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204화 (204/251)

204화. 오만(4)

차원의 틈새.

그곳은 잿빛 하늘로 뒤덮인 넓고 음침한 공간이었다.

마치 ‘마계’와도 같은.

“…어? 세타 군?”

내가 틈새로 들어서는 즉시, 놀라움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실라 씨.”

“……!”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단 스실라 씨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도 대부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다 찾는 데 꽤나 애를 먹을 줄 알았는데.

“…….”

분명 이 부분은 다행이었으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건…….”

일순, 내 잇새로 자못 심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죽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전체의 3분의 1.

그들에게서 생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경지가 상대적으로 낮은 저 써클의 마법사들은 이미 모두 명을 달리한 듯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어요. 제 능력으로도 역부족이었죠. 이곳은… 지옥이에요.”

“…….”

스실라 씨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를 향해 미소를 내보였다.

허나, 나는 안다.

저건 미소를 가장한 울음이다.

누구보다 처절한 비탄이자 절규다.

몰골은 또 어떤가?

본래 부드러웠던 머릿결은 푸석푸석해진 지 오래였고.

잠깐 안 본 사이,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역시 이그드라실이 내게 준 것은…….”

우우웅!

때맞춰 품 안에서 가벼운 공명음이 울렸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내가 품은 이그드라실의 구체 내에는, 죽은 이들의 원기.

즉, 진원의 마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절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결론이 났으니까.

오만은.

아니, 칠악은 마계와 중간계의 일체화를 원했다.

그게 그들의 의지인지, 그도 아니면 본체인 마왕의 바람인지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다.

일체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이그드라실.

칠악은 그 결계목을 파괴하기를 원했고.

부족한 힘을, 사람들의 ‘원기’로 충당했다.

지금 내 손안에 있는 이것은, 일종의 기폭장치였다.

수백, 수천 명분의 마나와 생기를 한껏 머금은 구체는 일정 시점에서 ‘펑!’ 하고 폭발을 일으키겠지.

“…근데, 다른 마법사 분들은 안 보이네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였어서…….”

스실라 씨가 예의 아픈 미소로 답했다.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이들이 대략 일천.

마탑 내에 총 3천이 조금 넘는 인원들이 남아 있었으니, 전체의 절반은 자취를 감춘 셈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가 보이지 않았다.

“잭 디스페로우. 그가 가장 걱정이다. 그는 마나를 잃어, 이제는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으니까.”

외팔의 로마르니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섰다.

일반인이 차원의 틈새 내에서 생존한다…

이 부분은 나조차 회의적이었다.

마계를 그대로 카피하다시피 한 이곳은, 마나가 아닌 마기가 곳곳에 산재해 있었으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마기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중독되어 목숨을 위협받는다.

“제가 찾아볼게요. 여기서 가만히 계세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구요. 이제 조금 쉬세요.”

스실라 씨를 향해 애써 미소 지어준 뒤, 곧 일대에 마나를 둘러쳤다.

오만이 만들어낸 하나의 소마계.

전부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안전지대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내게는 그럴 만한 힘이 충분히 존재했으니까.

우웅! 우우우우웅!

몇 번의 공명음 뒤, 이내 약 100여 미터 둘레의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지면에 실선까지 그어뒀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 선 밖으로는 나오지 마세요. 절대로요.”

“…알았다.”

로마르니가 올곧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의 경험 끝에 이제는 나를 철저히 신뢰하는 모양이다.

스팟!

한 차례 땅을 박찬 나는 곧장 하늘을 날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지상이 한눈에 보일 테니까.

휘오오오오오오!

잿빛 하늘 아래, 세찬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친다.

그 사이에서 나는 눈을 더 크게 키웠다.

여전히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워낙 광활한 땅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눈을 감고 기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감각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한데, 그 기운이 상당히 께름칙하다.

이건 숫제 인간이라기보다는…

“…일단 가보자.”

불길한 상상을 애써 떨쳐내며 나는 곧장 한곳으로 쏘아져 갔다.

대략 10여 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내 시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물론 나는 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명실상부 염화의 마탑주 블레어 던 마그마르와 함께 3강으로 손꼽히는 이.

세간에서는, 그 페르보다 더 상위의 실력자로 평가하는 존재.

허나, 이제는 모두 과거형에 불과한 전(前) 파괴의 마탑주.

