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첫 번째 권속(2)
오만의 기억은 약 2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내게는 떠오르지조차 않는 어린 시절.
대륙 그 어느 곳보다 웅장한, 제국의 황궁(皇宮).
그 한가운데, 두 명의 사내가 존재했다.
한쪽은 내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당대에는 제국의 태양이라고 불리는 이, 스왈로우의 현 황제 알폰스 폰 트쉬베르.
하지만 정작 더 놀라운 인물은 그 앞에 있었다.
‘……!’
내면에서 거친 파문이 일었다.
짙푸른 머리칼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를 보기 전까지, 나는 한 가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 외모는 전적으로 아이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화이트 드래곤 이리나도 분명 그리 말했으니까.
한데, 아니었다.
누가 봐도 내 생부(生父)임이 분명한 그는, 나와 무척이나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머리와 동공의 색깔만 다를 뿐.
감히 짐작하건대, 그쪽은 모친의 유전을 받은 것일 테지.
“이리스.”
순간, 과거 속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형님.”
그리고 앞에 선 사내는 그를 ‘형님’이라 불렀다.
“덕분에 쉽게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큰일을 했지. 네 스스로 자리를 포기했지 않느냐? 이제 와 묻는 거지만, 너는 진정으로 황좌(皇座)가 탐나지 않느냐?”
“그까짓 황좌, 형님께서 다 가지시지요.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 자리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지?”
“보나마나 귀찮은 일은 한가득 쌓여 있을 테고, 매일 아침에 일어나 목이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리에는 그만한 책임과 위협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대신 제국의. 아니, 이 이그란트 대륙의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권력을 얻겠지.”
“우선시하는 가치는 제각기 다른 법입니다. 저는 그런 권력보다, 평생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니, 형님께서 그 귀찮은 자리를 떠안아 주신다면, 제게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요.”
“…가치관의 차이라는 건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너는…….”
찰나, 말끝을 흐리던 황제가 멈칫했다.
현재 내 시야는 철저하게 제3자의 관점이었다.
마치 허공을 부유하는 혼(魂)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직후, 내 시선이 황제가 바라보는 곳을 비추었다.
“…스노비냐?”
“……!”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웬 꼬맹이가 움찔 몸을 떤다.
외형상으로는 고작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만’이라는 악의 근원을 직접 받들일 놈.
“이리 오거라.”
“…예, 폐하.”
재빨리 대전으로 걸어 나온 스노비가 예를 취한다.
그리곤,
“안녕하세요, 이리스 삼촌.”
자세를 가다듬으며 황제 앞의 사내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 즉시, 이리스라 불린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스노비. 안 본 사이 많이 컸구나. 이제 열 살쯤 되었냐?”
“8살입니다. 아카데미 2년 차이며, 내년부터는 그곳에서 배운 지식으로 폐하를 직접 보필하고 싶습니다.”
“…원, 그 애늙은이 같은 말버릇도 여전하구먼. 우리 세타는 절대로 이렇게 키우지 말아야지.”
다시금 내 내면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으니까.
역시, 이 이리스라는 사내는 내 ‘아버지’가 맞았다.
“곧 황궁으로 한번 데려올 테니, 스노비 네게 잘 좀 부탁하마. 그렇다고 너무 물들이지는 말고. 자고로 애는 애다워야지.”
“괜한 심려 끼쳐 드리지 않도록, 제가 잘 놀아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말투부터 매우 심려된다, 이 뜻이라니깐?”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황제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이리스. 너는 이만 돌아가는 게 낫겠다. 아직은 많은 이들이 이 상황을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니. 특히나 네 쪽의 사람들 말이다.”
“잠시만요.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형님. 아니, 폐하.”
“……?”
“약조대로, 그들은 건드리지 않으시는 거겠지요?”
어느새 장난기를 말끔히 걷어낸 이리스가 물었다.
“…….”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황제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제는 그들 또한 나의 소중한 신하들이다.”
