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오만(2)
색욕과 식탐.
두 죄악은 분명한 마왕의 힘이었다.
허나, 나는 그들과 계약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힘만 취했을 뿐.
이건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죄악은 오직 마왕의 권능.
오랫동안 그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물며 현현화는, 문자 그대로 마계에 있는 본체의 힘을 이쪽으로 끌어오는 것.
그럼에도 ‘나도 할 수 있다’ 따위의 느낌이 든다 함은…
‘…마왕 쪽이 아니야.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드래곤의 힘이지.’
꾸드득.
순간, 내 눈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이런 경험은 이전에도 이미 겪은 바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문득,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만약 내 안에 있는 것이 단순히 아이리스의 지식이 아니라 ‘혼’ 그 자체라면.
나 또한 마왕이 아닌, 드래곤의 힘을 현현화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마왕도 충분히 찜쪄먹을 수 있지.’
내 입가로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마왕이 아닌, 인간과 드래곤의 홈그라운드.
중간계다.
- 감히 내 앞에서 마기라니, 우습군.
콰우우우우우우우우!
흑풍이 휘몰아친다.
바람은 더욱 날카롭고 견고한 칼날이 되었다.
마치 내 전신을 난도질하려는 듯.
아니, 전신을 넘어 혼마저 갈가리 찢어발기려는 듯 사방에서 불어 닥쳤다.
쿵!
“……!”
문제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육탄 공세도 겸하려는 양.
이족 보행이 가능해진 오만은 성큼 육지로 크게 걸음을 내딛었다.
이미 물기로 눅눅해져 있던 지면 위로 곧, 생명체의 무지막지한 발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세, 세타!”
대경한 루나가 외쳤다.
더하여, 필사적으로 내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만의 힘은 보다 강해졌고.
현재 그녀의 능력으로는 검은 바람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다만,
“괜찮아.”
“……!”
“약속대로 내 등 뒤는 부탁할게. 이대로 내게 정신이 팔리면, 저 괴물의 목을 베어줘.”
이어지는 내 말에 루나가 콰득 입술을 깨물었다.
손안의 검은 더욱 세게 그려 쥔 채.
두 동공으로 뜨거운 불꽃을 점화시키며.
“반드시 해내겠다.”
“응. 믿고 있어.”
우우웅!
직후, 나는 써클을 더욱 거세게 휘돌렸다.
내 의지에 따라 마나와 마기가 한데 뒤섞여 진동한다.
상대는 칠악의 일인, 오만.
육신의 힘은 뭇 칠악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녀석을, 나는 지금 여기서 쓰러뜨리려 한다.
- 건방지다, 인간!
더욱 거세진 바람 속에서 오만이 육중한 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치 단숨에 나를 짜부로 만들려는 듯.
“…….”
허나, 나는 제자리에서 그것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도리어 내부의 기운을 더욱 외부로 분출하면서.
그 결과,
화아아아아아아악!
급격하게 팽창을 일으키던 기운이 이윽고 한 형상을 이루었다.
마기는 마지막 순간, 특정 마나로 치환되었고.
서걱!
“……!”
순식간에 섬뜩한 파육음을 남겼다.
장장 20여 미터를 훌쩍 넘는 ‘빛의 칼날’이다.
오만의 꼬리를 깔끔하게 절단해 낸 그것은 사라지지도 않고 오만을 위협했다.
- 이 무슨… 빛의 주력이라고?
놈의 두 눈이 쉼 없이 요동쳤다.
나는 이 세상 유일무이하게 마나와 마기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존재.
빛과 어둠이라는 상반된 양면을 동시에 지닌 인간.
부글부글, 푸화아아아악!
잠시 끓어오르던 절단부가 순식간에 재생을 마쳤다.
오만의 또 다른 능력, 초재생.
빛의 마나로도 회복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진짜는 내 쪽이 아니었다.
“루나!”
나는 목청을 쥐어짜며 외쳤다.