“이건…?”

어느새 내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아니, 의식의 흐름조차 일시 정지했다.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에.

“왜. 대체 왜…?”

“이 목소리는… 세타 쿤 이그니스인가?”

그는 여태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허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전신으로 전해졌다.

이제 그는…

“당신! 내가 고쳐 준다고 했잖아요. 나랑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왜!”

“…….”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거죠?”

“…….”

“대답해 보세요. 잭 디스페로우, 당신 설마 마족과 계약을 한 건가요?”

사라진 오만의 힘은, 다름 아닌 그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

쩌저적!

무려 10여 미터가 훌쩍 넘는 빙산이 생성된다.

주변으로는 얼음의 파편이 요동친다.

그뿐인가?

파지지지직!

사방에서는 뇌전의 파도가 넘실댔다.

무려 두 마탑주의 합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둘을 홀로 상대하고 있는 한 ‘아이’는 조금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휙! 휘리릭! 퍼억!

날아드는 빙산의 파편은 고개만 젖혀 피해내고.

때로는 같은 마력으로 맞부딪히며.

지면의 전류마저 마력의 창끝으로 유도해 흘려보낸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아이는 두 마탑주의 공세를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고작해야 약관의 나이.

허나, 과연 그를 누가 아이라고 볼까?

“뭐 저딴 괴물이…….”

이미 옛적에 심력이 다해,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에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근육을 잇는 힘줄의 태반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니까.

아마 이대로 방치하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훗. 후후후후.”

다만, 그런 심각한 상처에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려 대륙에서 4번째로 강한 검사를 꺾었으니까.

이제는 그 자신이 대륙에서 넷째 가는 강자라는 의미가 아닌가?

“우와아아아아아! 르반 공작님을 구해내라!”

“테라의 땅을 점령하라아아아아아!”

다만, 일기토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음에도 공국군은 여전했다.

에이스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르반 공작은 죽었지만, 아직 그의 측근들은 공국군 곳곳에 남아 있었기에.

최소 엑스퍼트 상급에 이르는 수십의 강자들 말이다.

“이런 식이면 답이 없는데 말이지.”

짓쳐들어오는 공국군을 보며 에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노스 델 카이클, 저 괴물 녀석은 두 마탑주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뒤늦게 테라 진영에서도 군사들이 출진했지만, 아무리 봐도 한발 늦을 듯한 모양새였다.

양쪽에서 밀려드는 인(人)의 파도 속, 완전히 홀로 고립된 셈이다.

“에휴. 내 팔자가 그러면 그렇지.”

잠시 양쪽을 쳐다보던 에이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귀를 막고 털퍼덕 뒤로 누웠다.

맑은 하늘이 선명하게 시야로 들어온다.

이제는 정말로 일반 병사에게까지 질 것 같았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남들 다 하는 결혼이라도 해둘걸.”

…근데, 이 시점에서 왜 대장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지?

찰나의 상념을 떨쳐 낸 에이스가 다시금 하늘로 시선을 고정했다.

한데…

“……?”

언젠가부터 웬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죽을 때가 되니 헛것이 보이나.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혼자 누워서 뭣 하고 있나?”

“…엑스톤?”

“몰래 숨어든 보람이 있구먼. 솔직히, 네가 르반 공작을 이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국 유일의 마스터.

더하여, 언젠가 친구까지 먹기로 했던 철의 기사 엑스톤.

공국군 내에 숨어 있던 녀석이 가장 먼저 에이스에게 도착한 것이다.

“멈춰라! 나는 현 공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엑스톤 폴 다우니스다!!!!!!”

“……!”

순간, 마나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쩌렁쩌렁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제야 에이스가 슬며시 고개만 들었다.

타이밍 좋게, 공국군 진영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는 것이 시야로 들어왔다.

“선두! 멈춰! 멈춰라아아아아!”

“후미부터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앞사람과 얽혀 넘어지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마라!”

의외로 지휘 체계가 상당히 갖춰져 있었다.

엑스톤이 직접 등장한 이상, 르반 공작이 없는 제국의 기사들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여, 에이스가 감탄의 눈빛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좀 하네? 궁은 완전히 장악한 모양이지?”

“어느 정도는. 모두 네 제자 덕분이다.”

“…그래?”

“대단한 제자를 뒀더군. 처음으로 네가 부러웠다.”

