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오만(1)
지금 내 앞에, 몸통 길이만 무려 20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 괴수가 있다.
그것도 신화 속 마물, 리바이어던을 꼭 닮은.
자칫 멀리서 보면 드래곤으로도 오해할 수 있었으나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족 보행도 가능한 전자와 달리, 눈앞에 있는 마물은 오히려 ‘악어’에 가까운 외형이었으니까.
“…근데, 진짜 크기는 더럽게 크네.”
절로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굳어 있던 루나가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한데, 목소리가 이 이상 딱딱할 수가 없었다.
“방금… 스노비 벨 그레이스라고?”
“응.”
“내가 아는 제국의 그 2황자?”
“맞아.”
“처음에는 분명 ‘오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하기야, 지금껏 2황자가 칠악이라는 얘기는 음모론에 가까웠으니.
그 음모론조차 스승님들을 포함한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얘기였고.
“뭐긴 뭐겠어. 제국의 2황자 스노비 벨 그레이스. 그가 바로 칠악의 일인인 오만이자, 눈앞에 있는 괴물이라는 뜻이지.”
“……!”
눈을 치켜뜨는 루나를 일별하며,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어떻게 됐지?”
- 글쎄. 어떻게 됐을까?
스노비는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그 반문으로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내가 올 것을 진즉에 예상했다.
하니, 일부는 잘못되었을지언정 전부가 비명횡사하지는 않았을 테지.
여차하면 ‘인질’이 필요할 테니까.
지금도 내 반응을 떠보려는 듯한 저 태도로 보아, 확실하다.
무엇보다 오만의 권능.
그 이능은 대상을 ‘차원의 틈새’에 가두는 것이었다.
“…결국 저걸 죽여야 모두를 구출해 낼 수 있다는 건데…….”
- 과연 네가 할 수 있을까?
혼잣말이었는데 대번에 녀석이 반응했다.
“…몇 가지 상황만 갖춰지면 충분히 가능하지.”
- 오만하군.
“자신이겠지. 네 동료들은?”
- 곧 줄줄이 도착할 게다. 네가 이리 빨리 도착할 줄은 나조차 예상치 못했으니까.
오히려 잘됐다.
다시 말해 이 대 일.
이쪽에는 루나까지 있었으니.
“그보다, 너는 땅 밑으로 움직였나 보네?”
- …….
길게 찢어진 괴물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오만의 또 다른 이능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거대화한 저 몸으로 음지인 지하를 초속으로 이동하는 것.
아마 저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대륙 끝에서 끝까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주파해 낼 수 있으리라.
- …너는 쓸데없이 아는 게 많군.
“황자 정도 위치면 상대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이럴 땐 칭찬을 하는 거야.”
- 그게 아니다. 방금 내 말은, 일종의 사형 선고와도 같음이니.
촤아아아아아악!
순간, 스노비가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호수가 크게 요동쳤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아무튼, 지금은 혼자라는 뜻이잖아?”
우우웅!
자세를 다잡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루나가 나를 엄호하려는 양 빠르게 앞을 막아섰다.
그 상태로 나는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을 제국의 국장일(國葬日)로 만들어줄게.”
- …….
오늘 네 제삿날이다.
그걸 에둘러 표현한 내가 곧 도발적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와봐, 이 괴물 새끼야.”
***
한편, 테라와 스란 사이의 국경.
“공국 군이 총공세를 준비한다는 정보입니다.”
“…….”
참모의 한마디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걔 중에는 테라 제일의 천재라는 제노스와 8월의 검사 에이스도 있었다.
“어찌 또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세타 녀석 덕분에 공국 쪽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지 않았나?”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모두가 뜻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저희처럼요.”
“…그것, 참 확실하게 이해되는 비유구먼. 저쪽도 반란군이니 해방군이니, 서로 지랄발광을 해대고 있다는 뜻이지?”
“…….”
몇몇 테라의 인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그만큼 군영 내에서 차지하는 에이스의 비중이 거대해졌다는 반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략 절반의 공국 군이 궁으로 회군(回軍)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가? 내 제자 놈이 아예 헛지랄만 한 건 아니라는 뜻인데…….”
순간, 에이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상념으로 빠져들었다.
말은 그리했지만 처음에는 어찌나 놀랐던지.