“하면, 믿고 물러나겠습니다. 더하여, 제가 궁에 있어봐야 잡음만 커질 테니, 이번 주 내로 짐을 싸서 떠나도록 하지요.”
“그래주면 고맙지.”
“그럼 이만…….”
마지막 대면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리스는 진심을 다해 황제에게 예를 마쳤다.
곧 허리를 곧게 편 그는, 스노비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곤 대전을 퇴장한다.
“폐하.”
이내 둘만이 남게 되었을 때, 스노비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데, 그 내용이 8살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숨어서 엿듣는 취미도 있었느냐? 내 너만큼은 따로 제지를 하지 말라 일러두기는 했다만, 그건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요즘 제왕학을 배우고 있는데, 현재 폐하와 이리스 폰 트쉬베르의 관계는, 거기서 배운 내용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습니다.”
“…그래? 어떤 점이 그렇느냐?”
“거기에는 웃으면서 등 뒤에 칼을 감추는 자, 특히 겉으로는 욕심이 없어 보이는 자를 특히 조심하라고 적혀 있었거든요.”
“맞는 말이군. 한데?”
“그 범주에, 피를 나눈 형제는 예외입니까?”
스노비는 무척이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잠시 표정을 굳힌 황제는…
“…아니. 혈육이야말로 누구보다 경계해야 할 경쟁자지.”
입가로 미소를 피어 올리며 대꾸했다.
나는 보았다.
일순, 그의 얼굴 위로 살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기억 속에서, 스노비의 이런 이간질은 장장 수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그 세 치 혀로, 무수한 귀족들의 명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물론 거기에는 내 아버지.
이리스 폰 트쉬베르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 결과,
머지않은 훗날, 1황자가 아닌 2황자가 오만의 선택을 받게 된다.
***
같은 시각, 레이브 성의 대회의실.
“곧바로 귀족들을 소집할게요.”
실비아가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부에는 여전히 그녀와 에이스, 제노스 단 세 사람뿐이었다.
“소집해서 뭘 어쩌려고?”
“테라군은 물론이고, 지금 이곳에서 임시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까지. 눈앞의 적이 사라진 이상, 우리도 과감해질 필요가 있겠죠.”
“어떻게?”
“가장 먼저, 새롭게 부대를 편성할 거예요. 나라의 구분이 없는, 보다 완벽한 연합군을 만들기 위해서.”
“테라야 그렇다 쳐도, 각국의 소위 높으신 양반들이 그 꼴을 그냥 두고 볼까?”
“괜찮을걸요? 요 며칠 대화를 나눠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세타’라면 다들 믿는다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래? 내 제자 놈이 그 정도로 연합군의 신뢰를 쌓아뒀다는 말이지?”
순간, 에이스의 입가로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표정은 뭐래요? 원래라면, ‘그래야 내 제자지’라느니 본인이 되레 더 거들먹거려야 정상인데?”
“아닌데?”
“아니긴…….”
“그래 봤자 나는 내 제자를 너 같은 요망한 계집애한테 내어줄 생각이 쥐똥만큼도 없으니, 꿈 깨라?”
“뭐, 뭐요? 갑자기 말이 왜 그런 식으로 되는데?”
“목적이 있으니까 갑자기 자리에도 없는 세타를 추켜 세워주는 것 아니겠냐? 뻔하지.”
“참나, 착각도 정도껏 해야 뭐라고 반응이나 하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실비아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선봉은 변태 아저씨랑 제노스가 맡도록 해요. 2선은 환상의 마탑주 님과 나머지 연합의 마스터들이 지원할 테니까요.”
“뭐야? 나더러 또 선봉을 맡으라고?”
“당연하잖아요.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가장 ‘강한’ 사람이 선두에 나서야지. 이번 전쟁에서 확실하게 경험하셨지 않나요?”
“크흠. 뭐, 내가 강하다는 점은 나도 동의한다만…….”
“그렇죠?”