마나의 10퍼센트를 예의 칼날을 생성하는 데 썼다면.
나머지 90퍼센트는 모두 루나에게 줬다.
하여, 지금의 그녀는…
화아아아아아아악!
이 순간, 한줄기 빛이 되었다.
마치 지상에 여신이라도 강림한 듯.
새하얀 광채에 휩싸인 그녀는 곧 어마어마한 속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내가 알려준 약점.
다름 아닌, 녀석의 목덜미를 향해서.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기합과도 같은 루나의 우렁찬 고성이 터져 나왔다.
- 이년!
곧장 떨쳐 내려는 양, 오만이 제 날개를 크게 펄럭인다.
허나, 한발 늦었다.
루나는 이미 완숙한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섰으며.
거기에 내 신체 강화 마법까지 덕지덕지 매달고 있었으니.
스가아아아아악!
순식간에 허공 위로 새하얀 궤적이 그려졌다.
빛의 마나를 듬뿍 머금은 오러가 마침내 오만의 거대한 목덜미를 갈랐음이다.
-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이 천지를 찢어발긴다.
오만이 고통스레 몸부림친다.
채 잘리지 않은 목이 흉물스레 덜렁이고 있었다.
우우우웅!
나는 한 줌조차 남지 않은 마지막 마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머지 살점마저 베어냈다.
이건 루나와 나의 첫 번째 합작.
그래,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혼자 힘으로 부족하다면, 동료와 함께한다.
푸슈우우우우우!
한 박자 늦게 다량의 피 분수가 사방으로 뿜어져 내렸다.
새까만 외형과 달리, 피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적색이다.
곧 오만의 육중한 몸이 모로 쓰러졌고.
촤아아아아아아!
직후, 호수의 물과 한데 뒤섞인 혈우(血雨)는 한참이나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같은 시각.
두두두두두두두두!
거친 말발굽 소리가 진동한다.
테라와 스란의 네 번째 전투.
이미 세 번의 일전을 벌였음에도 모두가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어쩌면, 이번 전투로 이 지긋지긋한 공국과의 전쟁도 끝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전투 준비!!!!!!!!!!!”
이전과 같이 선봉을 맡은 에이스가 마나를 담아 고함쳤다.
그가 빠른 시간 내에 테라에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돌격 앞으로’가 아닌, ‘나를 따르라’를 몸으로 실천하는 지휘관.
그는 언제나 가장 위험천만한 선봉에 섰으며.
누구보다 많은 검을 받아내고, 무수한 적의 목을 베었다.
그런 그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은 사람들만 벌써 백 단위를 헤아렸으니.
이제 그를 외부인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에이스 디 파르마다! 나와 겨뤄볼 자가 있겠는가!?”
적군은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대략 1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
딱 화살의 범위에서 벗어난 자리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에이스는 ‘일기토’를 요청했다.
“……!”
잠시간 적군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나설 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마 적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내심 상대가 바라 마지않던 일일 테니까.
이기면 단숨에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사기까지 진작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더욱이, ‘제국’ 출신 마스터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남달랐으니.
“나는 스왈로우의 르반 공작이다!”
예상대로, 적군 내에서 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멀리서도 확 눈에 띄는 보랏빛 머리칼.
그 대답과 동시였다.
“와아아아아아아! 안개의 검사다!”
“제국의 십이월! 이거야말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로군!”
“같은 십이월이라도 하위권인 8월의 검사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단번에 목을 베어달라고!”
“르반 공작님 만세!!!!”
적 진영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숫제, 공국군인지 제국군인지 착각마저 일 정도다.
“…….”
그에 비해, 테라 군은 한없이 고요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제국의 십이월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앞으로의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게 어느 쪽이든…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에이스가 비틀린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리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마주 다가오는, 예의 대단하신 제국 출신의 마스터를 향해서.
“대화는 필요 없겠지?”
