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오만(5)
“크헉!”
마치 성 꼭대기에서 추락하는 깃발처럼.
새로운 육신을 차지한 오만은 속절없이 나부꼈다.
빈 허공으로 우수수, 새하얀 강냉이마저 쏟아내면서.
“아직 멀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스팟!
나는 곧장 그 뒤를 쫓았다.
마나를 전신으로 두르고.
두 다리에는 더욱 강한 힘을 실으며.
슈슈슈슈슈슈슈슉!
양 주먹은 빠르게 쏘아냈다.
그 끝에 맺힌 마력탄이 무수하게 전방으로 쇄도한다.
‘퍼퍼퍼퍽!’ 하는 가죽 북 두들기는 소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콰콰콰콰콰콰콰!
순간, 놈이 기합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마기의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놈은 두 다리를 브레이크 삼아 가까스로 신형을 멈춰 세웠다.
어제는 제국의 2황자.
오늘은 파괴의 마탑주.
허나, 그 진짜 실체는 마왕의 권속.
칠악의 오만.
“죽여 버리겠다아아아아아아!”
“……!”
찰나 내 눈썹이 꿈틀했다.
외부로 분출된 마기가 점차 특정 형상을 이루어 갔기에.
새까만 연기는, 이내 ‘악마’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오만이 가진 권능 중 가장 경계해야 할 능력.
꾸득, 꾸드드드득!
직후, 예의 형상과 놈이 하나가 되어 간다.
현현화를 넘어선 육신의 악마화.
문자 그대로, 마계의 육신 자체를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것이다.
본래라면 수만 명분의 제물이 필요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오만의 권능은 일시적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크워어어어어어어!
분명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이건만, 괴음은 여느 짐승을 방불케 했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주변의 대기는 ‘펑, 펑’ 하고 터져 나갔고.
원주인인 잭 디스페로우의 마나마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 이 힘… 크크크크. 아주 좋군.
역시 마탑의 3강 중 하나라는 것인가?
어느새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오만이 새빨갛게 미소 지었다.
다만, 나는 제자리에 서 가만히 놈을 응시했다.
여전히 내가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니, 그보다는 놈에게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스노비 벨 그레이스… 아니, 오만이라고 불러야 하나?”
- 좋을 대로 하거라. 그따위 껍데기는 아무렴 상관없으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오만은 대대로 황족의 피로 생을 연명해 왔다고 들었는데, 그 몸은 어떻게 된 거지?”
-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단순한 질문을 하는구나. 마족과의 계약은, 당사자 스스로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법이거늘.
“…역시 그런가.”
예상했던 답이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작금의 광경이, 결국 잭 디스페로우의 자의였다는 뜻이니까.
정점에 있던 초인의 몰락.
써클이 파괴되어 일반인으로 돌아온 그의 감정을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이런 결정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약속하지 않았던가?
내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고쳐 주기로.
한데도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결국 나는 잭 디스페로우에게 그만한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잠시간의 상념을 털어낸 내가, 이윽고 전방을 바라봤다.
“하나만 더 물어도 되나?”
- 뭐냐?
예상외로, 놈은 기꺼이 내 물음에 응해줬다.
하기야 악마화를 완벽히 이루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
아마 속으로는 ‘옳다구나’ 싶을 테지.
“혹, ‘이그니스’라는 성에 대해 아는가 해서.”
- 이그니스…?
“내 이름. 세타 쿤 이그니스의 성 말이야.”
- ……?
내 물음에 오만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린다.
- 왜 네놈의 성을 내게 묻는 것이지?
“조금 마음에 걸리는 얘기를 들었거든. 아주 어렸을 때, 나는 검은 마물의 숲에서 발견되었고, 내 부모는 제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그런 얘기였다.”
- …이그니스? 이그니스라…….
움찔.
홀로 중얼거리던 놈이 일순 전신을 들썩였다.
나는 그 반응으로 확신했다.
“무언가 아는 건가?”
- …설마. 그럴 리가…….
놈의 시선이 내 위아래를 훑는다.
무척이나 불쾌했지만, 이번만큼은 꾹 참고 기다렸다.
어쩌면 출생의 비밀이 드디어 밝혀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아니. 딱 십수 년 전이었으니, 얼추 시기는 맞아. 하지만 어떻게…….
“자꾸 혼잣말만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줘 패버리기 전에.”
- 만약 사실이라면… 큭, 이런 운명의 장난이 다 있나?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
사방으로 넘실대는 마기를 흩뿌리면서 오만이 광소를 터뜨렸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출생의 비밀이고 뭐고, 그냥 이대로 확 목을 꺾어버려?
- 이거 어쩌지? 아무래도 너와 나는 태생부터 원수가 될 운명이었던 모양인데.
“뭐?”
- 그야 그럴 수밖에.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들이 네 부모라면…….
찰나, 말끝을 흐리던 놈이 입이 찢어져라 활짝이 미소 지었다.
- 네 어미와 어비는, 내 손에 죽은 셈이니까.
***
한편, 테라와 스란의 국경.
“하아… 하아…….”
빙결의 마탑주, 에르사 아인하르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옆의 동료는 이미 쓰러진 지 오래였다.
제우스 엑스토나.
무려 대마탑주가, 고작 약관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에게 패하여 정신을 잃은 것이다.
“대체… 넌 뭐지?”
에르사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일대일도 아니지 않은가?
둘과 하나의 싸움.
하물며, 둘 쪽이 그 위명도 자자한 마탑주들이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눈앞의 아이를 애송이로 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녀석은…
“어떻게… 어떻게 그 나이에 7써클에 오를 수 있는 거지?”
“…….”
“세타 쿤 이그니스도 그렇고, 너희들은 진정 인간이 맞기는 한 거야?”