적의 면면이 좀이나 대단했으니까.
공국 최고의 기사단은 물론이고.
실체가 무려 ‘마족’이었던 공왕.
거기에, 그와 같은 십이월인 철의 기사 엑스톤까지.
녀석은 그 모두를 홀로 상대했다고 한다.
‘…이대로면 스승 체면에 말이 아니지.’
이내 잡생각을 털어낸 에이스가 정면을 바라봤다.
바로 옆에, 그와 비슷한 표정인 천재 애송이가 자리해 있었다.
제노스 델 카이클.
이제 에이스는 확실하게 안다.
이 녀석은 그의 제자와도 비견될 무지막지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남은 공국 군은 대략 6만. 수성이라는 이점도 있으니, 머릿수의 부족함은 더 이상 문제도 아닙니다. 다만…….”
“초인. 그들이 가장 큰 문제다?”
“예. 제국의 십이월이 하나. 그리고 십이지왕이 불리는 마탑주가 둘. 진짜 골칫거리는 그들입니다.”
“그렇겠네.”
“…가능하시겠습니까?”
많은 뜻이 내포된 물음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자리에 모인 지휘부들의 시선이 모두 에이스에게 집중됐다.
그가 무리라고 답하면, 전쟁은 이미 패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우리가 그 세 놈만 쳐부수면, 갈팡질팡하는 나머지 공국 군들도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서겠지?”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함께 있어 불가항력으로 따르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니까요.”
“나도 그리 생각해. 엑스톤, 그놈이 스란 내에서 그리 인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
말을 마친 에이스가 힐끗 옆을 돌아봤다.
“안개의 기사 르반 공작. 제자 놈이 둘을 하나로 줄여줬으니 나야 어찌어찌 되겠지만, 넌 괜찮겠냐? 무려 마탑주가 둘이라는데.”
“…….”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노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마도. 당신이 르반 공작을 잘 묶어주신다면요.”
“이런 싸가지…….”
“그저 조금만 버텨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하면, 제가 금세 도우러 갈 테니까요.”
멈칫.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에이스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허 참…….”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러니 믿고 한번 등을 맡겨보시지요.”
“…….”
고작 스물도 되지 않은 애송이의 발언이었다.
허나, 침묵을 지키던 에이스는 곧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런 부류의 아이들을, 그는 딱히 싫어하지는 않았으니까.
“새끼, 누구 친구 아니랄까 봐, 자신감 하나는 좋네.”
***
열두 마탑 사이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의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마나와 마기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전신으로 물밀듯 들이닥치는 새까만 파도 속에 나는 집중을 거듭했다.
조금만 한눈을 팔게 되면…
피피핏!
…바로 지금처럼 ‘검은 바람’에 사지가 잘려 나갈 테니까.
곧 볼 끝을 타고 끈적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걸 의식했는지, 루나의 검은 더욱더 빨라졌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채챙!
흑풍(黑風)은 쉼 없이 휘몰아쳤다.
출처는 오만의 거대한 아가리였고.
하여, 나와 루나는 보다 효율적으로 분업했다.
중력 마법을 일으켜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몸을 지탱하는 한편.
오러와도 같은 풍력(風力)의 예기는 루나가 일일이 검으로 쳐냈다.
그럼에도 예의 검은 바람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기가 무한한 건지, 오만은 장장 10여 분 동안이나 그렇게 흑풍을 토해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는데…!”
바람을 뚫어내며 내가 목청을 쥐어짰다.
그런 내 시야에, 곧 루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상황이 지속될수록 전신의 상처가 늘어나고 있는 그녀였다.
아예 내 방패가 되어주기로 작정한 듯했다.
…물론, 나는 루나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의 약속과도 같은 맹세.
그것 때문이겠지.
‘곰탱이보다 더 미련한 여자 같으니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내가 고개를 앞으로 가져갔다.
“신호를 주면 물러서. 승부수를 띄울 테니까.”
“……!”
순간, 루나가 흠칫하고 놀란다.
귀에다 입을 가져다 댄 내가 빠르게 속삭인 결과였다.
그 상태로, 그녀가 슬며시 시선만 내게로 돌렸다.
“어떻게…?”
“다들 잘 모르고 있지만, 내게도 ‘주력’이라 부를 만한 특기는 있어.”