그 말에, 에이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인생 최고의 자랑거리지.”

“그보다, 승자가 모양 빠지게 뭐 하는 게지? 아님, 이제는 일어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건가?”

“설마.”

직후, 에이스가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잠시 그런 그를 바라보던 엑스톤이, 이내 한쪽 어깨를 부축했다.

“이 영광은 네가 누려야 한다. 에이스 디 파르마, 네가 이번 전쟁의 최대 공적자니까.”

“쪽팔리게 무슨…….”

“하면, 이대로 병력들이 쓸데없는 소모전을 이어가는 걸 지켜볼 테냐?”

“…….”

그제야 에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양측의 군사들은 완전히 진군을 멈춘 상태였다.

그들과의 거리는 이제 고작해야 오십여 미터.

“…….”

잠시 양측을 번갈아 바라보던 에이스가 이내 마나 홀을 휘돌렸다.

“나는 테라 군 제일의… 아니지.”

무어라 말하려던 그가 곧 실소를 터뜨렸다.

테라는 무슨, 언제부터 이쪽 사람이었다고…

생각을 정리한 에이스가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마나까지 쥐어짰다.

곧이어, 하복부에 힘을 ‘팍!’ 주고,

“나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법사의 스승이다! 전쟁은 끝났다!!!!”

***

파괴의 마탑주 잭 디스페로우.

…아니, 칠악의 ‘오만’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역시 육신의 힘이 남다르군.”

그는 연이어 스스로의 전신을 둘러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곧 그의 가벼운 손짓에,

콰직!

한쪽 지면이 통째로 터져 나가기까지 한다.

“제아무리 황족이라곤 해도, 기본적인 힘은 상당히 약했거든.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이 있으니…….”

“…….”

“허나, 이 몸은 아주 좋군. 상당히 만족스러워.”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씹어 내뱉듯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스노비 벨 그레이스.”

“세타 쿤 이그니스. 너는 감히 내 것을 빼앗았다.”

“…뭐?”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놈. 나는 지금껏, 내 것을 탐낸 놈은 절대 그냥 두지 않았다. 이 공간도, 제국도. 모두 다 내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지리 같은 놈의 육신도.”

더는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쐐애애애애액!

시간이 느려진다.

전신이 가속화한다.

두 다리는 빗살처럼 전방을 향해 내달렸다.

문자 그대로, 단숨에 놈을 박살내기 위해서.

“훗.”

콰콰콰콰콰콰콰!

직후, 놈의 앞으로 순식간에 큼지막한 배리어가 생성되었다.

나는 안다.

저것은 배리어의 탈을 쓴 일종의 ‘분쇄기’다.

파괴의 마탑주의 주력, ‘파괴’는 무척이나 심플한 능력이었기에.

그의 마나와 닿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모조리 파괴됐다.

거기에는 육신은 물론이거니와, 무형의 마나까지 모두 포함한다.

“크크크… 잠깐 살펴본 것뿐이지만, 그만 멈추는 것이 좋을 텐데?”

“지랄.”

가볍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나는 발걸음을 더욱 크게 했다.

목표는 전방.

눈앞에 있는, 빌어먹을 오만이다.

꾸드드득.

일순, 내 등 근육의 크게 수축했다.

전신의 마나는 이내 신체의 한곳으로 모여들었고.

한껏 힘을 머금은 주변의 대기가 어그러진다.

“…건방진 놈.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모양이군.”

예의 배리어의 색채가 더욱 짙어졌다.

허나, 나는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그저 힘을 거듭한 주먹을 곧게 내뻗을 뿐.

콰아아아앙!

최초의 공격이 배리어를 두들겼다.

허나, 놈이 기대했던 분쇄 작용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내 주먹질 한 방에 배리어 전체로 쩌저적 금이 갔다.

“뭐, 뭣…!”

“아직 멀었다.”

불신으로 가득한 녀석의 얼굴로 곧,

콰지직! 뻐어어어엉!

내 통렬한 주먹이 틀어박혔다.

마치 가죽을 두들기는 듯한 소음.

유리창이 깨지는 경쾌한 소리.

제아무리 모든 것을 분쇄하는 파괴의 주력이라 한들.

마탑주의 육신을 차지했다 한들.

“웃기고 앉아 있어.”

내게는 어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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