휘리릭!
직후, 한차례 멋들어지게 마력 창을 휘돌린 녀석이 어깨를 으쓱인다.
“글쎄.”
“글쎄라니…….”
“인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뭐…?”
“중요한 것은 ‘내가 인간이냐?’가 아니지. 당신네 두 마탑주가,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
“……!”
“이대로 얌전히 포로가 되도록. 마탑주 정도라면, 나름 괜찮은 인질이 될 것 같으니까.”
에르사가 콰득 입술을 깨물었다.
승산은 없었다.
이미 써클의 마나가 텅하니 비어버린 상태니까.
그에 비해 놈의 마력 창은 아직도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길.”
고운 입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에르사가 이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졌어.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해.”
“현명한 선택이군.”
작게 미소 지은 제노스가 그제야 창을 거두었다.
전쟁은 이미 완벽한 소강상태였다.
사령관이나 다름없던 르반 공작이 명을 달리했고.
두 마탑주마저 인질이 되었으며.
여기에 더해, 공국군의 정신적 지주인 철의 기사까지 등장했으니.
“끝났군.”
그때까지도 두 다리로 꼿꼿이 버티고 서 있던 에이스가 털썩, 뒤로 주저앉았다.
어느새 공국군 진영으로 파고든 엑스톤은 완벽하게 군을 통솔하고 있었다.
곧 마력 구속구를 이용해 단숨에 두 마탑주를 속박한 제노스가 금세 에이스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쩔 셈이냐?”
에이스가 고개만 들어 물었다.
“공국은 완전히 정리됐으니, 이제 진짜 적을 상대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제국?”
제노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에이스가 팍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산 넘어 산이로구만.”
“추정되는 제국군만 무려 백만. 다른 마탑주들도 건재하고,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마스터인 황제까지. 특히 그가 직접 이끄는 기사단은 대륙 최강이라는 위명까지 지니고 있으니, 확실한 대비를 해야겠지요.”
“뭐, 이번에 경험해 보니 마탑주들 쪽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너랑 세타. 두 괴물들이 알아서 찜 쪄 먹어줄 것 아니냐?”
“그렇다고 놀고만 계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검사는 검사가 상대하는 것이 정석. 그런 의미에서, 방금 상대하신 르반 공작은 4번째입니다.”
“…….”
에이스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허나, 제노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말을 잇는다.
“즉, 제국에는 그보다 강한 사람이 최소 셋은 더 있다는 뜻이죠.”
“…돌아버리겠네. 황제와 제국군만 해도 골치 아픈데, 나머지 세 놈은 또 어떻게 처리하지?”
힐끗, 오와 열을 맞추는 공국군 쪽을 돌아본 제노스가 이내 손안의 마력 창을 소멸시켰다.
“일단 본거지로 돌아가죠. 적어도 오늘만큼은 쉬어도 될 듯하니까요.”
***
콰드득!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주변에서는 줄기차게 마나와 마기가 맞부딪힌다.
그런 내 앞에는…
- 꺽… 꺼어어억…….
내게 목덜미를 붙잡힌 오만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방…금… 그 힘은… 뭐지?
“내 질문이 먼저라고 했을 텐데.”
- 너는… 설마 드래곤이었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런 거라면, 이그니스에 대해서는 왜…….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라.”
직후, 손아귀에서 약간의 힘을 뺐다.
놈의 목소리를 보다 선명하게 듣기 위해서였다.
- 아니… 드래곤은 명백한 선(善)에 있는 존재. 악의 성향인 마기는, 설령 죄악의 힘을 빌리더라도 사용할 수 없어. 애당초 죄악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다시 묻겠다. 내 어미와 아비를 죽였다는 말. 무슨 뜻이지?”
- …….
오만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 동공이 하염없이 좌우로 요동친다.
허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놈의 떨림이 잦아들었으니까.
- …크크크크. 궁금한가?
“…….”
- 병신 같은 놈.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아마 속은 타들어가고 있을 테지? 어쩌면 태생의 비밀이 이대로 영영 묻힐 수도 있으니까.
콰득!
나는 대답 대신 손아귀에 다시금 힘을 줬다.
- …쿨럭! 정이 궁금하다면… 날 이대로 놓아다오. 하면 네 궁금증을… 풀어주겠다.
“…….”
- 꽤 괜찮은 제안이 아닌가? 이런 기회도… 또 없다. 네가 선택해라. 나야 머지않아 다시 만날… 테지만… 네 부모에 대한 얘기는… 오직 나밖에 알지 못한다.
거짓말이다.
십수 년 전이라면, 놈도 어린아이였을 테니까.
분명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고, 이놈 말고도 아는 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는 나조차 모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신경 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뿐더러… 귀찮아.’
사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 따위, 조금도 관심 없었다.
오히려 그 대상이 학장 할아버지였다면 또 모를까.
내게는 낳아준 생부나 생모보다 길러준 그분이 더 소중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약간의 호기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다.
- 무엇보다… 네 부모의 진짜 원수는 따로 있다. 궁금하지… 않나? 이런데도 네가… 포기할 수 있을까?
“…….”
여전히 입도 뻥긋하지 않는 내 반응에 이내 스스로 초조해진 것일까?
- 혹… 나를 믿지 못해 이러는 거라면… 종이에 미리 써두겠다. 그것과 교환을 한다면…….
“아니.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 ……?
“이대로 너도 먹어 치우면 그만이니까. 식탐과 색욕처럼 말이야.”
- ……!
눈을 크게 뜨는 오만을 보며 이윽고 내가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잘 알고 있겠지? 죄악이 품은 기억은, 흡수 즉시 내게도 공유된다는 것을.”
- 자, 잠깐.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뜨는 녀석을 보는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좆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