제자를, 제 손으로 직접 베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리스 황자 전하.”

파랑의 검사, 웨이브로 공작이 검을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

이에, 이리스가 다시금 미소를 피어올렸다.

“오랜만이군.”

“전하. 저는 진심으로 아쉽습니다. 황족을 떠나, 당신의 재능은 분명 마스터에도 능히 오를 만한 종류의 것이었는데…….”

“딱히 상관은 없지 않소? 더 대단한 제자가 하나 더 있으시니.”

“폐하는 이제 국정으로 상당히 바빠지실 테니까요.”

“그것 참, 실망시켜 드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

웨이브로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그는 설득을 위해 전면에 나선 듯했으니까.

그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는 즉시 깨달았을 테지.

“…적어도 옛정을 생각해 고통 없이 베어 드리겠습니다.”

대화는 짧았다.

승부는 찰나.

고작 10여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한순간 웨이브로 공작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푸욱!

“……!”

섬전같이 쏘아진 그의 검은, 정확히 이리스의 복부를 관통했다.

일신의 무력은 물론이고, 이미 체력까지 다한 이리스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웨이브로 공작의 검이 인간의 신체 반응속도를 까마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다.

“…전하. 안녕히…….”

촤아아악!

복부를 관통한 검이 순식간에 심장까지 치솟았다.

그 고통으로 이리스의 입이 쩌억하니 벌어진다.

힘을 잃은 신형은 기우뚱 쓰러져 갔고.

이내 발아래의 지면과 몸이 충돌하려는 순간,

“세타!”

“……!”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곧 스실라 씨의 걱정 가득한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아, 아닙니다. 무슨 일 있나요?”

“…치료가 끝나서요. 잭 말이에요.”

“이렇게 빨리요?”

“그저 응급처치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조치했지만, 잭은 외상보다 내상이 훨씬 심각해요. 이런 안전지대에서도 저런 몸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즉시, 나는 곧장 잭 디스페로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그리 두지 않을 테니까요.”

“……!”

직후, 내 전신으로 마기가 스멀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음에도 스실라 씨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마기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영양분으로 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기분은 무척이나 불쾌하고 더러웠다.

오만의 기억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으니.

다만,

“…이제 약속의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게 무척이나 도움이 될 터였다.

“언제까지 주무시고 계실 생각이십니까?”

“…….”

“이만 일어나세요, 그 명성이 아깝습니다.”

“…….”

“다시 한번 제가 말합니다. 아니, 명합니다. 파괴의 마탑주, 잭 디스페로우.”

파르르르.

순간, 감겨 있는 잭 디스페로우의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향해,

“일어나.”

콰콰콰콰콰콰콰!

나는 언령의 힘까지 담아 마기를 폭발시켰다.

***

한편.

스란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연합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데, 예상대로 그 분위기가 상당히 흉흉했다.

“그간 반대의 길을 걸어온 저희를 이리 회의에 참석시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사내 때문이었다.

철의 기사, 엑스톤 폴 다우니스.

그가 공국의 대표로 이 자리에 함께하기를 요청했다.

실비아는 순순히 그러노라 답했고.

그 결과,

“진짜 감사하기는 한 건지…….”

“혹시 또 모르지요. 겉으로는 이쪽으로 붙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지.”

“스란이야 옛날부터 박쥐 같은 행동으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연합 쪽 사람들의 냉랭한 반응이 이어졌다.

“뭔 말들을 그리 하십니까?”

하여, 지켜만 보던 에이스가 직접 나섰다.

“스란이 분명 잘못된 길을 걸었다 해도, 그건 전적으로 공왕을 포함한 일부 권력자들의 결정이었지요. 여기 있는 철의 기사는,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누구보다 잘못된 길을 바로잡으려 노력했고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뒤늦게 바로 잡는다 한들… 이미 지나온 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이어지는 말에, 에이스가 인상을 굳혔다.

“끝까지 물어뜯어 보시겠다는 겁니까?”

“8월의 검사님. 솔직히, 당신의 공이 크다는 건 이곳의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허나, 짚고 넘어갈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요.”