“……!”
루나의 눈이 대번에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주력.
마법사의 한계를 명백하게 그어놓는 개념.
허나, 그 한계의 구분이 모호했던 고대 시대조차 주력이라는 개념은 존재했다.
물론 그때에는 ‘이것 빼고 다 못 쓴다’가 아니라, 주특기 정도의 개념이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람은, 내 지배하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거든.”
두둥실.
곧바로 몸을 띄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는 허공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화들짝 놀란 루나가 ‘발딱!’ 고개를 치켜들었다.
쩌억하니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오만의 동공에도 곧 이채가 스쳐 지나간다.
- 스스로 전방으로 나선 건가? 멍청한 놈.
녀석은 곧장 내게 의지를 전해왔다.
그리고 더 흉포하게 흑풍을 뿜어냈다.
아니, 이제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쩌적! 쩌저저저적!
“음…….”
절로 침음이 새어 나왔다.
기다렸다는 양, 오만은 변화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오만의 전신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저 현상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현현화.
그것도 무려 칠대 죄악인 오만의 현신이다.
일전의 공왕 때와는 명백히 달랐다.
고작 상급 마족에 불과했던 그것과 달리, 오만의 실체는 무려 ‘마왕’이었으니까.
“마왕 정도의 존재도 중간계에 현신할 수 있었던 건가?”
-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칠악이라 불리는 우리가 중간계에서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니까.
“…….”
나는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칠악은 하나하나가 최소 일백에 가까운 나이라고 들었기에.
인간으로 치면, 장장 한 세기 전의 노괴들이라는 뜻이다.
다만 여기서 의문인 것은…
“2황자 스노비 벨 그레이스. 그 몸뚱아리의 나이는 이제 고작해야 20대로 알고 있는데?”
- 궁금한가?
오만이 비죽이 미소 지었다.
웃는다고 해봐야 길게 찢어진 입이 더 귀에 가까워졌을 뿐이지만, 내게는 분명 그리 보였다.
- 두 죄악을 이리 직접 가지고 와준 보답으로 알려주지. 인간들 사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다지?
“…설마.”
- 그런 거다.
나는 단번에 상황을 깨달았다.
피를 통한 혼(魂)의 이동.
마왕쯤 되는 존재에게 육신의 교체쯤은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아마 제국의 황궁에, 대대로 마왕의 제물이 되는 혈족이 존재하는 것일 테지.
…여기서 또 의문인 것은.
하면, 왜 지금에 와서 오만은 그간의 불문율을 깨뜨리고 전면으로 나섰냐는 점이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군. 그것도 알려주마. 이제 우리를 막아서던 장애물은 중간계에서 사라졌으니까.
“……!”
- 고작 5개체라고 했던가? 그 어리석은 도마뱀들의 남은 개체 수가.
“…역시.”
한 망룡으로부터 비롯된 일대의 사건.
드래곤들의 집단 유체 이탈.
중간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그들이 사라진 이상, 이제 마계의 존재들에게 거리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데, 왜일까?
이 시점에서, 의문 모를 죄책감이 치솟는 것은.
‘이것도 아이리스의 감정인가?’
- 이제 끝을 내지.
마침내 알을 깨고 부화하는 새처럼.
오만의 표면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표피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것은 칠흑보다 더 새까만 비늘이었고.
펄럭!
곧이어, 한 쌍의 거대한 날개마저 모습을 드러낸다.
이무기가 마침내 용으로 승화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마계 내에서 오만의 이름은 암흑룡.
바로, 모든 마물의 정점이다.
- 현현화가 80퍼센트 이상 진행된 이상,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너는 이길 수 없다.
어쩐지 친절하게 물음에 답해준다 싶더니, 저런 속내였던가.
마계의 힘을 대부분 활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현현화라면, 저런 자신감도 분명 근거가 있었다.
허나…
두근!
여기서 내게 이변이 발생했다.
어느 순간 심장이 쿵쾅대더니, 내면의 거대한 두 기운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색욕과 식탐.
다름 아닌, 오만과 같은 마왕의 두 힘이.
…어쩌면 이거,
“…나도 가능할 것 같은데?”
콰콰콰콰콰콰콰콰!
직후, 나는 본능에 따라 있는 힘껏 마기를 외부로 분출했다.