“기사는 검으로 얘기하는 법. 다만, 그대의 용기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군.”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네.”
뒤는 혼잣말이었다.
이래서 소위 말하는 제국의 마스터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속은 경멸과 무시 따위의 감정으로 가득하면서 겉은 누구보다 고고한 기사인 마냥.
마치 상대를 진짜 존중이라도 한다는 듯한 저 태도가, 에이스는 항상 역겨웠다.
그래도 공국의 마스터인 엑스톤은 멍청할망정 순박한 맛이라도 있지.
우우우웅!
이후, 에이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세를 다잡았다.
검과 마나가 공명을 일으킨다.
내부의 기운은 곧, 선명한 오러로 탈바꿈했다.
이제 상대와는 고작 오십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
그때까지도 적은 검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뒈지고 나서 후회할 모양이지?”
씹어 내뱉듯 중얼거린 에이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상대가 방심해 준다면, 그것대로 좋았다.
그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속도’에 있었으니.
“채 인지할 틈도 없이 베어주지.”
‘지’라는 말이 채 울리기도 전에 땅을 박찼다.
아니, 이건 숫제 땅이 그를 밀어냈다고 해야 할까?
펑!
뒤늦게 웬 폭음마저 울렸다.
지금 이 순간, 에이스는 가공할 ‘바람’이 되었다.
***
“하아, 하아…….”
루나의 달뜬 신음이 연이어 고막을 때렸다.
한순간 마나를 쏟아부어서인지 겉으로 봐도 상당히 지쳐 보였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까지도 쉬지 않고 왕복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진 루나였다.
그만큼 육신의 힘이 아닌, 심적인 부분이 많이 소모되었다는 뜻이겠지.
“…….”
그 이유가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었다.
오만의 거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니까.
솔직히 이리 쉽게 쓰러뜨릴 줄은 나조차 예상치 못했지만…
옆에 선 루나의 덕이 컸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고마워.”
“……!”
“덕분에 쉽게 해결했어.”
하여, 나는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던 루나는 잠시 후 말갛게 미소 지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
그 맑고 깨끗한 웃음을 가만히 바라보던 내가, 이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터뜨렸다.
미소 짓는 얼굴은 테라가 아니라 대륙 제일이라니까.
“…그보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오만이 소멸했는데도 사라진 사람들이 드러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이 말인즉,
“아무래도 직접 차원의 틈새에 들어가야 하는 모양인데?”
“차원의 틈새…?”
“응. 근데, 이번에는 나 혼자 가는 편이 낫겠어.”
“…….”
대번에 루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구태여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이 꼭 ‘왜?’라고 되묻는 듯했다.
“내가 자신이 없어서 그래. 들어가는 입구는 같겠지만,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질 수도 있거든. 말이 차원의 틈새지, 내부가 얼마나 넓을지도 모르고.”
“…알겠다.”
“엉? 이렇게 바로 이해해 준다고?”
“내 목적은 주군을 지키는 것이지,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니까.”
“…….”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럼 뭐, 안 돌아오면 여기서 굶어 죽겠다는 건가.
지금까지 봐온 루나의 성격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했다.
“…꼭 돌아와야겠네.”
“반드시다.”
꽤나 힘들었는지 그대로 ‘털썩!’ 주저앉는 루나를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달리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또 있었다.
우선, 상대가 내 생각보다 너무 쉽게 소멸했고.
스노비를 죽였음에도 아직 오만의 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죄악 또한 차원의 틈새에 있는 것이라면 모든 설명이 됐다.
순전히 내 예상이지만, 직접 거기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해내고 오만의 힘을 찾아야 할 듯싶다.
하물며 죄악은 사용자의 ‘기억’까지 품고 있으니.
“…오만을 취하면, 제국의 숨겨진 비사(祕事)까지도 알 수 있을 테지.”
이윽고 말을 마친 내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호수 밑바닥.
죄악의 힘이 느껴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