“뭘 어떤 방식으로 짚고 넘어가겠다는 겁니까?”

“만약 스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진심의 의미로, 향후 있을 교전의 선봉은 스란에서 맡아주셨으면 좋겠군요.”

“……!”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간 연합의 피해도 상당했으니.”

에이스는 순간적으로 ‘미친’이라는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피해는 무슨.

연합군도 이제 첫 출전이면서.

여기에 저들은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물론, 2선은 저희 연합군 쪽에서 확실하게 지원하겠습니다.”

“에라이 씨벌탱. 그러니까 지금, 화살받이는 스란에 다 떠넘기고 공은 그쪽에서 챙기겠다는 거잖아?”

아차.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무례하오, 8월의 검사!”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쯧, 이러니 근본도 없는 방랑 검사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상종할 가치조차 없군요.”

“천박하기는…….”

한 성격하는 에이스의 이마에 희미한 실핏줄이 드리워졌다.

직후, 보다 못한 실비아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저희끼리 싸울 땐가요? 정치는 각자 자국으로 돌아가서 하세요. 제국이 비웃을 일입니다.”

“어딜 건방지게 어른이 말하는데…….”

“뭐, 뭐라고요?”

“아아, 혼잣말이요, 혼잣말.”

안 그래도 테라를 무시하는 연합군이었다.

공작 본인이 와도 콧방귀를 낄 텐데, 그 대리인인 실비아가 상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빠직.

그제야 실비아의 이마 위로도 선명한 십자 마크가 아로새겨졌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자꾸 이럼 후회하실 텐데…….”

“풋. 후회는 무슨…….”

“세타 쿤 이그니스.”

“……!”

마법과도 같은 그 이름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당대 대륙 제일의 마법사.

이번만큼은 연합군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마법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으니까.

더욱이 이들은 이미 세타의 실력까지 보지 않았던가?

하여, 실비아는 여기서 약간의 뻥카를 치기로 했다.

“그 아이가 저를, 아주아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아마 제 말 한 마디면…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지도?”

분명 뱉고 나서 후회할, 어마무시한 충동 발언을.

***

“음…….”

지금 막 몸을 일으킨 잭 디스페로우가 신음을 삼켰다.

더 나아가 연방 사지를 끼긱, 끼긱 돌려보기까지 한다.

작금의 상황은 스스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기에.

“정말로… 아무 문제 없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실라 씨가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진짜 잭, 당신 맞는 거죠?”

“예.”

“다행이다.”

그제야 스실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잭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못했다.

다시 눈을 뜨는 즉시, 한 존재만이 시야로 들어왔기 때문에.

분명 모든 게 그대로인데.

아니, 힘은 오히려 훨씬 더 강해진 기분인데.

오직 ‘그’에 대한 감정만 달라진 느낌이다.

“…세타 쿤 이그니스.”

만약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이전에 없던 무한한 애착과 관심이 갔다.

목숨이 위험해지면,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제 몸을 던질 정도로.

물론 생명의 은인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지만…

…이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도가 과했다.

“…엇!”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마나를 소모했던 것일까?

미처 돌부리를 발견하지 못한 녀석이 휘청였다.

그 즉시 잭은 땅을 박찼다.

덥썩!

“괜찮나?”

“…네? 아, 네. 고맙습니다.”

한순간, 완전히 그에게 안긴 상태가 된 세타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집중하느라 땅 밑을 미처 살피지 못했네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크흠. 그게, 이 차원의 핵심을 찾아냈거든요.”

“핵심…?”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

대번에 토끼 눈이 된 사람들의 시선이 세타에게 집중됐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죠.”

우웅! 우우우웅!

다시금 만들어진 써클이 요동친다.

세타의 농도 짙은 마나에 반응하고 있음이다.

더 강해진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대륙 최고의 마법사.

와장창!

순간, 세타의 가벼운 손짓에 이윽고 주변의 배경이 빠르게 허물어져 갔다.

“…그리고, 향후 미래에도 대륙 제일일 남자.”

그 속에서, 잭의 입가가 완연한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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