실비아가 일견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입은 ‘단순한 인간 같으니라고…’ 따위의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제노스. 너도 불만 없지?”
“…네 말대로 그 녀석을 팔아서 연합군을 설득할 수 있다면… 나도 딱히 상관없다.”
“그럼 얘기 끝났네. 곧바로 소집한다.”
이윽고 실비아가 한층 짙어진 미소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목표는 제국.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제대로 반격해 보자고.”
***
어느 이름 모를 고요한 숲속.
“스노비가 죽었다.”
“…….”
그 한마디에, 사위는 고요한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화자는 대공이었다.
그 앞에, 남은 칠악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각기 나태, 분노, 질투, 마지막으로 탐욕인 대공 그 자신까지.
무려 한 세기를 살아온 일곱의 악이, 이제는 고작 절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우선은… 스노비가 소멸하기 전 보내온 마지막 기억을 재생시키겠다.”
우우웅!
한차례 묵직한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곧, 대공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새까만 마기가 물감을 그려간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로, 흑백의 장면들을 연출하면서.
“이건…?”
나머지 칠악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이내 허공 위로 두 인영이 생성되었고.
둘은 빠르게 싸움을 이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칠악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연신 신음을 흘리는 나태, 감탄을 거듭하는 질투, 눈을 감는 분노까지.
허나, 그런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으니.
불신, 그리고 경악이라는 ‘감정’이었다.
“…….”
숨 막힐 듯한 침묵 속, 장면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던 스노비의 마기는 끝끝내 상대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소멸했다.
웬 반투명한 막에 부딪힌 직후였다.
그것도 모자라, 예의 상대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즉시,
쿵!
스노비는 무릎을 꿇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저거 설마…?”
“그래. 언령이다.”
“……!”
앤그리가 대답하자, 레이지가 헛숨을 들이켰다.
“어, 언령이라니… 드래곤이라는 거야?”
“아마도 드래곤은 아니겠지. 그들은 이제 고작해야 다섯 개체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중에 ‘바람’의 일족은 없었다.”
“그, 그 정보 자체가 거짓이라면? 사실은 다섯 개체보다 더 많이 남았을 수도 있잖아!”
타이밍 좋게, 흑백의 물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답은 마기를 거두어들인 대공이 대신했다.
“그럴 가능성은 더더욱 없지.”
“대공.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이번에도 대공, 디자이어는 단호할 정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만큼은 내가 장담한다. 다섯 드래곤 중 하나는, 이미 ‘확실한’ ‘내 편’이니까.”
***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한 잭 디스페로우를 업고 곧장 색욕의 이능을 발동시켰다.
웨에에에엥!
익숙한 감각과 동시에, 나는 최초 발을 딛었던 차원의 틈새로 돌아왔다.
“세, 세타?”
대번에 눈을 크게 뜨는 스실라 씨가 나를 반겨줬다.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로마르니도 빠르게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스실라 씨. 오자마자 죄송한데, 힘 좀 써주실 수 있을까요? 급해서요.”
“어, 어디 다치셨나요?”
“아니요. 저 말고, 제 등에 있는 파괴의 마탑주 님요.”
“……!”
그제야 내 로브에 가려져 있던 잭 디스페로우가 시야로 들어왔는지, 스실라 씨가 눈을 크게 떴다.
“재, 잭!? 결국 성공하셨군요!”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허나 그 또한 찰나에 불과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려댄다.
“이, 이 사람… 살아 있는 건가요?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살아 있어요.”
“……!”
“눈에 보이는 외상과 치료 가능한 내상만 좀 부탁드릴게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시도를 해보려면, 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하거든요.”
“마, 만반의 준비라니…?”
“저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만약 계획에 성공한다면…….”
직후, 말끝을 흐리던 나는 목소리에 확신을 담았다.
“…써클이 부수어지기 전보다 최소 곱절은 강해질 거예요.”
“……!”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어마어마한 전력을 첫 번째 ‘권속’으로 얻게 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